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우와 직녀는 보길도에서 만난다
노화도 이목항
[노화도 그리고 보길도 6] 사흘 - 2010년 5월 8일
보길도에서 맞이하는 토요일 아침, 나는 느긋했다. 다른 때 같으면 9시가 되기 전에 배낭을 꾸려 길 위로 나섰을 텐데, 9시가 훨씬 넘은 시간에 아침도 거른 채 청별항 바닷가에 앉아 하릴없이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를 구경하고 있는 참이다. 바다 건너 이목항이 또렷하게 보인다.
청별항의 아침은 구성진 트로트 가락과 함께 시작되었다. 구성진 노랫소리는 스피커를 통해 엄청나게 크게 확대되어 항구 전체를 쾅쾅 울려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에 울림을 전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가사는 애절하지만 가락은 경쾌한 노랫소리는 항구를 휘감아 돌다가 바다 위로 울려 퍼져 나간다. 그에 비하면 이목항의 아침은 적요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이목항과 청별항의 아침 풍경이 전혀 다른 것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내가 노화도를 거쳐 보길도를 걷겠다면서 집을 나선 건 목요일 아침. 입대를 앞둔 아들노마는 5월 1일, 한 달간의 일정으로 일본여행을 떠났다. 덕분에 집에 홀로 남게 된 남편. 주말을 혼자 보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툭하면 주말을 끼고 여행을 떠나는 마누라의 발목을 절대로 잡지 않는 남편이지만, 이 상황을 난감해 했다. 아들도 없는데 주말에 혼자 뭐하냐? 혼잣말처럼 나 들으라고 중얼거린다. 게다가 여행을 떠난다면서 배낭을 꾸리는 마누라는 한술 더 떠서 언제 돌아올지 몰라, 하는 말까지 덧붙였으니.
순간 돌아본 남편의 얼굴이 왜 그리 늙고 안 되어 보이던지, 그냥 나 몰라라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심심하면 보길도로 와. 내 말에 반색을 하는 남편, 어떻게 가면 되지, 묻는다.
토요일 아침에 출발하는 고속버스를 타고 완도까지 간다면 남편은 오후 늦게나 보길도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보다는 금요일 밤 자정에 출발하는 심야버스를 탄다면 토요일 오전까지는 보길도에 도착할 수 있을 터. 문제는 완도까지 가는 심야버스가 없다는 것.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서울에서 광주나 목포로 가는 심야버스를 타고 그곳(광주나 목포)에서 완도로 가는 첫 버스를 타면 되니까.
먼저 광주로 가는 게 나을지 혹은 목포로 가는 것이 나을지 가늠했다. 나는 목포를 중간지점으로 설정했고 남편은 금요일 자정에 서울을 출발하는 심야버스를 탔다. 하지만 그보다는 광주로 가는 것이 훨씬 나을 뻔 했다. 목포보다 광주에서 더 많은 버스들이 더 이른 시간에 움직이기 때문이다.
금요일 밤, 목포행 고속버스를 타러 센트럴시티 터미널로 간 남편, 하마터면 버스를 타지 못할 뻔 했단다. 인터넷으로 버스표를 예매했는데, 하필이면 그 날 밤 센트럴시티 터미널의 전산망이 죄다 다운되는 바람에 난리가 났더란다. 인터넷 예매를 했지만 다시 현금을 주고 표를 사야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
화흥포행 버스 시간표 및 동천행 배 시간표
우여곡절 끝에 목포행 심야버스를 타고 네 시간 만에 목포에 도착한 남편은 완도행 첫 버스가 8시 넘어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단다. 네 시간을 넘게 기다려야 한다기에 남편은 먼저 출발하는 강진행 버스를 탔고, 강진에서 완도행 버스를 갈아탔다.
남편이 완도에 도착했다고 전화를 걸어온 시간은 8시 20분경. 이제 남편은 화흥포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화흥포항에서 노화도 동천항으로 가는 배를 타면 된다. 동천항에서 보길도 청별항까지 셔틀버스가 운행되므로, 그 버스를 타고 내가 있는 청별항으로 오면 집 나간(?) 직녀를 찾아 떠난 견우의 긴 여행은 끝나게 되겠지.
한데, 남편은 8시 10분에 화흥포항으로 출발하는 버스를 놓쳤다. 완도버스터미널에서 핸드폰으로 찍어두었던 시간표를 확인하니 그랬다. 시간표상 다음 버스는 한 시간 뒤에나 있을 예정이었다. 시간표에는 버스 출발시간과 배 출발시간이 같이 들어가 있다. 화흥포항에서 노화도 동천항으로 가는 배는 8시 40분에 떠난다. 현재 시간 8시 21분, 배 시간까지 20분가량 여유가 있다는 건데, 완도버스터미널에서 화흥포항까지 걸리는 시간은 10분 남짓.
남편을 한 시간 동안 완도버스터미널에서 기다리게 할 것인가, 아니면 택시를 타고 화흥포항으로 달려가 배를 타게 할 것인가? 남편이 완도에서 한 시간을 지체한다면 나 역시 청별항에서 남편을 기다리면서 하릴없이 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결론.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택시를 타고 화흥포항으로 달려가라, 고 전했다.
8시 35분, 남편은 무사히 배를 탔다는 전화를 걸었다. 남편은 택시비가 만 원이나 들었다고 툴툴거린다. 놀러왔으면 택시도 타줘야 택시기사도 살고 지역경제도 살 거 아냐. 남편에게 배가 처음 도착하는 항구에서 꼭 내리라고 당부했다. 자칫하다가는 소안도까지 갈 수 있으니.
남편을 기다리면서 보길면사무소 표지석이 있는 곳에 앉아 있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이 할머니, 다리가 아파서 보건소에 오셨는데 문이 안 열렸다면서 내 옆에 앉으신다.
보건소가 문을 안 열었어. 몇 시여?
9시인데요.
열 때가 됐는데, 왜 안 열지?
토요일인데 보건소가 문을 여나요?
몰러.
아프니까 토요일이거나 말거나 그냥 보건소로 오셨단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토요일에 보건소는 안 한단다. 할머니는 허탕을 치고 가야겠다고 투덜거리더니 내가 은근한 말투로 물으신다. 여행 온 거냐, 혼자 왔냐, 차는 가져 왔냐, 어제는 어디서 잤냐, 숙박비가 얼마더냐, 밥은 어디서 먹었느냐 등등. 왜 그런 걸 물으시나, 했더니 오늘 밤에 비싼 모텔에서 자지 말고 할머니네 집으로 오란다. 전에 여자 혼자 온 여행객을 재워준 적이 있는데 이만 원만 달라고 했더니 아침에 나가면서 만 원을 더 주더라는 말을 덧붙이시면서. 밥도 먹여줬더니 고맙다고 말이여.
할머니는 윤선도 유적지가 있는 마을에서 사신다면서 오늘밤에 보길도에서 잘 거면 오고, 보길도를 떠날 거면 안 와도 된다고 말씀하신다. 밥도 주신다고 했는데, 일정이 맞지 않아 그 집에 못 갔다. 이 할머니, 세연정 앞에서 나물류를 팔고 계시니까 혹시라도 보길도에서 잘 곳을 찾지 못한다면 그 앞으로 가서 민박집을 하는 할머니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되리라.
바다 건너 이목항에 셔틀버스가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그 버스, 보길대교를 건너 청별항으로 씽씽 잘도 달려왔다. 버스에서 내린 남편이 나를 발견하고 손을 번쩍 든다. 나도 남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참내, 보길도에서 남편을 기다리게 될 줄이야 어찌 짐작이나 했겠나. 항구는 이별을 하는 곳이지 만나는 곳이 아닌데, 여행을 하다 보니 별 경험을 다 한다.
한데 겨우 이틀 만에 남편을 만나는 건데 어째 한 두어 달은 떨어졌다 만나는 것처럼 반가운 건 대체 무슨 까닭이지?
어젯밤 묵었던 횟집 겸 모텔로 돌아가 남편과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청별항을 떠난 것은 10시 40분. 이제부터 보길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고산 윤선도의 흔적을 찾아 나설 차례다. 보길도에는 윤선도의 유적지가 많다. 세연정과 곡수당, 낙서재, 동천석실 등. 청별항에서 세연정까지는 1.4km, 걸어가기 딱 알맞은 거리다. 그 길, 나무로 만들 인도가 이어져 있어 가볍게 걸을 수 있다.
고산 윤선도, 보길도에서 신선놀음 하셨구려
윤선도 유적지 가는 길
[노화도 그리고 보길도 7] 사흘 - 2010년 5월 8일
고산 윤선도가 13년간이나 은거했다는 보길도에는 당연히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윤선도 유적지로 그의 흔적을 찾으러 가는 길에 길가에 세워진 열녀비를 보았다. 열녀비라기보다는 열녀문 같다. 병든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는데도 남편이 죽자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28일 만에 남편을 따라 죽었다는 김씨 부인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란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열녀문, 여기저기 참 많이도 세워 놨다.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자꾸 보니 어깃장이 생긴다. 열녀문(烈女門)은 있는데 왜 열부문(烈夫門)은 없는 거냐고요. 아내만을 지극정성으로 사랑하고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비통해해다가 아내의 뒤를 따라 세상을 등진 남편이 지난 역사를 더듬으면 분명히 하나 둘 정도는 있을 터인데, 그런 남편을 기리는 비는 없는 것일까?
조선시대에 만일 그런 남자가 있었다면 유림은, 양반가문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집안 망신이라고 쉬쉬하면서 재혼을 서두르지 않았을까? 여자의 재혼은 금지했지만 남자는 축첩을 버젓이 하는 시대였으니, 그러고도 남았으리라.
김씨부인 열녀비
조선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게 너무 다행이다, 싶어진다. 죽은 뒤에 돌덩이에 불과한 열녀문을 아무리 많이 세워주면 무엇하나, 다 부질없는 짓이지. 삶은 살아서 누려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윤선도 유적지의 첫 번째 방문지는 세연정. 윤선도의 놀이공간이었다는 세연정은 문을 전부 하늘로 들어 올려 훤하게 트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세연정 바로 앞에는 세연지가 있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세연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고인 듯이 보이는 물은 실은 흐르는 물이었다. 세연정은 윤선도가 사망한 뒤 방치되어 폐허가 되었다가 1993년, 동천석실과 같이 복원되었다.
세연정에 앉아서 주변 풍광을 둘러보고 있으면 시가 저절로 터져 나올 것 같다. 그만큼 아름다운 풍광에 둘러싸여 있다. 세연정을 보니 윤선도의 보길도 생활은 유유자적, 여유만만이었으리라 짐작하고도 남는다. 세연정 뿐만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곡수당과 낙서재, 동천석실을 고루 둘러보고 나니 그런 생각은 더 확실해 진다.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를 찾아들게 된 것은 병자호란이 끝난 뒤였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갔으나,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윤선도는 은거하겠다는 생각으로 제주도를 향해 떠났다고 한다. 풍랑을 만나지 않고 무사히 제주도에 도착했다면 아마도 그는 보길도와 인연을 맺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험한 바닷길에서 풍랑을 만나 머물게 된 곳이 보길도 황원포. 윤선도는 그렇게 보길도를 만났고, 보길도에 그의 흔적들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세연지의 수면은 나뭇잎들로 잔잔하게 덮여 있었다. 그 위에 채 시들지 않은 채 떨어진 붉은 동백꽃 몇 송이가 살짝 뿌린 듯이 떠 있다. 비가 촉촉하게 뿌리는 날, 세연정에 앉아 세연지를 바라본다면 세상에 부러운 것이 전혀 없을 것 같다. 함박눈이 펄펄 내리는 날, 세연정에 앉아 따끈한 차를 마시면서 설경을 감상한다면 세상의 온갖 시름을 잊을 수 있으리라.
커다란 카메라를 멘 중년 남정네 둘이 세연정을 둘러보는 사람들에게 잠시 비켜달라고 양해를 구한다. 사람이 없는 세연정의 사진을 찍고 싶어서이리라. 세연정을 둘러보고, 물이 말라 모습을 드러낸 판석보 주변도 거닐었다. 기생들이 올라가 춤을 추었다는 동대와 서대를 보니 윤선도의 은거생활에 화려한 색채가 곁들여지는 것 같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40수가 새겨진 시비가 있는 윤선도 문학체험공원에 들렀다가 부용마을로 접어들었다. 길옆 풀밭에 누런 소 한 마리가 풀을 뜯고 있다. 염소도 긴 줄에 매여 풀을 뜯고 있다가 지나가는 우리를 호기심이 잔뜩 눈빛으로 오랫동안 쳐다본다. 이 녀석 털 빛깔이 특이하다. 검은 색이 아닌 회색빛에 가깝다. 꼬랑지는 하얀색인 것도 같고.
곡수당으로 가는 길에 밭에서 풀을 베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아무리 봐도 푸른 보리는 아니고 풀 같은데 밭에서 자라는 것이 이상해 내가 모르는 특수작물인가 싶어 물었다.
아주머니, 그게 뭐예요?
풀이에요, 풀. 소 먹이.
허리를 잔뜩 굽힌 채 낫질을 하던 아주머니는 허리를 펴고 손등으로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면서 말했다.
보길도에서는 소에게 사료 대신 풀을 많이 먹인단다. 9월에 추수가 끝난 뒤에 씨를 뿌려 이듬해 5월에 벤 뒤 말려서 겨울에 소에게 준다는 것이다. 사료를 먹이는 것보다 손이 많이 가고 힘들지만 이렇게 하는 게 소에게 더 좋다, 는 것이 아주머니의 설명이었다. 아주머니는 혼자 살면서 풀을 키워서 소를 먹이는 힘이 이제는 힘에 많이 부친다면서 올해까지 할 작정이라고 덧붙였다. 밭은 넓고 베어야 할 풀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땡볕 아래서 풀베기, 쉽지 않으리라.
멀리 그리 높지 않은 산 하나가 보인다. 산 중턱에 작은 건물이 들어 앉아 있다. 주변은 제법 큰 바위로 둘러싸여 있는데 건물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다. 작은 정자처럼 보이는데, 위 아래로 자리를 잡고 있다. 동천석실이다. 위치를 가늠하기 제법 걸어 올라가야 닿을 것 같다. 언제 저기까지 가노. 투덜거리면서 곡수당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곡수당은 윤선도의 아들이 사용하던 휴식공간이었다고 하는데, 근래에 낙서재와 함께 새로이 복원을 했다. 곡수당은 뒤로는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앞에는 개울이 자리를 잡았다. 문은 굳게 닫혔으나, 툇마루는 넓고 쉬기 좋게 생겼다. 시원하게 그늘이 드리워진 그곳에 배낭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고 올라앉으니, 편안하다. 시원한 바람도 같이 머물면서 쉬었다 간다.
낙서재
곡수당
동천석실
윤선도가 주로 기거를 했다는 낙서재는 곡수당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낙서재 대청마루로 올라가 좌정을 하니, 멀리 동천석실을 품은 산이 한 눈에 보인다. 자리 한 번 기가 막히게 잘 잡았구나,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내 비록 풍류를 즐길 줄 모르나, 더도 덜도 말고 딱 하룻밤만 이곳에서 머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싶어진다.
우리, 여기서 쉬었다 가자.
대청마루에서 배낭을 베고 누우니 푸르고 맑은 하늘에 떠가는 구름이 보인다.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대청마루를 감돌았다가 돌아나가는 것 같다. 온몸이 시원해진다. 좋구나, 하는 흥타령이 저절로 나온다.
낙서재에서 하루를 보낼 것이 아니니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동천석실이다. 까마득히 멀리 보이는 동천석실을 보니 꾀가 나 저기까지 가, 말아, 한다. 하지만 안 가면 후회한다. 동천석실로 가는 길, 숲이 우거진 걷기 좋은 흙길이기 때문이다. 약간 가파르긴 하지만 그리 많이 올라가지는 않는다. 여린 나뭇잎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면서 속삭이는 숲은 싱그럽기 그지없다.
윤선도 이 양반, 풍수지리에 일가견이 있고도 남는구나. 이리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만년을 즐겼으니. 부럽고 또 부럽다. 동천석실로 가는 숲길을 걸으면서 문득 궁금하다. 나야 튼튼한 트레킹화를 신었으니 걷는데 그리 큰 무리는 없지만 옛 사람들은 대체 어떤 신발을 신고 이 길을 걸었을까? 고무신 혹은 가죽신, 짚신이 전부일 텐데, 비가 오면 진창에 푹푹 빠졌을 것이고, 눈이 내리는 날이면 죽죽 미끄러졌을 것인데.
동천석실 가는 길의 마지막 난관은 바위 올라가기. 커다란 바위 사이를 낑낑거리면서 올라간다. 겨울에는 미끄럽고 위험해서 오지도 못했겠다, 투덜거리면서 바위 위를 기어오른다. 동천석실은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세운 한 칸짜리 정자로 서책을 즐기면서 신선처럼 소요하는 은자의 처소라는 의미란다.
동천석실 안을 들여다보니 세 사람이 들어가서 둘러앉으면 꽉 차겠다. 겨울에는 난방도 안 되는 정자에 와봤자 북풍한설에 몸만 꽁꽁 얼어버릴 것 같다. 하지만 봄, 여름, 가을에는 빼어난 경치를 볼 수 있는 명당자리임에 틀림이 없다.
문이 활짝 열린 동천석실은 나그네를 안으로 들어오라고 은근하게 부른다. 내가 언제 또 이곳에 와서 신발 끈을 풀 수 있으랴, 싶어서 신발을 벗고 안으로 성큼 걸음을 옮긴다. 낮잠 한숨 흐드러지게 자고 싶을 만큼 고즈넉한 곳이다. 구름도 쉬어가고, 바람도 쉬어가고, 땡볕도 방 한 자락을 차지한 채 쉬어가고 싶은 곳, 동천석실.
곡수당과 낙서재가 부용마을의 전경과 함께 한 눈에 쏙 들어온다. 마음이 답답할 때 이곳에 앉아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속이 툭 터지겠다. 윤선도가 특히 사랑하여 부용동 제일의 명승이라 했다더니 빈 말이 아니로다.
섬에는 바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무가, 풀이 우거진 숲이 있고, 옛사람이 남긴 삶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했다. 고산 윤선도 선생, 보길도에서 은거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신선놀음을 하셨구려.
바다보다 숲길이 더 아름다운 섬, 보길도
보길도 등산로
[노화도 그리고 보길도 8] 사흘 - 2010년 5월 8일
윤선도의 유적지를 죄다 둘러보았으니 이제는 섬의 서쪽을 둘러 볼 순서다. 지도를 들여다보니 해안을 따라 이어진 길을 걸어갔다 다시 그 길을 걸어 나와야 할 것 같다.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자동차 도로를 왕복 두 번 걸어야 한다는 건데, 그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을까? 들어갈 때 그 길을 걷는다면 나올 때는 다른 길로 나오거나, 들어갈 때 다른 길로 가고 나올 때 걸어 나올 수 없을까? 지도를 보면서 이리저리 궁리를 하다가 섬을 거의 수직으로 가로 지르는 산길 즉 등산로를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보길도의 산들은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지면서 겹쳐지고 있어 아주 편안해 뵌다. 그 길을 걸어서 산을 넘으면 우리가 가려는 공룡알 해변이 있는 보옥마을에 빠르고 쉽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보옥마을에서 거꾸로 해변도로를 따라 보길대교까지 걸으면 섬을 한 바퀴 도는 셈이 되리라.
보길도 관광지도에는 보길도의 등산 코스가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그걸 보니 부용마을에서 뽀래기재를 넘으면 보옥마을까지 두어 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등산로니 어느 정도 험할 수는 있겠지만 그쯤이야 감수할 수 있지 않나. 지리산 종주도 해봤는데 말이다.
지도를 보면 등산로는 부용마을에서 시작된다. 등산로 입구를 찾아라, 하면서 부용마을로 내려가는데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도무지 못 찾겠다. 해서 이리저리 오가다보니 낙서재 뒤쪽으로 등산로입구가 보인다. 그 길은 부용마을에서 뽀래기재로 질러가는 길이 아니라 큰길재를 넘어서 격자봉을 들러 에둘러 가는 길이었다. 이 길로 들어간다면 보옥마을까지 뽀래기재로 곧바로 가는 것보다 한두 시간쯤은 더 걸릴 것 같았지만 등산로 입구를 찾는다고 헤매느니 그 길로 걷는 것이 낫겠다 싶어 그 길로 가기로 했다.
산길은 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물이 오른 연둣빛 잎사귀들이 잔뜩 달린 나무들은 좁은 숲길에 깊은 그늘을 드리웠고, 흙길은 푹신했다. 이 길을 걷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보옥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혼자 걸었다면 으스스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남편이 있으니 든든하고 좋네.



가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들이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걷느라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주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숲은, 길은 나를 사로잡았다. 이렇게 좋은 숲길이 보길도에 있다니, 정말이지 새로운 발견이었다. 이 길을 모르고 보길도를 떠났더라면 나는 보길도의 숨겨진 속살을 모르고 말았으리라.
푸른 나뭇잎 사이로 이따금 붉은 동백이 모습을 드러낸다. 동백은 길 위에도 이따금 깊은 설움처럼 뚝뚝 떨어져 있었다. 섬에는 동백이 꼭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숲에는 나무들이 빽빽했고, 길 위에는 지난 가을 떨어진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인적이 잦은 숲길에는 낙엽들이 잘게 부서져 있기 마련인데, 이 길의 낙엽들은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그만큼 이 길을 찾는 사람들이 드물다는 것이겠지. 낙엽 사이를 비집고 야생초들이 자라났고, 노란색과 보라색 봄꽃들이 수줍게 피어나고 있었다. 은은한 숲의 향기가 나무 사이를 떠다니고 있었다.
도보여행자는 걷기 좋은 아름다운 숲길을 만날 때 가장 행복하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아름다운 숲속이라면 길을 잃어도 좋으리라.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와 바닷가 마을은 까마득히 먼 것 같다. 어제 걸어서 다녀왔던 예송마을이 보인다. 바다의 전복양식장도 더불어 모습을 드러내고.
수리봉을 지나고 격자봉을 지나 누룩바위에 다다랐다. 누룩처럼 생겼다 해서 누룩바위일까? 마치 시루떡을 쌓아놓은 것 같기도 하다. 이 길에는 쉬었다 가라고 나무 의자가 놓여있다. 걷다가 힘이 들면 잠시 쉬기 아주 좋다. 숲길은 숲으로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오르막길은 가파르지 않고, 내리막길 역시 완만하다. 산책하기에 딱 좋은 숲길이다.

뽀래기재에서 보옥마을로 내려가는 길, 고사리가 지천이었다.
세 시간 남짓 걸어서 보옥마을의 공룡알 해변에 다다랐다. 산에서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지만 해변에는 관광객들이 여럿 보였다. 바닷가에는 공룡알처럼 큰 돌들이 흩어져 있다. 몇몇 돌들은 진짜 공룡알을 같았지만 그런 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보옥마을 바로 앞에는 보죽산이 있다. 산이 뾰족하게 생겼다고 해서 뾰족산이라고도 불린다는데, 산이 제법 가파르다. 그 산, 눈으로 구경만 한다. 방금 전에 산에서 내려왔으니 다시 산길을 올라가고 싶지 않으므로.
보옥마을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이십여 분 걸으니 일몰이 아름답다는 망끝 전망대가 나온다. 자동차 한 대가 세워져 있고,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표지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여섯 시가 아직 안 된 시간, 일몰을 보려면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아 그 자리를 떠난다.
해안도로를 따라 타박타박 한 시간쯤 걸으니 이제는 그만 걸었으면 좋겠다. 길옆으로 펼쳐지는 바다 풍경은 비슷비슷 해 진력이 나기 시작하고, 다리는 조금씩 무거워지고 있었다. 선창마을 버스정류장의 의자에 앉아 쉬면서 신발을 벗고, 양말도 마저 벗었다. 발바닥이 후끈거린다. 예전에는 조금 많이 걸었다 싶으면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곤 했는데, 이제는 하루에 삼십 킬로미터를 걸어도 물집은 거의 생기지 않는다.
오래 걷는 날에는 쉴 때마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발에 바람을 쐬게 하면 피로가 가신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가끔은 걷다가 남들 보기에 안 좋을 것 같더라도 굳이 양말까지 벗곤 한다. 걷느라 땀에 젖은 양말이 찬바람에 식어 신을 때는 시원해져 발을 자극한다.
쉬면서 다시 보길도의 청별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하룻밤을 잘 것인지, 보길대교를 건너 이목항까지 갈 것인지 고민한다. 숙박업소는 이목항이 청별항보다 낫다, 는 게 내 결론이었다. 노화도에서 첫날 잤던 크로바 모텔로 가서 바다가 보이는 방에서 자고 싶다.
바다가 먼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해가 꼴까닥 저문다고 해도 헤드랜턴이 있으니 길을 걷는데 지장은 없으리라. 하지만 그만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꾀가 난다. 그렇다면 청별항이든 이목항이든 가지 말고 길 위에서 만나는 마을에서 하룻밤을 자야한다는 건데, 마땅하게 잘만 한 곳이 있을까?


그 때였다, 남편이 지나가는 트럭을 세운 것은. 걷기 싫을 때는 차를 타는 것도 좋지만, 한적한 섬 마을의 버스는 이른 시간에 끊어진다. 그렇다면 택시를 이용하거나 남의 차를 얻어 타는 것도 방법이리라. 물론 혼자 여행할 때는 태워준다는 것도 거절한다. 겁이 나서.
1톤 트럭의 짐칸에 올라타고 해안도로를 덜컹거리면서 달리는 기분, 아주 좋다. 바닷바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해가 지기 시작하니 섬의 기온은 뚝 떨어져 으스스한 한기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그래도 상쾌하다, 바닷바람이. 우리를 태운 트럭은 정자마을에서 멈췄다. 거기까지만 간단다. 트럭을 한 번 얻어 탔더니 더 걷기 싫어진다. 한 번 해본 짓, 두 번인들 못하겠나.
지나가는 트럭을 또 세웠더니 이번에는 안 된다면서 그냥 간다. 십여 미터를 가던 트럭, 갑자기 멈춰서더니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는다. 이 트럭, 목적지에 다 왔는데 우리가 태워달라고 한 것이었다. 청별항까지 가느냐고 다시 묻는데, 가는 길에 태워다주는 거야 고맙겠지만 우리 때문에 안 가도 되는 길을 간다면 그건 민폐가 아니겠나. 고맙지만 괜찮다고 사양했다.
아직 다리가 덜 아픈 게야, 걸을 기운이 남아 있는 게야. 염치를 차리는 걸 보면.
그래, 걸을 기운이 남아 있는 건 맞다. 단지 그만 걷고 싶을 뿐이지. 다리가 묵직하지만 그 것도 견딜만하고.
정자마을을 지나 십여 분을 걸었을까, 다시 인심 좋은 트럭을 만나 짐칸에 올라탈 수 있었다. 이 트럭, 청별항까지 간단다. 청별항 입구에서 트럭은 우리를 내려주었다. 청별항까지 들어갈 수도 있지만 택시기사가 보면 싫은 소리를 한단다. 트럭이 안 태워주면 택시를 탈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해서 그런가 보다.
청별항 가까이 왔지만 우리는 청별항으로 들어가는 대신 보길대교를 걸어서 이목항까지 가기로 했다. 보길대교를 걷는데 택시 한 대가 우리 곁에 와서 선다. 여자 기사다. 친절하게 오늘 밤에 잘 숙박업소는 정했느냐고 물으면서 그냥 태워줄 테니 타란다. 보길대교는 걸어서 건널 만하니 그냥 걷겠다고 사양했다. 보길대교를 건너면 바로 이목항이니 그리 많이 걸을 필요도 없고.
이목항 크로바 모텔 앞의 도선장에는 오늘도 여객선 두 척이 묶인 채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고 있었다. 그 배들이 다시 만난 친구처럼 반가운 건 무슨 까닭이지?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모텔에는 손님이 많았다. 그래도 바다가 보이는 방은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3층이 아니라 4층이었지만.
방에 올라가 배낭을 내려놓고 창으로 가서 밖을 내다보니 바다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바다 건너 청별항은 이틀 전처럼 불빛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곳에 다녀오지 않았다면 청별항에 대한 환상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곳에 다녀온 지금, 청별항은 더 이상 아름답고 화려해서 꼭 가고 싶은 항구가 아니었다.





보옥마을 공룡알 해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