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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73)

작성자~조흥제|작성시간26.06.06|조회수32 목록 댓글 0
                                안중근 의사 일대기 이문열의 불멸 (73)


                                                                                                    조 흥 제


  이미 피가 굳어 있는 상처를 두 손으로 누르며 숨을 헐떡이는 젊은 병정을 시작으로 그들 제1연대 1대대 부상병들이 들려준 얘기는 비장하면서도 애절한 데가 있었다.
그날 대한제국 시위대 대대장 이상은 통감 이등박문의 관저인 大(대)觀(관)亭(정)으로 나오라는 전갈을 듣자 제1연대 1대대장 박성환 참령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며칠 전 광무황제 퇴위 때 궁중에서 거사하여 양위를 막아보려 하다가 황제에게 화가 미칠까 걱정되어 그만둔 일이 새삼 마음에 걸려 병을 핑계대고 가장 선임인 중대장을 대신 보냈다. 그런데 새벽같이 불려갔다 온 늙은 중대장이 놀랍게도 비통한 소식을 전했다.
“새 황제 폐하께서 마침내 군대 해산의 조칙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맨손체조 연습을 핑계로 서울에 있는 시위대 병력 모두를 무장 없이 훈련원에 모이게하라는 군부대신의 명이 내렸습니다. 거기서 황제 폐하의 조칙을 읽어 주고 바로 시위대 해산식을 거행하여 뒤탈을 없이하려는 듯합니다.”
그 말을 듣자 박성환은 분개하여 소리쳤다.
“군인은 나라를 위하여 그 땅과 백성을 지켜냄이 직책어거늘 이제 외국이 침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군대를 해산하려 한다니 이 무슨 변괴냐. 이는 결코 황제의 뜻이 아니요. 賊(적)臣(신)이 皇命(황명)을 위조함이니 내 죽을지언정 그 명을 받들 수 없다!”
그리고는 대대장실에서 유서 몇자를 쓰고 ‘대한제국만세’를 외치고는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뒷사람이 보기에는 다소 어이없고 무망하게 보일 수도 있는 죽음이지만 전제군주제 아래서 잔뼈가 굵은 무관인 박승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부관이 제1연대 1대대 장병에게 들려 준 박참령의 유서는 단 한 줄이었다.
‘군인이 능히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능히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면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아무것도 모르고 맨손으로 훈련원으로 출발하려던 제1연대 1대대 장병은 그런 대대장의 죽음을 듣고 분격하여 되돌아섰다. 그들은 무기고와 탄약고를 부수고 무장한 뒤 군대해산을 책동한 일본군과 맞서 싸울 채비에 들어갔다. 병영을 진지로 삼아 지키면서 먼저 서울에 있는 다른 대대들과 연결하고 다시 지방의 鎭(진)衛(위)隊(대)까지 끌어들여 일본군과의 한바탕 결전을 치를 작정이었다.
그때 일본군은 본국에서 새로 지원받은 12여단을 각 지방으로 나누어 보내고 오래 조선반도에 주둔해 현지 사정이 익숙한 원래의 駐箚(주차)부대는 서울로 불러 올려 대한제국 해산에 따른 소요에 대비하고 있었다. 특히 서울의 시위대 각 대대에는 이런저런 명목으로 일본군 장교들이 배치되어 병영 안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그날 아침 무기와 탄약을 손에 넣은 제1연재 1대대 장병의 봉기는 그들이 미처 전열을 가다듬기도 전에 용산에 있는 일본군 주차사령부에 알려졌다.
바로 그와 같은 사태에 대비하여 언제든 출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던 일본군은 급보를 받자 재빨리 출동하여 제1연대 1대대 병영을 공격하였다. 시위대 1대대도 섣불리 밖으로 뛰쳐나가 산발적인 시가전을 벌이는 대신 오히려 병영의 방어시설에 의지한 陣地(진지)戰(전)을 꾀했다. 얼마 전 안중근과 안창호가 본 것은 바로 그 병영을 방어진지로 삼은 시위대 1대대와 그 근거를 분쇄하려는 일본군 대대들 사이의 치열한 공방전 끄트머리였다.
그런데 그날 군대 해산에 맞서 일어난 대한제국 시위대는 제1연대 1대대뿐이 아니었다. 창의문 쪽에 있던 제2연대 1대대는 제1연대 1대대보다 먼저 병영을 나서 훈련원을 향해 한참이나 행군해 가다가 광화문 근처에서 요란한 총소리를 들었다. 발 빠른 병사를 총소리 나는 곳으로 보내 알아보니 제1연대 1대대가 들고 일어났다는 말이 돌았다. 그 까닭이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맞서기 위한 것이란 말을 듣자 병영으로 되돌아간 제2연대 1대대 장병들도 일본군 장교들이 잠가 둔 무기고와 탄약고를 부수고 무장을 했다.
안중근이 그런 것을 안 것은 대한매일신보로 돌아갔던 안창호가 돌아온 뒤였다. 안창호가 기자도 사진사도 딸리지 않고 홀로 돌아온 걸 보고 인중근이 물었다.
“어째 홀로 돌아오십니까?”
“신문사에는 나이 드신 백암선생밖에 계시지 않았소. 기자들이나 사진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영업 경리직원까지 모두 현장으로 뛰는 중이라 데려 올 사람이 없었소.”
“그럼 훈련원 쪽에도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렇지는 않은 듯하오. 그리로는 처음부터 기자 옥관빈이 갔는데 아직까지 이렇다 할 소식이 없다는 것이오. 여기만큼이나 일이 크게 터진 곳은 오히려 제2연대 1대대 쪽이오. 창의문 밖에서 지금도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으며 장도빈 기자와 영업부 직원 하나가 그쪽으로 갔다고 합디다.”
“진작부터 그쪽에서 총소리가 나더니 그게 바로 제2연대 1대대가 들고 일어난 것이었구려. 그럼 사진사는 어디로 간 것이오? 대한매일신보에는 그밖에 기자분도 몇 더 있었던 것 같던데.”
“사진사는 최익기자가 데려갔다는데 아마 이쪽으로 왔을 거라고 합디다. 우리와는 길이 어긋난 것 같소.”
그 말을 듣자 안중근은 갑자기 창의문의 제2연대 쪽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이쪽은 이미 총소리가 멎고 정리에 들어갔지만 저쪽은 아직 총소리가 나고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보다 생생한 현장을 보고 싶어하는 안중근의 마음을 끌었다.
“그렇다면 이곳으로 일본군 증원 병력이 덮치는 일은 없을 것이니 우리는 이만 떠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제 부근의 부상병들은 대강 다 모은 것 같고, 또 저기 김선생의 병원 조수와 간호사도 곧 올 것 같으니 우리가 여기 남아 있다고 해서 그리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디로 가시려고 그러시오.”
“창의문쪽으로 가고 싶습니다. 국내에서 일본군과 정규전을 벌이는 게 어떤 것인지를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아두고 싶습니다.”
그 말에 안창호가 가볍게 이맛살을 찌푸리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마침 급한 치료를 끝내고 허리를 펴는 김필순을 보고 물었다.
“의사 선생님, 여기 이 동지의 말처럼 해도 되겠습니까?”
“더 긴한 일이 있으시다면 그리 하십시오. 저 분 말대로 여기는 내 조수와 간호원만 오면 어찌 휘어내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일은 뒷날 찾아뵙고 말씀 드리지요.”
김필순은 안창호를 잘 알고 있는 듯 그렇게 선선히 두 사람을 놓아 주었다. 이에 안중근과 안창호는 몸에 묻은 피를 씻고 아직도 총소리가 요란한 창의문 쪽으로 갔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광화문에 이르렀을 무렵 총소리가 잦아들더니 대한매일신보를 지날 때는 아예 뚝 그치고 말았다.
“총소리가 그친 걸 보니 어느 쪽으로든 결판이 난 모양이오. 가 봤자 몸만 위태로워질 뿐 더 볼게 있을 성 싶지 않소. 차라리 신문사로 돌아가 그쪽으로 갔다는 장도빈 기자를 기다려 그 견문을 들어 보는 것이 낫겠소.”
대한매일신보사 건물이 있는 골목 어귀를 지날 무렵 안창호가 문득 그렇게 말하고 신문사 쪽으로 길을 잡았다. 총소리가 잦아들 때부터 조급해져 발걸음을 재촉했던 안중근도 그 말을 듣자 더는 창의문 쪽으로 가기를 고집하지 않았다. 신문사로 돌아가니 훈련원으로 갔던 옥빈관이 벌써 돌아와 대한제국 군대해산 상보를 작성하고 있었다.
“금일 서울 장안의 모든 시위대대는 도수체조 연습을 한다는 명목으로 10시까지 무장하지 않고 훈련원에 모이기로 되어 있었으나 정오가 되도록 훈련원에 이른 것은 천 명도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남대문 제1연대 1대대 쪽에서 총소리가 나고 이어 제2연대까지 군대 해산에 저항하여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들어오자 군부대신은 그때까지 훈련원에 모인 절반 남짓의 시위대 장병만으로 서둘러 군대해산식을 거행하였다. 군부는 황제의 조칙을 읽어주고 대한제국 군인들로부터 군모와 견장 등을 회수한 뒤 하사관에게는 80원, 1년 이상 근속한 병사에게는 50원, 1년 미만인 병사에게는 25원의 황제의 은사금을 지급했다. 적지 않은 은사금에도 불구하고 군대 해산에 반발하는 장병들로 해산식은 아수라장이 됐지만 착검한 일본군 대대가 훈련원을 에워싸고 있는데다가 참석한 시위대는 도수체조를 한다고 맨손으로 모인 터라 무력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튿날 신문에 실릴 때는 통감부 눈치를 보느라 약간의 가감이 있었지만 대강 그런 내용이었다. 오래잖아 남대문 쪽으로 갔던 최익과 신문사에 하나뿐인 사진사도 돌아오고, 창의문 쪽으로 갔던 기자 장도빈도 돌아왔다.
“다 같이 한 나라의 군대인데 어찌 이럴 수가 있는지, 병영을 일본군에게 빼앗기고 시가전을 벌이면서 흩어졌던 우리 시위대는 도성을 빠져나가 다시 집결하였는데 그게 바로 창의문 밖 교회당 부근의 언덕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지세에 의지해 제법 버티는가 싶더니 일본군이 기관포를 걸고 비질하듯 쏘아대자 금세 우리 시위대가 응사하는 소리가 없는 듯 묻혀버렸습니다. 이어 착검한 일본군 일개 대대가 돌격하자 그걸로 창의문 싸움도 끝이 나버렸다는군요. 세 시간이나 버티었다는 게 신기할 만큼 깨끗이 일본군에게 고지를 내어 주고 우리 군대는 풍비박산 흩어져 버렸습니다.”
장도빈은 안중근이 직접 보고 싶어 했던 창의문 밖 전황을 그렇게 요약했다. 창의문 밖에 집결했던 시위대 장병들은 나중에 다시 도성 안으로 진출하여 남대문 정거장 일본군 위병소에 큰 타격을 주고 지방으로 흩어져 간 것이었으나 그걸 모르는 장도빈은 과장된 무력감과 한탄으로 비분을 드러냈다.
다음날 흘러나온 일본군의 상황보고는 더욱 안중근을 한심하게 만들었다. 일본군 사망 3명, 부상 18명인데 한국군은 사망 70명, 부상 100명, 포로 516명.
진압에 동원된 일본군은 1개 대대, 제1 대대 병영이 돌격한 일본군은 일개 중대.
이틀 뒤부터 시작된 여덟 개의 지방 진위대 해산도 크고 작은 저항이 있었으나 망국을 앞둔 정규군이 마지막 저항치고는 너무 외롭고 적막했다.
서울의 대한제국 시위대 해산 이틀 뒤부터 여덟 개의 지방 진위대 해산도
차례로 시행되었다. 원주 진위대의 민긍호가 이끄는 장병 250명은 진압을 나온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고 의병으로 전환하여 관동 의병의 주력이 되었으며 다른 진위대도 크고 작은 저항 끝에 의병에 합류해 儒生(유생) 출신에서 해산된 진위대 장병으로 의병의 근간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발표를 통해 듣고 있는 안중근에게는 진위대의 봉기도, 망국을 앞둔 정규군의 마지막 저항치고는 허망한 느낌이 들만큼 무력해 보였다.
“나는 민충정공(민영환)을 비롯해 박참령(박성환)에 이르기까지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自盡(자진)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히 여겼는데 이제는 그들이 왜 그랬는지 알 듯하다. 그들이 안고 죽어간 것은 뼈저린 무력감이었을 것이다. 불 보듯 훤히 보이는 패배와 거기 따른 치욕을 피하고 한 몸의 개결함을 지키고자 하는 허영이 있었다 한들 그들을 어찌 허물할 수 있겠는가.”
며칠 뒤 지방의 진위대까지 모두 탈 없이 해산하였다는 일본군의 보도를 전해들은 안중근은 마지막 한 가닥 기대마저 무참히 끊긴 듯한 기분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제 막연한 소명감에서 自己(자기)奉獻(봉헌)의 결의로까지 자라 있는 안중근의 민족의식은 더 이상 감상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따르지는 않겠다. 크고 거룩한 것에 나를 바치되 싸우다 죽어 불멸의 제단에 봉헌하겠다. 돌이켜 보면 나는 너무 오래 이 땅에서 머뭇거렸다. 이 땅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겨낼 수 없다면 저들을 이길 수 있는 싸움터를 이 땅 밖에서 찾아야 한다. 나는 이제 한반도를 떠난다.”
이윽고 그렇게 마음을 굳힌 안중근은 마침내 미루고 미루던 망명길에 올랐다. 1907년 8월 초수의 일이었다.
병이 난 김동억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지 달포 남짓이었지만 그 사이 해외로 나가는 길은 매우 어렵게 바뀌어져 있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憑(빙)票(표)(여행증) 발행은 전보다 곱절이나 까다로워졌고, 특히 조선인이 정식으로 외국의 사증을 받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거기다가 대한민국 군대해산 뒤의 의병활동은 국경지방의 경비와 검문검색을 한층 강화시켜 만주나 연헤주로 가는 물길도 전과 같지 않았다.
이에 먼저 북간도로 가려 했던 안중근은 검문이 덜하다는 뱃길을 이용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때 김동억은 거의 병줄에서 놓여났으나 아직 험한 망명길에 나설 처지는 못되었다. 안중근은 혼자 떠나 서울역에서 기차에 올랐다.
가족들과의 작별은 안중근이 자난 번 삼화항에서 어머니와 아내, 아이들을 만나본 게 그대로 마지막이 되었다. 김달하의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이나 대한매일신보 사람들과의 작별도 마찬가지였다. 떠나기 전날 들른 대한매일신보에서 백암 박은식 선생과 도산 안창호로부터 한마디씩 간곡한 당부를 들은 것으로 작별의 의식을 대신했다.
“범 아비(虎(호)父(부))에 개 아들(犬(견)子(자))은 없느니라. 어디를 가더라도 定(정)溪(계) (안태훈의 호)의 아들 됨을 잊지 말아라. 항시 당당하고 물러나지 말아라.”
백암은 아들을 멀리 보내는 엄한 아버지처럼 그렇게 말했고, 안창호도 작별 인사를 간곡한 당부로 대신했다.
“비록 회원은 아니지만 언제나 우리 신민회를 잊지 마세요. 동지는 우리가 처음으로 해외에 내보내는 독립특파 공작원을 자임해도 좋소. 먼저 나가 독립군 기지 건설과 장교 양성을 위한 군관학교 설립의 적지를 찾아 봐 조시오. 그리고 나와 연락을 끊지 마시오. 우리도 그때그때 가능한 모든 지원책을 강구할 것이오.”
더위에 푹푹 찌는 듯한 객차 안에서 밤새 시달린 안중근이 부산역에 내린 것은 다음날 새벽이었다. 역전 거리에서 가볍게 아침 요기를 하자마자 여객선이 드나드는 부두를 찾아보았다. 다행히도 부두가 그리 멀지 않아 안중근이 이르렀을 때는 마침 바다 위로 아침 해가 둥글게 떠오를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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