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정봉구의 도깨비 집 조 흥 제 1 “만약에 고백담을 안하고는 못견디겠거든, 언제고 글로써 쓰도록 하라.”고 알랑(Alain)은 말하였다. 임금님의 귀가 ‘나귀 귀’라는 사실을 입 밖에 차마 못하고 그것으로 병이 된 이발사의 순진성과는 사뭇 거리 있는 이야기지만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어쩔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꼭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기실 아무것도 아닌,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들이 가슴 속에서 맴돌며 언제까지나 잊혀지지 않는 경우가 흔히 있는 법이다. 그런데 나는 요즈음 아니 벌써 1년이 넘도록 원고지를 안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까지 꼭 좀 써 보려고 벼르면서도 아직껏 이루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어떤 이는 예사처럼 주고받는 이야기처럼 힘 안들이고 글을 쓰는 이도 있건만 어쩐 일인지 나는 불과 열두 서너 장짜리 글 한 편 쓰는데도 갖은 辛苦(신고)를 겪는 일이 일쑤다. 그런 중에서도 이번 글은 1년이 훨씬 넘도록 속으로만 미룰 뿐 원고지 위에 옮기다 보면 도무지 시원스레 써지지 않고 끝을 맺지 못하게 되니 정말 스스로 생각해도 딱한 일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 글을 단념하고 말면 좋으련만 어찌된 셈인지 기어이 또 그 글만은 쓰고 싶으니 그것이 문제다. 심지어 옛날에 읽은 어느 시덥잖은 실화 한 토막이 머릿속에 떠올랐을 정도다. 그것은 일본의 어느 영화사가 제작 계획한 ‘도깨비 집’이란 괴기물로 실재하는 수상쩍은 저택에 얽힌 괴기담인데 그것을 로케하려고 그 도깨비 집에 가기만 하면 으레 무슨 사고가 생기고 결국은 영화사가 계획한 작품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나는 작년 가을에 오른쪽 손목에 자개품이 나가지고 겨울방학이 다 가도록 두어 달 가량이나 고생을 하면서 글을 못 쓰고 애를 태웠다. 그리고 내가 이 글을 쓰려고 부쩍 서두르며 원고지를 주머니에 넣고 더니던 때가 바로 그때였다. 이 글을 써 보려고 생각하긴 작년 초여름이었다. E대에서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마침 교문까지 동행한 학생이 음악대학 석조건물 앞을 지나면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들이 저 건물을 보고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도깨비 집’이라고들 해요, 도깨비 집.” 과연 그 건물에선 목청을 돋구는 각가지 목소리가 창문 밖으로 요란스레 퍼져 나왔고, 피아노니 첼로니 하는 여러 가지 악기들이 합하여 별의별 소리가 다 쏟아져 나왔다. 도깨비집이란 명칭도 그럴싸하다 생각하며 웃었다. 그리고 나는 문득 잊어버리고 있었던 옛날 일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한사코 밖으로만 나돌던 시절이었다. 마음 붙일 곳이라곤 도무지 없는 냉랭한 집안 분위기에 쫓겨 학교만 갔다 오면 골목 안이고 이웃 마을이고 친구를 찾아 헤맸으며, 노는 날이면 으레히 어린이 도서관이나 뒷산으로 시간을 보내러 갔다. 당시 우리집은 냉동 80번지 5호, 속칭 둥그재 산으로 불리는 금화산 밑이었다. 금화산으로 말하면 지금은 산마루까지 아파트로 꽉 들어차서 이미 산이랄 것도 없게 되었지만 그 당시만 하여도 남쪽 사면에는 낙엽송이 들어찬 데다 안산으로 통하는 산등성이 일대는 우리 개구쟁이들의 훌륭한 놀이터였다. 이 금화산에서 놀다가 싫증이 나면 우리들은 곧잘 서쪽으로 산을 내려갔다. 금화산 서쪽 기슭은 능안이라고 불리는 북아현동을 사이에 두고 굴레방 다리에서 새절(봉원사)로 올라오는 길과 나란히 개울이 흘렀고, 그 개울 건너편에 애기능이 있었다. 지금의 중앙여고 자리 일대다. 사도세자의 맏아들의 묘소로 懿陵園이라 하였지만, 으레 애기능이라 일컬었으며 그 언저리 일대를 능안이라고 하였다. 가래나무가 빽빽이 서 있는 능집 앞을 지나려면 대낮에도 약간 외진 그런 길이었다. 그 능집 앞을 지나치면 신촌으로 넘어가는 야산이 있었고 그 산 밑으로는 서울역을 떠난 경의선 철도가 두 번째 터널 밑으로 숨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그 산 위에서 멀리 신촌 너머로 퍼지는 넓은 들을 바라보며 산등성이의 무밭에서 마구 남의 무를 뽑아 먹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음이 내키면 거기서도 더 북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언젠가는 철도를 따라서 저 멀리까지 간적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엔 얼마나 피로했든지 다리가 다 아팠다. 터덜거리고 돌아오다가 우리들은 다시 또 맥이 빠져 그 터널 위 산등성이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저 지평선 끝 우리들이 다녀온 신촌 너머 먼 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난데없이 날카로운 여자의 노래 소리가 숲속에서 들려 왔다. 그리고 우리 일행 중의 한 놈이 “도깨비 집이다”하고 외치며 뛰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나머지 조무래기들도 모두 다 내달았다. 아마도 그때 벌써 성악을 전공하는 어떤 신여성이 있어 그 숲속에서 발성 연습을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런것 저런것 생각없이 장난으로 지껄여댄 도깨비 집이란 소리였는데 그와 똑같은 명칭을 비슷한 장소에서 다시 또 듣게 되니 이상스러운 느낌이 든 것이다. 방랑처럼 집밖으로 떠돌던 내 소년 시절의 한때, 내가 살던 냉동 집, 그리고 금화산과 능안 일대와 그 너머 산, 그리고 신촌 너머 벌판과 검은 입을 벌리고 있는 터널과 멀리 의주로 뻗는 철길, 그림 같은 숲속의 서양 사람 집들, 문득 내 생각이 옛날로 돌아가고 무엇인가 내 마음 속에 서려 있는 신비로운 추억들을 되살려 줄 마력의 도깨비 집이 가공 속에 떠오르는 양 하였다. 별 얘기도 아닌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는 무엇인가 아직도 미진한 무한대의 이야기를 가슴 속에 느낀다. 그리고 만약에 고백담을 안 하고는 못 견디겠거든 언제고 글로써 쓰도록 하라고 한 알랑의 말을 생각한다. 그때 우리 조무래기 일행이 앉아서 쉬던 산등성이는 이제 흔적도 없게 집들로 들어찼으며, 군데군데 아파아트가 높다라니 들어섰다. 무밭 같은 것은 아예 상상도 못할 일이고 저 멀리 수색, 일산 쪽으로 뻗어 가는 철로 변도 지금은 인가들로 연해 있다. 음악대학 학생들이 애칭으로 부르는 그 도깨비 집은 우리 조무래기 일행이 도깨비 집이라고 외치며 장난치던 시절에도 과연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 앞을 지나다닐 적마다 옛날을 돌이켜 생각한다. 2 옛날을 생각한다는 일, 그리고 자기의 소년시절을 돌이켜 본다는 일, 그것은 확실히 아름다운 일이다. 더구나 이렇게 뜻하지 않은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평시에 생각도 못하던 일을 회상케 된다는 일은 여간 신기하고 대견한 일이 아니다. 사실 나는 이 ‘도깨비 집’에 얽힌 내 어린 시절의 한때를 회상하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하며, 마치 무슨 말(언어) 꼬리잡기라도 하듯이 순서가 엇갈린 옛날의 일들을 엇갈린 순서대로 이것저것 뜯어 맞추어 보며 하나의 희열을 맛보고 있다. 희열이란 말은 사실 시에서나 쓸 수 있을 법한 언어인데, 서슴없이 나는 희열이란 말로 지금의 기분을 설명해 본다. 우선 나는 그 시절에 내가 자주 다니던 지역이며 길목을 생각해 보는 속에서 희열을 느낀다. 夜市(야시)가 성황턴 개명 네거리에서 독립문 쪽으로 올라가자면 냉동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큰 정미소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맞은 편에 있는 隣保館에 설치된 아동도서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인보관에서 집까지는 달음질로 불과 5분밖에는 안 걸릴 거리였다. 그리고 때로는 하루에도 네댓번씩 왕래하던 길이었건만 그 길의 상황이 명확히 떠오르질 않는다. 그리고 잘 떠오르지 않는 이 길의 광경들을 생각해 보는 일이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그때만 해도 아직 군데군데 남아 있던 나지막한 초가집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 한 중간에 있던 공동수도 생각이 유난히 뚜렷하다. 인보관 위 십자로를 오른편, 그러니까 동쪽으로 한 200m 쯤 가면 신학교가 있었고, 상당히 넓은 그 신학교 경내 안 한편에 있는 호젓한 운동장에서 우리는 곧잘 ‘찜뿌’라는 공놀이를 하였다. 십자로 왼편 길은 금화산을 싸고 돌아 능안으로 통하는 길이었는데, 지금의 인창고교 자리에 어느 외국 영사관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을 별로 다니지 않고 곧바로 금화산을 넘어서 능안으로 다녔으며 경의선이 꿰뚫고 달리는 시커먼 굴을 무서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두 개의 터널을 통하여 저 멀리 신촌 벌로 달리는 철로, 그 철로 길을 밟아 올라가며 멀리 소풍을 했던 날의 회상이 이렇게 꼬리를 물고 뒤를 잇는 속에서 또 하나 내 마음을 사로잡고 놓지 않는 회상이 있다. 그것은 램보의 회상이다. 기실 내가 램보를 읽은 것은 그보다 훨씬 후의 일인데 어찌 된, 일인지 나의 옛날 생각 속에는 반 드시 램보의 방랑시가 배경처럼 따라 다녔다 나는 걸었다. 찢어지 주머니에 주먹을 찌르고 외투는 모양 뿐인 것 나는 하늘 밑을 걸었다. 무즈강이여, 나는 너의 친구였다. 아, 거기 나는 얼마나 멋진 사랑을 꿈꾸었던가! 탈춤의 명수인 램보의 이 시는, 그가 두 번째로 집을 뛰쳐나온 1870년 10월7일의 탈출 방랑을 노래한 것이다. 부르조아 식의 틀에 박은 생활을 강제하며, 오로지 바카로레아(대학입학자격)의 획득만을 바라고 있던 어머니로부터의 이 탈출, 그것은 단순한 탈출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수없이 탈출을 거듭하던 램보의 그 당시 심경은 ‘地獄의 季節’을 보면 짐작되는 일이지만 19세기를 놀라게 한 이 ‘앙팡리볼(무서운 아이)의 문학 수업 과정이야말로 한번 살펴볼만 하다. 그의 시에서도 짐작되는 일이지만 그는 끊일 줄 모르는 자유에의 갈망과 꺼질 줄 모르는 문학에의 열정 때문에 天空이 오히려 좁다할 정도였을 것이다. 무임승차 이유로 마자스 감옥의 철창 신세를 지게 되었던 1870년 8월29일의 첫 번째 탈출로부터 비롯하여 동년 10월7일에는 두 번째 탈출이었고, 이듬해 2월25일에는 세 번째 탈출, 그리고 그해 4월에는 다시 또 네 번째 탈출……그렇게 거듭한 끝에 마침내 1871년 10월에 베르렌느에게 불리어 파리까지 갔지만 그곳도 결국 정착의 곳은 아니었다. 이번엔 베르렌느와 함께 영국 등지로 국외탈출을 하였으니까. 그뿐인가, 마침내는 그렇게 열애하던 문학까지도 버리고 남방으로 떠났으니 그의 방랑성이야말로 타고난 하나의 천성이었는가 싶다. 일찍이 그처럼 시심에 불타보지 못했고, 또한 그렇게 줄기차게 반항을 꾀해보지 못했던 나이고 보니, 더구나 아직 어리던 그 시절에 무슨 과감한 탈출이 있을 수 있었으랴. 고작 신촌 너머 벌판으로 기차길을 따라 가는 일이 극상이었다. 그리고 밤이면 조그만 가슴을 설레이며 『怪人二十面相』따위 책을 읽기에 바빴다. ‘괴인이십면상’의 작가는 에드가 앨런 포우를 흠모하여 그 이름을 발음상으로 본따서 자기 이름으로 만든 에도가와란보(江戶川亂步)란 탐정소설가였다. 그 시절 나는 이 사람의 책을 무척 많이 읽었다. 그러나 이 괴기적인 탐정물보다는 포우의 신비소설편이 더 인상적이었으며, 소설보다도 또, 그의 시가 더 인상적이었다. 특히 그이 시 ‘큰 까마귀’에 이르러선 鬼氣(귀기)마저 서린다. 이태준의 소설 ‘까마귀’라는 단편에서도 이 시에 관하여 쓴 대목을 읽었지만, 한밤중에 어둠을 뚫고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야말로 나의 어린 영혼을 얼어붙게 하였다. 그런데 이 앨런 포우라는 이름의 발음은 또 언뜻 듣기에는 램보와도 흡사하다. 그래서 내 마음 속에서 앨런 포우와 램보가 겹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사람의 일생이 이와 같은 말의 꼬리잡기 내지는 思念(사념)의 꼬리 잡기인양 생각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급하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듯 붙잡기 힘든 기억들을 되살려 낼 수 있는 장소를 사랑한다. E대엘 나가는 날이면 으레히 나는 정문 앞 다리를 건너며 그 시커먼 터널 구멍을 바라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여전히 옛날과 다름없는 저 터널을 새로운 형태로 단장할 수는 없을까 하고. 이를테면 남산 터널처럼. 그러면 내 회상의 희열도 조금은 아름다워지련만—도깨비 집으로 애칭되는 저 석조건물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소리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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