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장덕순의 四寸의 倫理 조 흥 제 ‘이웃 四寸’이란 말이 있다. 촌수는 없지만 이웃은 사촌형제처럼 가깝다는 말이다. 여기서 ‘사촌’은 상부상조의 미덕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은 사촌은 시기요 질투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사촌은 만만한 위치에 있다. 6촌이나 8촌, 10촌이 논을 사도 배가 아플 것인가? 또 사촌보다 가까운 친 형제가 논을 사도 배가 아픈가? 아들이 잘 산다고 시기할 어버이가 없을 것이고, 아버지가 잘 산다고 질투할 자식은 없다. 또 친 아우나 친 형이 출세하고 돈을 벌었다고 샘을 낼 형제도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엄연한 혈연이 작용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들이 잘되는 것을 싫어할 어버이가 없다지만, 만일 그 어버이가 계모든가 계부일 경우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더욱 그 계모나 계부가 자기 혈통을 이을 혈육이 있을 때에는 더욱 무서운 질투가 뱀처럼 서리게 되게 마련이다. 친 형제라 하더라도 이복일 경우의 시기, 쟁투는 더할 나위도 없다. 부부 사이에는 애초부터 시샘이 없다. 그만큼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다가 부부의 인연이 끊어지면 그 순간부터 남이 되어버리고 따라서 상호간에 시기, 질투의 감정이 실실이 감기게 될 것이다. 질투의 여신은 아주 가까운 인간관계에든가, 혹은 아주 먼 인간관계에는 범접하려 하지 않는다. 마력적인 시기의 생태가 여기에서 교묘히 작용된다. 아주 친한 형제가 있다. 혈통도 같은 동복의 형제일 뿐 아니라, 남달리 우애가 돈독한 사이였다. 이해를 초월한 자기 희생의 유별란 동기간이다. 그런데 이 형제가 각각 결혼을 했다. 이 우애의 세계에 뛰어든 두 여성 이방인은 바로 질투의 여신이었다. 이 어린 형제들은 그 부분의 정도 알뜰살뜰 정다웠다. 그러나 혈연이 전혀 동떨어져 있는 이 여인들은 서로 잘 살려는 경쟁의식이 강하여 마침내 시기와 질투의 화신이 되고 만다. 이에 남편들도 점점 아내와 동조한다. 만일 이 두 여인인 동서라는 위치에 있지 않다면 이왕부터 아는 사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불꽃을 튕기는 질시는 없었을 것이 아닌가. 질투의 魔神(마신)은 너무 가까운 사이에서나, 혹은 너무 먼 사이에서는 그 마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이 불원, 불근의 경지, 그러면서도 공동한 이해관계라든가 어떤 면에서나 공통한 조건이 서려있는 곳에 이 여신은 쉽게 서식하는 것이다. 사촌이라는 불원, 불근의 위치야말로 이 여신의 안식처가 아닌가? 그러나 그 2촌이나 1촌의 세계에도 이방의 여인이 뛰어들 때에는, 이를 매개로 또 쉽게 안주하려 드는 것이다. 흥부와 놀부는 같은 어버이의 피를 이은 정통적인 동기간이다. 이 형제 사이는 질투해야 할 하등의 선천적인 조건이 부여되어 있지 않다. 놀부는 심술궂고, 욕심 많은 사람임에는 틀림없으나, 작품에 나타난 그는 비교적 소박 솔직하다. 그의 우직이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낸다. 그런데 흥부와 놀부 사이에 비극적인 사건을 보다 더 급속도로 조성하는데 기여한 공로자는 역시 놀부의 아내였다. 이 놀부의 아내야말로 시기, 질투, 욕심의 덩어리였던 것이다. 우둔한 욕심꾸러기 놀부는 이 간교와 妖邪(요사)의 여성에게 휘둘리어 같은 혈족인 친 아우를 축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흥부나 흥부 아내는 어디까지나 형을 시기하지 않았다. 무능하기만 한 착한 인간들이었다. 과연 너무도 무능했다. 흥부가 더 바보였다. 미물 짐승인 제비새끼의 기적이 없었던들, 하루 아침에 온 식구가 집단적으로 굶어 죽었을 것이다. 질투나 시기는 그래도 똑똑한 사람, 주체의식이 서 있는 자에게 있다. 흥부전 전체를 통독해서 느껴지는 것은 흥부의 지나친 무능, 무기력이다. 이런 자에게 약간인들 샘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흥부의 아내는 그렇지 않다. 형이나 큰 동서에게 향한 반항의식이 번뜩이고 있다. 따라서 남편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렇기에 그에게도 날카로운 질투가 서려 있었던 것이다. 흥부의 박(보은 박)에서 금은 보화가 쏟아져 나와서 흥부는 졸지에 거부가 되었다. 마지막 남은 박을 흥부가 또 켜려할 때에 아내는 말렸다. 이제 나올 것은 다 나왔고 이것으로도 족하다는 생각에서였겠지만, 풍성한 백화점의 물건처럼 쏟아져 나오는 이 마력의 박속에서 미인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 혹시 미녀라도 툭 튀어 나온다면 어쩌나 하는 의구심도 있었으리라. 과연 마지막 박을 켜 놓으니 그 속에서 절대가인이 나타났다. 흥부의 아내는 놀랐다. 그 순간 그녀는 모든 재물도 눈앞에 보이지 않았으리라. 비수같은 질투, 서릿발 같은 시샘이 싸늘하게 양미간에 서렸다. 싱글벙글 좋기만 한 흥부는 조강지처는 절대로 안 버린다는 서투른 웅변으로 이 장면을 어물쩍 넘기기는 했으나, 그녀의 한 구석에는 이 질투의 여신은 독을 품은 채 도사리고 앉았으리라. 흥부의 아내는 그만큼 자아가 서 있기 때문에 妬神이 머루를 수 있었다. 뮤즈의 여신은 독자성이 강렬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질투가 심하다. 만일 누가 鼓角(고각)을 불며 그녀를 억지로 행렬 선두에 내세웠다면 그녀는 무서운 복수를 감행할 것이다. 질투는 좋게 말해서 자기의 영토를 사수하는 것이요, 악의로 발전하면 남의 영토까지 범하는 것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배가 아프다는 것은 사촌이 잘 되는 것을 싫어(嬚)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아프다(痛)’는 현상은 고쳐야 할 병이다. 이 병을 고치는 방법에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이 배가 이프게 된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촌의 논을 짓밟아서 심술을 피우든가, 빼앗든가 하는 약탈적 방법이오, 다른 하나는 사촌의 논보다 더 좋은 논을 사도록 노력하는 방법이다. 전자는 남의 영토까지를 침략함으로써 마음이 후련해지는 독재자의 요법이라면, 후자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자기의 영토를 합법적으로 늘여가는 민주적 요법인 것이다. 질투가 없는 사람은 발전성이 없다는 말은 주로 후자의 요법에 기초를 둔 말이다. 놀부는 전자요, 흥부는 소극적이나마 후자일 것이다. 뮤즈의 여신은 자기의 영토가 침략당했을 때만 복수하지, 자기의 영토가 안전할 때에는 복수를 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예술의 독자성을 사수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여인들에게는 질투가 하나의 마력일 수도 있다. 질투가 없는 여인은 헤벌어졌고, 독점욕이 없고, 박력이 없고,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질투는 사랑과 통한다고 한다. 강력한 사랑의 영토 속에는 질투가 복병하고 있다. 이는 사랑의 제2선을 담당하고 있다. 만일 자기의 연인이 남을 사랑할 때에, 만일 자기의 영토가 피탈당할 위험에 있어서는 이 질투의 신은 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장미꽃 같은 정렬적인 사랑 뒤에 날카로운 가시의 질투가 서리고 있는 여인은 무섭기도 하려니와, 그러나 그 사랑은 고귀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자율적이요, 독자성이 있고, 독점욕이 왕성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우리나라 여성들은 이 질투가 가장 강렬했었나 보다. 그러기에 이른바 ‘七去’라는 아내 추방 7개조 속에 질투하는 여인도 마땅히 내보내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다. ‘남편이 백첩을 두어도 질투해서는 안된다.’라는 말은 질투의 여신을 두려워한 남자들이 제멋대로 만든 헌법이다. 남자들만이 입법할 수 있는 구 제도에서 그들은 이 한 조항을 설정하여 가장 무서운 적의 침략을 막았던 것이다. 여성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무기가 눈물과 이 질투였기 때문에 입법만능의 남자는 이 법조항으로 안도할 수 있을 줄 알았으나, 역대의 남성들은 이 질투의 횡포에서 완전히 해방되지는 못했다. 이제는 ‘嫉妬’의 어원을 밝혀 보아야겠다. ‘嫉(질)’이나 ‘妬(투)’가 모두 여인의 상징인 ‘女(여)’자로 되어 있다는데 우선 여성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다. 그러기에 나는 이미 질투는 여성의 매력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이는 어쨌든 ‘嫉’은 남이 잘된 것을 싫어하는 것이고, ‘妬’는 요새 말로 ‘강짜’를 부리는 여성 전유의 글자인데 이 자는 ‘妒(투)’자와 통한다. 妒(투)자는 주로 다른 남녀의 情交(정교)를 미워한다는 뜻으로 史記(사기)에 “女無美惡人宮見妒……”란 말이 있다. 그리고 이 말의 대구가 “……士無賢不肖入朝見嫉”이라 있는데 이것이 자못 흥미 있는 말이다. ‘질’이나 ‘투’가 모두 여자의 전유물인데 어쩌다가 ‘嫉(질)’은 남자에게 뒤집어 씌워버렸다는 사실이다. ‘妬(투)’나 남의 남자와 여자의 정사를 시기한다는 것은 지나친 월권이 아닌가. 자기의 연인이나 남편이 그랬다면 몰라도 그렇지도 않은 인간관계에서 왜 혐오의식을 느끼느냐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4촌의 위치도 안되는 것이 아닌가고 반문할는지는 모르나 여성이란 천하의 여성을 같은 촌수로 간주하는 동등의식이 있다. 더욱 연령이나 직업 등의 공통은 더 질투의 대상으로 보는, 좋게 말해서 폭 넓은 스케일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한번도 보지 못한 서반구의 인기여성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한국 여성들은 그 관심이란 것이 약간의 경쟁의식, 질투심에서 유래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은막의 여성 스타들에게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상 여성들이다. 이 관심은 동성끼리라는 공유의 친근감에서 시작하여 공유하는 같은 경내에서의 질투의식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4촌이라는 것은 이 공통, 공유의 연대적 위치를 설명한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8촌이나 10촌까지는 근시적인 거리권외에 서 있다. 따라서 경쟁의식의 열외에 있기 때문에 그가 논을 사도 배가 아프지 않다. 그러나 요새는 매스컴과 교통의 발전으로 세계는 좁아졌다. 여자는 여자대로 전 세계의 여자가 사촌이 되고, 남자는 남자대로 그렇게 되어 버렸다. 40대의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가장 많은 관심을 가닌 것은 세계의 40대의 장년층들이었다. 이 ‘40대’라는 것이 4촌이라는 위치와 통하기 때문이다. 같은 40대가 대통령이 되어 세계를 주름잡는데 ‘나’는 무얼 하나? 하는 일봉의 선망과 상통하는 질투의식이다. 케네디공이 서거했을 때에도 또 관심이 큰 것은 여성들이었다. 케네디공과 재클린여사와의 사이를 전체여성은 선망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재클린 여사가 홀로 되었다는 사실은 동등세계의 여성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4촌이라는 거리는 이제 넓어졌다. 질투는 해야 한다. 그러나 남의 영토을 약탈하는 질투랑은 말고, 자아의 영토를 사수하고 그것의 번영을 위해서 질투를 해야 하겠다. 독자성과 주체의식으로 무장한, 그러면서도 남의 영토를 넘보지 않는 에티켓을 가지고 철저히 질투해야 하겠다. 이제 온 세계는 4촌의 경지에 있지 않은가? 선의의 질투는 선의의 경쟁과 통하며 이것은 적극적인 향상, 발전을 약속한다. 선의의 4촌을 버리고 범우주적인 4촌의식으로 경쟁하자. 그리고 발전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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