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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옥인의 일본을 다녀와서 (149)

작성자~조흥제|작성시간26.06.17|조회수24 목록 댓글 0
           (149) 임옥인의 일본에 다녀와서


                                                                                                      조 흥 제


  천성적으로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건강이 여의치 못해서 해방 후 몇 번이고 해외여행의 기회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국내 여행조차 마음대로 못해 왔던 사실은 가장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낯선 곳이거나 아니거나 간에 훌쩍 여로에 나서면 심신에 해방감이 퍼져오며 공상의 나래가 펼쳐지게 마련인 것이다. 이번 渡日여행은 나의 건강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정신적인 의욕을 웅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여튼 비행기 상에서 저 아래 펼쳐지는 운해를 내려다보며 오래간만에 청신하고도 즐거운 감성을 경험하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2차 대전 발발을 일본 瀨湖內海 근처에서 알았고, B-29의 첫 폭격을 명고옥에서 겪었을 때 동석했던 일본 친구의 혈압 높은 어머니는,
“괘씸해라. 이럴 수가 있어? 장난이겠지.”
하던 어느 만찬을 생생하게 기억해 나는 사건과 세월과 역사의 흐름, 그리고 나 자신 속에 자국을 남긴 인생에 대해서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얼마 안 가서 고혈압으로 별세했다는 그 친구의 어머니는 동경지진 때의 교포학살 사건이 연상되는 식량 암거래를 염려하면서 일본 땅에서 속히 떠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떠났던 일본땅은 따지고 보면 공부하던 시기를 합쳐 체류 10년이 넘었었다.
동경의 고가, 고속도로의 양상은 우리나라의 그것과 다를 바 없겠고 다스러던 국토가 우리보다 광범한 만큼의 규모의 차이뿐이라 하겠다. 내 동창 선배가 나를 보자마자 채 인사도 치르기 전에,
“일본인은 드라이해서 못쓰겠어. 서구인의 물질문명의 뒤만 보고 주먹을 부르쥐고 뜀박질하다 보니 본래 갖고 있던 의리나 인정도 상실했단 말야! 하지만 당신네들은……”
하고 개탄하는데 첨엔 기이한 느낌이 들었지만 심리학 교수인 그는 뭔가 물질에 뒤진 정신적인 기반을 염려하는 성 싶어 나도 거기엔 전혀 동감이었다. 어디 부족한 구석 없이 건설해 놓은 표면은 고층건물과 네온사인과 상품과 교통질서와 기계의 활용 등등, 그 모든 것은 합리적인 생활상이었다.
아직은 길을 파헤치고 진흙탕의 뒷골목과 판자집과 궁상을 면치 못하는 농촌과 부족한 교실과 무질서한 시장과 교통지옥과 설비 미비의 국내 정경을 눈아프게 느끼고 있는 한 여행자의 눈에는 과연 앞섰다. 완전하다. 부럽다는 감정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설과 질서 속에서, 그 건설의 주인, 질서의 주인인 인간은 빛을 잃고 맛을 잃어서, 위에서 언급한 나의 동창 선배의 개탄이 실상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영토내의 생활은 역시 일본적이기를 바라는 것은 오히려 여행자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川端康成의 문학이 세계인의 이목을 끓었던 소이는 그 일본인의 특이한 감각과 생활의 표현에 있었던 것이다. 구태어 스케일의 방대함과 사상의 심오를 따지기 전에 세계의 눈길은 일본인만이 지닌 체취를 택했던 것은 우리에게도 직접적인 시사가 되리라고 믿는 것이다.
동경 체류 수 삼일만에 염증이 생긴 중에서도 34년만의 동기동창들을 해후한 것은 감개가 깊다 아니할 수 없었다. 이름만으로 가늠하는 서로 변모한 동창생끼리는—동경관 양식부에 마주 앉아 담소하기 몇분 후에는 곧 시간도 공간도 뛰어 넘어 젊은 날의 학생시절로 돌아가는 걸 누구나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사를 몰라 서로 걱정한 때가 있었지만 이렇게 살아서 만나니 얼마나 고마우냐고, 젖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반백의 머리털을 그대로 이마 위에 덮고 마주 앉았는 K는 분명 클라스에서도 제일 가는 미인이며 귀염둥이였는데 지금은 S여대의 미학교수이다. 선조를 따져보니까 귀화인이라며 그래서인지 몰라도 몹시도 친한적이다. 그 친구의 권면으로 경도에서 열렸던 두 개의 미술전을 감상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근대 유럽 미술에 대해서 일본인으로서 처음으로 정면도전하여 성공을 거두고 파리에서 객사한 藤田화백의 유작정에 몰려드는 인파 속에 섞여 감상하면서 나는 뭔가 예술가의 기백 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다. 맞은 편 미술관에서 역시 동시에 열리고 있는 로우트렉크展은, 그 화풍으로 보아 등전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여유와 위트와 천분을 느끼게 했다. 폐피의 신체 속에 감추었던 그의 천분은 만화의 원천이 되었지만, 인간에겐 전화위복이라는 개척분야가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겠다.
관광버스로 안내양의 설명을 들으면서 嵐山(람산)의 단풍의 계곡을 굽이굽이 돌아 올라갔다. 기후와 풍토가 습습해서 수목이 자라기에 최적이므로 산야에 울울한 숲을 볼 때, 부럽다면 오히려 그것이 부러웠다. 길과 고층 건물은 시간과 노력과 자금을 걸면 우리도 가능하다. 또 이미 눈부시게 건설했다. 그러나 이 자연조건과 이미 빽빽한 연륜의 수목들을 돈으로는 살 수가 없다. 계곡 아늑히 산적해있는 목재와 그것으로 다듬어지는 목조가 옥돌과 이미 있어 온 화가들의 풍치가 훨씬 일본적인 걸 느꼈다. 현대 아파트나 고층빌딩들도 우리의 것보다는 중후하지 않은 것은 풍토 탓인가 싶다.
일본은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없고, 빈부의 그것없이 생활이 평준화돼 있다는 것도 피상적인 얘기가 아니다. 한 여행자의 눈에는 그러했다. 여고시절의 은사를 만나러 靜岡 시외에 가서 일박하고 주변을 돌아보고 더욱 그런걸 느꼈다. 농사는 풍작이고, 그 풍작은 좋은 값으로 처분되어 농가에선 태평가를 부르고, 관광지에 모여드는 사람들이란 외국인이 아니면, 대개가 농촌에서 추수를 끝낸 농민 가족들이었다.
동경에서 비일본적인 것에 흥미를 잃은 나는 경도, 奈良등에 존재하고 있는 고적을 구경함으로써 우리 국내의 알뜰살뜰한 고적들을 불현듯 보고싶은 사람들처럼 그리워했다. 언뜻 보기에 찬란하고 큰 것 같으나 다시 머물거나 보고도 싶지 않은 그 나라의 고적중에서도 法隆寺의 내경에 들어서니, 우리의 옛 호흡을 느끼게 하는 점이 많았다. 신라, 백제의 숨결을 거기서 느끼면 나는 불국사나 비원이 갑자기 그리워졌다.
문화에 뒤질 수는 없다. 그러나 돌 하나에라도 우리는 우리의 얼이 스민 문화를 창조해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개성의 상실은 모든 것의 상실이라는 걸 더욱 뼈저리게 느낀다. 기계적인 훈련에 앞서 내부의 것을 상실한다는 건 만회할 수 없는 손실이다.
사제의 정이나 동창의 우의나 그런 것이 우뚝 솟은 시설보다는 훨씬 아름답고 근원적이라는 걸 나는 느낀다.
남의 것을 봄으로써 내것을 아끼고 사랑할 마음이 생기는 것은 여행자의 공통된 느낌이 아닐까 한다. 외국계라면 덮어놓고 좋아하고 신용하던 그릇된 생각에서 우리는 탈피해아 하겠다. 에누리와 粗製品이 흔한 것을 보고 또 관광지에서의 눈가림의 선물들을 구경하면서 나는 웬일인지 평소의 구매욕이 싸악 가시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생활 전반에 스며든 미술화는 분명히 모두를 깨끗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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