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창작수필방

정봉구의 하사(152)

작성자~조흥제|작성시간26.06.20|조회수21 목록 댓글 0
                                  (152) 정봉구의 夏蛇


                                                                                      조 흥 제


  하사(夏蛇)—이것은 내가 어느 시화전에서 본 詩題의 하나다. 글자대로 풀어 말하면 ‘여름 뱀’이란 뜻이겠다. 그러나 나는 이 시를 읽어내려 가는 순간, 대뜸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무엇이라고 할까, 이 시가 이루어졌을 시상이었다고 할까, 시심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또렷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것은 여대생들을 주로 한 여류시인들의 작품이었다. 비슷한 크기의 액자들이 ‘나를 보라’는 듯 벽면에 연해서 가지런히 걸려 있었고 그 액자 안에는 그림과 시들이 형형색색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나는 그 화사하고 정성스럽게 그려진 그림과 시들을 대충대충 감상하며 옮겨 가다가 마침내 이 ‘夏蛇’라는 시 앞에 이끌리고 말았던 것이다.
초록이 濃淡(농담)으로 칠해진 바탕에 고딕체로 또박또박 박아 쓴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지금 이 원고를 쓰고 있자니 그때 그 ‘夏蛇’란 시를 수첩에라도 옮겨 오지 못한 일이 안타깝고 아쉽다. 그러나 하는 수 없는 노릇이다. 시해의 글을 그대로 여기에 옮기지는 못하나마 내가 느낀 그 당시의 야릇한 생각을 적어 본다.
어차피 시란 감상하는 사람의 상념에 의하여 시인의 생각보다 넘칠 수도 있는 일이니까, 여기에 내가 논하는 내용 또한 그 하사의 시인이 그린 시상과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일른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 하사의 뱀에서 남자를 연상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사를 노래하게 된 계기를 그 규수시인의 첫 情事(정사)로서 연상했던 것이다.
하사의 첫 구절을 되는대로 회상하여 여기에 다시 옮겨 보면 이러하다.
“가시밭 茂盛한 풀섶에서
아픔을 견디며 별을 헤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나름으로 되새겨 보는 글귀니까, 이것을 읽는 독자의 인상이 나의 감상과 비교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나는 거기서 아름답게 승화된 한 처녀의 첫 경험 같은 것을 읽어냈다.
어쩌면 짓궂고 엉뚱한 머슴애 녀석을 따라 올라간 여름 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이글이글 불타는 여름이 그들이 젊음을 보다 더 영글게 하고, 구슬같은 땀방울을 흘리며 들어간 깊은 산속, 호젓한 나무 숲속에서 처녀는 막을 길 없는 남성의 정열을 흠뻑 마시고 만다.
가시밭 무성한 풀섶에서
아픔을 견디며 별을 헤인다
화사! 그것은 그 규수시인이 노래할 수 있는 가장 밉고도 정다운 남성 상징이었다고 나는 점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아름답게 노래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하기야 화사를 노래한 시인도 있었지만 한창 독이 오른 여름 뱀을 노래할 수 있는 女心(여심)을 나는 그런 각도로밖에 음미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심지어는 이브를 유혹한 ‘뱀’까지도 결국은 남성상징의 대명사가 아니었나 생각될 정도였다.
梁柱東(양주동)박사가 古詩家 강의에서 龜旨歌(귀지가)를 설명하면 ‘거북아 거북아’하고 노래한 것은 토템에서 남근을 말한 것이라 비유한 일이 기억난다.
하여간 나는 내 나름의 환상을 엮으며, 아니 그 시행에서 연상되는 확증같은 연상을 그리며, 그 시화전의 하사를 두 번, 세 번 되 읽어 보았다. 그리곤 그 시인이 느꼈을 아름다운 시정과, 이렇게 노래할 수 있는 그 청춘을 예찬하며 시화 전시장을 벗어났다. 더구나 그 싯귀 종장 근처였다고 생각되는 또 한 줄, 이런 의미의 내용이 역시 인상적이었다.
“아픔 위에 나무는 자란다.”
얼마나 건전하고 희망적인가. 땅에 심는 열정 위에 무성하게 성장한 나무. 나는 인생예찬과 같은 값비싼 수긍을 지닌 채. 내가 그릴 수 있는 존귀한 것들을 가슴 속으로 더듬어 보았다. 그러자 문득 전에 읽은 게오르규의 소설 ‘二五時’의 마지막 부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二五時’가 제시한 인생의 문제가 이 장면, 이 노천에서의 정사 장면으로 말미암아 아름답게 순화되었고, 또한 해결되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소설 二五時에 나오는 요한 모리츠는 갖은 고생 끝에 겨우 자유의 몸이 되어 가족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아내를 만난다. 그날 밤의 일이다. 세 아이들을 단간 방에 잠재워 놓고 거리로 나간 그들은 밤이 으슥한 공원 안 풀밭에서 실로 오래간만에 뜨거운 포옹을 교환한다. 스잔나는 이 재회의 날을 위하여 13년 동안이나 간직해 두었다가 입고 나간 푸른 옷이 구겨지지 않게 하기 위해 ‘모리츠’가 하자는대로 옷을 벗어 풀밭 위에 개켜 놓고 알몸으로 땅 위에 눕는다. 거기서 요한 모리츠는 옛날과 조금도 변함없는 아내를 발견한다. 아내를 끌어당기는 요한 자신이며, 또 남편의 사랑을 받는 스잔나의 몸짓이며 모두가 다 옛날 그대로였다. 요한은 13년이란 세월 속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이, 지금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 같은 느낌을 품는다. 얼마나 아름다운 감정인가.
나는 화사의 규수시인이 노래한 그 아름다움이 언제까지고 한없이 계속되는 시정이기를 바라며 二五時의 요한과 스잔나가 지녔던 애정이나 마찬가지로 고난과 역경이 겹치는 일이 있더라도, 오히려 최초의 날이나 다름없는 감동에 취하는 아름다움이 되기를 소망한다.
물론 그 시의 시상이 내가 상상한대로의 시정이 있을 경우이긴 하지만.

저작자 표시컨텐츠변경비영리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