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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소설방

불멸 (86)

작성자~조흥제|작성시간26.06.19|조회수26 목록 댓글 0
                             안중근 의사 일대기 이문열의 불멸 (86)


                                                                                                         조 흥 제


  이윽고 달리기를 멈추고 몽환 상태에 빠져 주저앉아 있던 안중근이 퍼뜩 정신을 가다듬어 사방을 살펴보았다. 동편 하늘을 뻘겋게 물들이며 밝아오는 햇살에 의지해 가만히 살펴보니 자신이 어떤 외진 산봉우리에 홀로 앉아 있었다. 일본군의 추격은 이미 끝난 듯 고요한 골짜기에서 여름 꿩 우는 소리만 간간 들려 올 뿐 총성이나 사람이 지르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안중근은 문득 소년 시절 나이 든 포수들과 함께 천봉산에 올라 사냥감을 쫓다가 홀로 되었을 때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만치 골짜기 사이로 그리운 청계동 마을이 아련히 솟아날 것 같았다. ‘아아, 어서 길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런 기분으로 털고 일어나려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아득한 낯선 봉우리 위였다.
“어리석도다. 나 자신이여! 저와 같은 무리를 이끌고 무슨 일을 꾀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리요.”
비로소 자신이 떨어진 처지를 돌아보고 안중근이 스스로를 비웃으며 그렇게 말하였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외진 산봉우리 위에 앉아 自嘲(자조)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안중근은 어려움에 처하고 위험이 닥칠수록 분발하는 특유의 자부심과 용기를 떨치고 일어났다. 그리고 밤새도록 쫓기고 닫느라 지칠대로 지친 몸을 추슬러 주변을 수색해 보았다.
오래잖아 안중근처럼 거기까지 쫓겨 와 바위 틈이나 숲 덤불 사이에 숨어 있던 두 세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안중근은 다시 그들을 잡고 어찌할 것인기를 의논했다. 모인 것이 네 사람인데 네 사람의 의견이 각기 달랐다. 하나는 어떻게든 목숨이 남아 있는 한 살아야지 하였고, 다른 하나는 거기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다 하였으며 나머지는 스스로 일본군에게 나아가 사로잡히고 싶다고 하였다.
안중근의 생각은 그들과 또 달랐다. 다른 세 사람의 말을 듣고도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자신의 뜻을 시 한편으로 바꾸어 읊었다.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 밖에 나왔다가(男兒(남아)有志(유지)出(출)洋(양)外(외))
큰일을 못 꾀하니 몸 두기 어려워라(事(사)不(불)入(입)謀(모)難(난)處身(처신))
바라건대 동포들아 피 흘려 맹세하고(望(망)須(수)同胞(동포)誓(서)流(류)血(혈))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마세(莫(막)作(작)世間(세간)無(무)義(의)神(신))
그리고 총을 잡고 일어나며 그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모두 그대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라. 나는 이 길로 산 아래로 내려가 일본군과 더불어 장쾌하게 싸우겠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인 2천만 가운데 한 사람이 된 의무를 다한 다음에는 죽어도 한이 없겠다.”
안중근이 그렇게 결연히 말하고 일본군 진지를 찾아 내려가려 하자 거기 있던 의병들 가운데 하나가 뒤따라와 붙들고 흐느끼며 말했다.
“참모중장의 뜻은 알겠으나 아주 잘못된 것이오. 당신은 다만 한 개인의 의무만 생각하고 다른 수많은 생령과 훗날의 큰일은 돌아보지 않으려는 것이오? 오늘의 형세로는 비록 그렇게 장쾌하게 죽는다고 해도 조국과 동포에게 아무런 이득이 될 게 없소. 지금 당신의 몸은 만금과 같이 귀한 몸인데 어찌 그리 초개와 같이 버리려는 것이오? 지금 마땅히 다시 강동(러시아 땅)으로 건너 가 앞날의 좋은 기회를 기다려서 큰일을 도모하는 것이 십분 이치에 맞거늘 어찌 깊이 헤아리지 않으시오?”
그런데 강동이란 말이 안중근의 가슴을 세차게 후렸다. 소싯적 책을 덮으면서 한 때 마음속의 師表(사표)로 우러르기까지 했던 楚(초)覇(패)王(왕) 項羽(항우)의 강동을 떠올리게 하며 안중근의 도저한 자부심을 휘저어 놓은 까닭이었다.
“듣고 보니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옳소. 옛날에 초패와 항우가 烏(오)江(강)에서 자결한 것은 두 가지로 원통함이 있어서였을 것이오. 하나는 무슨 면목으로 다시 강동의 어른들을 만나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강동이 비록 작은 땅일지언정 족히 왕 노릇할 만하다는 말에 화를 참지 못해서였을 것이오. 특히 서초패왕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며 영웅을 자처하던 항우에게 손바닥 만한 강동으로 건너가서 작은 왕이라도 되라는 말이 얼마나 욕되겠소. 하지만 그때 한번 항우가 죽고 나자 천하에 또 다시 항우가 없었으니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소. 감히 견주어 보는 바 오늘 이 안응칠이 처한 자리도 또한 같소. 이 안응칠이 여기서 한번 죽으면 세상에 다시는 이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던질 안응칠이 없을 것이오. 그리하여 정작 크게 쓰일 때 던져질 목숨이 없다면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소? 무릇 영웅이란 것은 능히 굽기도 하고, 능히 무릅쓰고 버티기도 해야 하는 법이라 들었소. 내 멀리 해외에 뛰쳐나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마땅히 그대의 말을 따르겠소이다.”
안중근이 그 말과 함께 함부로 죽을 생각을 버리고 용기와 투지를 되살렸다. 어찌 보면 엉뚱할 만큼 소박하고 순수한 안중근의 자부와 신념이기도 했다.
안중근이 그렇게 마음을 바꿔 먹자 나머지 세 사람도 정신을 가다듬고 힘께 어려움을 뚫고 나가기로 했다. 네 사람이 한 마음이 되어 길을 찾아 나서는데 다시 여기 저기 숨어 있던 의병들이 나타나 어느새 일행은 여덟아홉이 되었다.
“우리 여덟아홉으로 대낮에 적진을 뚫고 나가기는 어려울 것이오. 차라리 밤길을 걷는 것만 못하오.”
그들은 그렇게 의논을 맞추고 낮에는 산속 동굴이나 숲 덤불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별빛으로 방향을 잡아 길을 걷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다시 장맛비가 퍼부어 별이 뜨지 않았을뿐더러 사방이 지척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어두웠다. 처음에는 단단히 신조를 정하고 제법 줄을 지어 걸었으나 오래지 않아 칠흑같은 어둠과 퍼붓는 빗줄기 속에 서로 길을 잃고 흩어져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날이 희붐해졌을 때는 안중근 곁에 두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요? 누구 아시는 분 있소?”
안중근이 아직도 장대비 속에 밝아오는 낯선 산자락을 살피다가 시퍼런 입술을 덜덜거리며 따르는 두 사람을 번갈이 보며 물었다. 두 사람 모두 대꾸할 힘조차 없다는 듯 무겁게 고개만 가로 저을 뿐이었다. 밤새도록 걸었으나 전 날 떠난 곳에서 몇 십리는 갔을 터이지만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지친 세 사람은 거기서 잠시 다리를 쉬며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날이 더 밝아지면 가까운 봉우리에 올라 멀리까지 살펴 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비가 그치고 날이 밝아도 사방을 분간할 수 없기에 새벽 어스름 속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검고 두꺼운 구름이 하늘에 가득하고 땅 위에는 안개가 자우룩하게 덮여 앞뒤좌우로 스무 발자국 앞을 알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그들이 헤매고 있는 산등성이는 높고 가팔랐으며 내려다보이는 골짜기는 깊고 험했다. 밭 한 뙈기 얼굴만 한 비탈조차 없는 것이 도대체 인가가 붙을 수 있는 곳이 못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그 산등성이에 주저앉아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낮에 북쪽이 되는 곳을 보아 두었다가 밤이 되면 무턱대고 그리로 걸었다.
그렇게 산 속을 헤매는 사이에 너댓새가 지나갔다. 음력 오뉴월의 장맛비는 줄곧 쏟아지는데 인가는 어디서도 만날 수가 없었다. 비 한 번 긋지 못하고 밥 한끼 얻어 먹지 못한 채 걷자니 추위와 배고픔만으로도 모두 제 정신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어두운 산길을 쫓기느라 신은 벗겨져 맨발이요, 입성은 나뭇가지와 가시덤불에 찢기고 해져 거지라도 상거지 꼴이니 그 고생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지만 안중근과 그를 따르는 두 사람은 낙담하여 허물어지지 않았다. 낮이면 풀뿌리를 캐어 먹고, 익지도 않은 머루 다래를 훑어 주린 배를 달래며 산 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두만강이 있는 북쪽으로 길을 찾아 나아갔다. 한 장 남은 담요를 찢어 부르트고 찢긴 발을 싸매고 서로 지켜주고 보살피며 걸으니 고생스러움이 한결 덜해지는 듯 했다. 그날 밤 그렇게 어렵게 어두운 산길을 더듬어 가는데 문득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개 짖는 소리로 미루어 인가가 멀지 않은 듯하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사는지 모르니 내가 먼저 저 집으로 가서 알아 본 뒤에 밥도 얻고 길도 물어 돌아오겠소. 두 사람은 숲 속에 숨어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오. 무슨 변고가 있으면 둘만이라도 피하도록 하시오.”
안중근이 두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고 개 짖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어둠 속을 더듬어 내려가 보았다. 한참을 내려가니 한 군데 인가인 듯 불빛이 빤한 곳이 있었다. 하도 오랜만에 만나는 인가라 반가운 나머지 경계심이 풀린 안중근이 막 뛰어나가려는데 갑자기 주위가 환해지며 횃불을 든 사람 몇이 몰려 나왔다. 개 짖는 소리에 불려 나온 듯했다.
불빛에 화들짝 정신이 돌아온 안중근은 얼른 풀숲에 몸을 숨기고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횃불을 앞세우고 나온 것은 장총을 움켜잡고 있는 일본군 병사 둘이었다. 그러고 보니 집도 여느 민가가 아니라 통나무와 돌로 든든하게 세운 수비대 초소였다.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짖고 있는 개도 일본군이 기르는 軍犬(군견)같았다.
안중근은 급히 두 사람에게로 돌아가 사태를 알리고 함께 몸을 피했다. 무턱대고 일본군 초소와는 반대방향으로 산길을 가며 구르며 달아나는데 이미 너댓새나 굶주리고 추위에 떤 몸이라 그런지 움직이기가 여간 무겁지 않았다. 겨우 추격을 벗어났다 싶자 기력이 다하고 정신이 어지러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참 뒤에 먼저 정신을 차린 안중근이 가만히 하늘에 대고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전지전능하신 천주 예수여, 죽어도 속히 죽고, 살아도 속히 살게 해 주소서.”
그리고는 가까운 개울을 찾아 배가 부르도록 물을 마신 뒤 풀이 무성한 나무 아래 누워서 남은 밤을 지냈다.
다시 날이 밝았다. 이름 모를 산새의 울음 소리에 잠인지 혼절인지 모르게 쓰러져 있던 안중근이 눈을 떴다. 전날 밤 말할 기력조차 없다는 듯 조용히 안중근을 따라 잠자리를 정했던 다른 두 사람도 안중근이 일어난 기척에 같이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이 깊은 산중을 주인 없는 귀신이 되어 떠돌게 되었구나. 부모처자 이별하고 떠나올 제 이 지경에 이를 줄 누가 알았을꼬.”
한 사람이 땅이 꺼질 듯한 한숨과 그렇게 탄식하자 한 때 동학군을 따라 다녔다는 다른 하나가 눈물마저 글썽이며 반았다.
“아마도 後天(후천)을 아는 일은 倭(왜)의 여러 귀신과 그 조상 혼령들의 손에 넘어 간 것 같소. 우리는 이제 죽어서도 무랍조차 얻어먹지 못하는 귀신이 될 것이오!”
안중근이 보다 못해 그들을 달래며 타일렀다.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매인 것이니 그리 걱정할 것 없소. 사람은 비상한 곤란을 격은 다음에라야 큰일을 이루고, 죽을 땅에 던져진 뒤라야 살 길을 찾게 되는 법이오. 두 사람이 이같이 낙심한데서 무슨 이득이 있겠소? 모든 걸 하늘의 뜻에 맡기고 기다려 봅시다.”
하지만 그와같이 큰 소리는 쳐도 안중근 조차 자신의 말이 그리 미덥게 들리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자신도 그들과 함께 쓸어 안고 목 놓아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때 안중근은 특유의 자부심이 스스로 傳記(전기) 써나가는 듯한 自己(자기)形成(형성)力(력)으로 작용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독립의 주인공인 화성돈(워싱턴)은 예닐곱 해에 걸친 풍진 속에서 그 많은 곤란과 고초를 어떻게 참고 견뎠을까? 그러고도 마침내는 영국을 몰아내고 독립의 대업을 성취하였으니 참으로 만고에 둘도 없는 영웅이다. 내가 만일 여기서 살아 돌아가 뒷날 큰일을 이룩하면 반드시 미국으로 건너가 화성돈의 자취를 찾아 볼 것이다. 그 묘소에 참배하여 그를 추모하고 숭배하며 그 뜻을 길이 기념하리라.”
안중근은 그렇게 다짐하며 나약해지는 심기를 다잡았다. 비바람 치는 산속을 닷새나 굶고 헤매며 생사에 쫓기는 사람의 정신력이 이끌어 낸 것으로는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자기단속이기도 했다.
뒤이어 안중근이 정성껏 두 사람을 타이르고 달래자 그들의 탄식과 한숨도 곧 잦아들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이 배고픔이었다. 다시 해가 뜨고 날이 밝아왔지만 오래 허기 진 세 사람의 뱃속은 풀뿌리나 풋 열매 따위로는 더 달랠 수가 없었다. 한 순간의 배고픔은 잊게 해 주던 물도 이제는 빈속을 쓰라리게 해 사람을 한층 허기지게 할 뿐이었다.
“아니 되겠소. 굶어 죽으나 왜병에게 들켜 맞아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요. 밤낮 가리지 말고 인가를 찾아 내려가 목숨부터 건져 놓고 봅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오. 귀신도 먹고 죽은 귀신은 화색이 돈다 하였소.”
견디지 못한 세 사람은 어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렇게 의논을 맞추고 훤한 대낮인데도 인가를 찾아 산을 내려갔다. 다행히도 일본군과 부딪치지 않고 산을 내려와 한 군데 골 깊은 모퉁이를 도니 초가삼간 집 한 채가 나왔다. 세 사람은 경계고 척후고 아랑곳 없이 우르르 비탈길을 달려 내려가 그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주인 어른, 우리는 국경을 오가며 이것저것 사고파는 장사꾼들인데 장마에 산속에서 길을 잃어 며칠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소. 무엇이든 먹을 것이 있으면 좀 나누어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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