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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나눔의 방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작성자허창수|작성시간19.07.28|조회수128 목록 댓글 0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누가복음 17:5-10

사도들이 예수님에게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5)라고 믿음을 더하여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1절에 ‘제자들’과 5절에 ‘사도들’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제자들’과 ‘사도들’은 같은 것 같으면서 음밀하게 따지면 다릅니다. ‘제자들’이란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열두 제자들을 말하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무리들을 말하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제자들’이라고 기록한 것을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란 뜻으로 ‘사자’ 또는 ‘대사’란 의미로 예수님께서 뽑아 세운 열두 제자들 입니다. 열두 사도들이 주님에게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사도들의 요청을 받고 예수님께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므로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 가지 비유에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 받을 수 있는 믿음은 과연 어떠한 믿음이라야 하는 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구원 받을 수 없는 믿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비유는 얼핏 보기에는 사도들이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요청에 동문서답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믿음의 본질을 가르쳐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사도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있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이라는 말씀은 사도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없다는 말씀처럼 들려집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란 무었을 의미합니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아주 작은 믿음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믿음에 믿음을 더해 달라고 했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사도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아주 작은 믿음도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겨자씨는 씨앗 중에 가장 작지만 그 속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땅에 심겨지면 곧 싹이 나고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고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입니다(마13:32). 생명이 없는 믿음은 아무리 큰 믿음이라 할지라도 죽은 믿음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비록 작지만 그 속에 생명이 있는 믿음입니다.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은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싹이 나고 자라는 생명이 있는 믿음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약2:26)고 말씀하셨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시 사도들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믿음에 대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내 믿음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크고 좋은 줄로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열심히 다녔고 지금도 예배도 잘 드리고 직분도 받았고 주일도 잘 지키기 때문에 믿음 만큼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라는 이 말씀은 바로 나와 여러분을 보고 사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는가를 스스로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믿음에 대해서는 별로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니라’(2)는 말씀과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3)는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았던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믿음을 더해서 충만한 믿음이 되기를 요청했지만 예수께서 보실 때 그들의 믿음은 생명있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믿음의 양을 요구했지만 예수님은 믿음의 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약 40여 년전에 대학생들을 데리고 덕유산 끝자락에 있는 거창 월성교회에서 여름 성경학교를 계속해서 3년을 한 일이 있습니다. 요즘은 깊은 계곡에 많은 물이 흐르는 유명한 휴양지 이지만 당시는 화전민들이 사는 산골이었습니다. 교인이라고는 할머니 두 분인데 한 분은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러 오는 사람이 없어도 대포 탄피를 거꾸로 매달은 종을 망치로 치고 혼자 성전에 엎드려 기도하며 제단을 지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행여나 이단이나 다른 교단에서 왔는가를 확인을 하는 것을 보고 비록 화전민이요 배우지 못한 할머니이지만 그분에게서 보수적이고 살아있는 믿음을 보았습니다. 교인들이 도시로 떠났지만 교회를 지키고 기도하던 그 할머니의 믿음이 있었기에 오늘까지도 그 교회가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이야 말로 한 알의 겨자씨와 같은 생명있는 믿음이 아닌가를 생각합니다.

겨자씨 한 알은 모양도 없을 뿐 아니라 값으로도 따질 수 없지만 그러나 땅에 심기어지면 싹이 나고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크게 자랍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믿음도 생명 있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교회에 덕이 되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오래 믿었고 직분도 받았지만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한다면 실상은 죽은 믿음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전통을 자랑했고 율법을 지킨다고 했지만 그들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렸다고 ‘고르반’이라고 하면 부모에게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자들이라고 크게 책망하셨습니다(막7:11). 겉으로는 화려하고 웅장하지만 말씀을 듣고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오래 믿었다고 자만하지 말고 중직을 맡았다고 믿음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려고 노력하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두 번째는 뽕나무 비유입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6)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나무 중에 하필이면 뽕나무를 비유하신 것은 뽕나무의 뿌리가 제일 깊이 뻗어 내리기 때문입니다.

뽑을 수 없는 뽕나무를 보고 바다에 심기어라고 하면 뽕나무가 순종하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문자적으로는 이해 불가입니다. 비유이지 현실적인 것은 아닙니다. 문자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비유로만 이해해야 합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뿌리가 깊이 내린 뽕나무를 보고 명령할 수 있다는 말씀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믿음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상식 위에 믿음을 더하거나 나의 주관적인 경험에다 믿음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을 믿는 것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경험도 없고 지식도 없고 역사에도 없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뽕나무 비유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믿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죄인이 의인이 된다는 믿음입니다. 인간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어느 면으로 보아도 불가능하지만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여기에서 구속사적인 신학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사울은 인간적으로 절대로 예수 믿을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핍박자입니다. 스데반을 죽이고 예루살렘교회를 앞장서서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사울이 거듭나고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뽕나무에게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고 명령하는 한 알의 겨자씨 믿음입니다. 죄인은 구원 받을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이 구원받아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저주받아 영원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믿음입니다.

나 같은 죄인도 구원을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뽕나무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 진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가능한 것입니다. 뿌리가 깊어 뽑을 수 없는 뽕나무를 뽑히게 할 수 있는 것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입니다. 긍정적이고도 창조적인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입니다.

우리 교회가 현실적으로는 성장이 불가능하지만 실망하지 않고 크게 성장할 것을 믿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뽕나무에게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고 믿고 기도하는 믿음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믿음입니다. 이제 그 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새 성전을 짓고 많은 교인들이 모여드는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뽕나무에게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지는 믿음입니다.

저 사람은 아니된다는 사람을 보고 포기하면 안됩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울이 바울이 된 것처럼 저 사람도 변화되어 예수를 믿어 으뜸가는 성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사도들에게 바로 이 진리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세 번째 비유는 무익한 종입니다. 종이 밭을 갈고 양을 치다가 해가 져서 집에 돌아왔을 때 주인이 오늘 수고했으니 와서 앉아 먹으라고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종은 주인의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주인이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명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종은 주인에게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한 사도들에게 ‘이와 같이 너희도 하라’(10)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을 위해서 모든 것을 열심히 했다고 해서 어떤 보상이나 칭찬을 바라지 않고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하며 종으로서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의 교회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가르치느냐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자기가 한 일을 교회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마음먹고 교회를 섬겼음에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이 잘 안하는 힘든 일 좀 했는데 알아주지 않는 다고 실망하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인들이 하는 일에 칭찬을 하고 축복을 합니다. 오늘의 교인들 중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는 것입니다.

남들이 쉽게 하기 어려운 거금을 헌금했을 때 예배시간에 목사님이 헌금봉투를 들어 보이고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축복을 해 주신다면 좋아 할 것인데 아무 말도 없다면 헌금을 하고서도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서운한 마음이 들고 시험에 빠집니다.

사도들이 원했던 믿음은 양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은 질이었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작은 믿음은 생명이 있는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은 구원이 없지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구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뽕나무를 향하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고 명하는 믿음은 죄인이 의인이 되게 하는 믿음입니다. 불가능한 것이 가능한 것이 되는 믿음입니다. 무익한 종이라고 하는 믿음은 칭찬이나 보상이나 축복을 바라는 믿음이 아닌 마땅히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고 하는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 생명이 있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 구원받고 영생복락을 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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