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은 석벽과 암반이 빼어나고 계곡이 깊은 산세를 이루고 있다. 사암이 만들어낸 돌산의 풍광은 서울 근교 어느 산에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지만, 가파른 계곡을 따라 수량이 풍부한 계류가 흐를 때의 장관이 일품이다. 특히 동쪽 사면 내원암 아래의 금류폭포를 비롯해 은류폭포, 옥류폭포 등 가파른 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호탕하다. 한겨울에는 초보자의 빙벽등반 연습장으로 이용될 정도라 하니 ‘수락(水落)’이라는 이름을 얻은 까닭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수락산 정상
수락산과 관련된 일화를 살펴보면 떨어지는 것이 물만은 아니었다. 산머리의 바위가 굴러 떨어지는 일이 잦았다 하여 수락산(首落山)이라고 하였는데, ‘首(머리 수)’자가 임금을 뜻하기도 해서 감히 사용하지 못하고 같은 발음의 ‘水’자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강우나 지진에 의해 수락산의 바위가 떨어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이 즉위한 해(1418년)에 약7m×9m 크기의 큰 돌이 무너졌고, 세종44년에는 세 사람이 압사하는 사고도 발생하였다. 인조 때(1640년)에는 평안도 지진의 여파로 수락산이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서울과 의정부를 오가는 관문에서 도봉산과 마주한 수락산은 곁에 붙어있는 불암산과 더불어 북한산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지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중랑천을 따라 도로와 철로가 개설되고 주거지가 확대되면서 연결성이 떨어지는 관리상의 문제로 결국은 제외되었다. 공교롭게도 이와 비슷한 전설이 전해온다. 수락과 불암은 원래 금강산의 봉우리였다. 조선의 태조가 새 도읍지를 잡는다는 얘기를 듣고서 한걸음에 달려왔지만 한성 주위는 벌써 다른 산이 다 차지한 다음이었다. 어쩔 수 없이 빈 자리를 찾던 중 북한산 백운대와 인수봉이 버티고 있는 건너편에 한양을 등지고 앉았다는 것이다.
호환(虎患)에 대한 공포는 어느 곳에나 있었던 것 같다. 옛날 수락산 자락에 한 사냥꾼이 살고 있었다. 아내는 죽었고, 슬하에 수락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 아들이 한 명 있었다. 홀아비 사냥꾼은 아들을 젖동냥을 해서 길렀다. 어느 해 마을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자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사냥꾼은 젖동냥을 해준 이웃에게 보답을 하기 위해서라고 호랑이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사냥에 나서자 아들이 따라왔다. 부자는 아침부터 산을 뒤졌지만 호랑이 발자국을 본 것 이외에 소득은 없었다. 점심때가 지나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사냥꾼은 아들을 데리고 한 바위굴에 들어가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빗줄기는 쉽게 멎지 않았고 고단하였던 사냥꾼은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그가 잠들었던 사이에 동굴 밖으로 나왔던 아들은 호랑이에게 물려가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난 사냥꾼은 아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미친 듯이 찾아 헤매다가 그만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후로 비만 오면 산속으로부터 “수락아, 수락아” 하는 사냥꾼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 왔고, 그 후부터 산 이름을 수락산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