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인으로 난것이 누구의 죄냐
요한복음 9:1-12 43, 395, 369,
요한복음 9장에는 맹인으로 난 사람을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하시고 그를 구원해 주신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맹인으로 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은 1-12까지고, 그를 구원해 주신 것은 13-41절까지 입니다. 눈을 고친 사건은 12 절로 짧지만 그를 구원하신 말씀은 28 절이나 긴 닙다. 이것만 봐도 소극적인 믿음의 사람인 맹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맹인으로 난 사람의 눈을 고쳐 주신 내용부터 살펴보고 다음 시간에 그를 구원하시는 것을 살펴 봅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가 장애자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냐’는 의문을 합니다. 태어나지도 않아서 죄를 범할 수도 없기 때문에 부모의 죄로 장애자로 태어났다는 생각하기 때문에 부모와 자녀 관계는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의문에 대해 아주 명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도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가 있지만 아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맹인으로 난 아들은 부모와 사는 것이 싫어서 집을 나와 구걸을 합니다. 부모는 큰 죄를 지은 죄인처럼 살고, 아들은 부모를 원망하며 구걸하고 사는 매우 불행한 가정입니다. 이것은 이방 종교가 만든 잘못된 신앙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마땅히 행복하게 살아야 할 사람들이 잘못된 신앙관 때문에 불행하게 사는 가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맹인을 볼 때마다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인가 자기의 죄로 인함인가 그의 부모의 죄로 인함인가?’라는 의문을 했습니다. 이러한 의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옛날이나 오늘날도 있습니다. 매일같이 사람들로부터 그러한 소리를 들으며 구걸을 합니다. 부모의 죄로 자신이 맹인이 되었다는 한을 품고 사랑하고 존경해야 할 부모를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제자들까지도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라고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러한 의문을 한 마디로 풀어 주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대로 내려온 풀리지 않은 의문을 풀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부모에게 면제부를 주는 말씀입니다. 부모와 아들과의 나빴던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자유케 하는 말씀입니다. 원망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맹인은 더 이상 부모를 원망하지 않게 되었고 불행했던 가정이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된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맹인으로 났다는 말씀입니다.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타내고자 하는 일을 위해서 그가 맹인으로 났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가 맹인으로 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장애를 가진 자나 그의 부모가 이 말씀을 믿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깊은 믿음이라야 이해를 할 수 있는 아주 어려운 말씀입니다. 기도를 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믿기에는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부산에서 교회를 개척을 할 때 교회와 담을 사이로 사는 건장한 남자 분이 첫 예배를 드릴 때 찾아 오셔서 등록을 했습니다. 개척하는 저로서는 반갑고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심방을 갔습니다. 어두컴컴한 작은 방에 딸이 소아마비로 누워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인은 매일 동래시장에 나가서 반찬 장사를 하고 남편은 그 딸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가 많아서 딸이 저렇게 되었다’고 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혹시 딸이 일어나고 회복되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왔다고 합니다.
부인은 절에 열심히 다니고 마치 불공을 드리는 것처럼 아침에 시장에 나가기 전에 교회에 잠깐 들려 1000원을 강대상에 올려놓습니다. 그 가정을 위해서 내딴에는 할 수 있는데 까지 노력을 했습니다. 당시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암에 걸려 죽을 사람을 고친다는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 부모도 그 딸을 할렐루야 기도원에 데리고 가 보기를 원하기에 포천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두 주간이 지나도 별 도움이 없으니까 다시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장애자를 돌보는 기관에 맡겼습니다. 두 달 정도 지나서 모친이 딸을 데리고 왔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그 분은 결국 교회를 떠났습니다. 장애를 가진 딸로 인하여 그 가정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되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기 위해서 장애자가 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떠난 지가 오래 된 강영우 박사는 15살 때 축구하다가 공에 맞아 두 눈이 실명 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아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맹인이 된 그가 동생 셋을 돌보아야 했지만 감당치 못하여 동생들은 뿔뿔이 흩으져 풍지박산이 되었습니다.
강영우는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지만 죽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살기 위해서 죽기보다 더 힘든 구걸을 하다가 어느 날 하나님을 믿고 부터는 맹인 된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를 믿고 공부를 해서 연세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해서 박사가 되고 부시와 오바마 두 대통령의 행정부에 백악관 차관보로 제직하며 유엔에 장애자를 위한 기구를 만들어 세계적으로 장애자를 위하는 일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신이 맹인 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함’이라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깨닫는 그때부터 원망과 좌절에서 벗어 나게 되었습니다. 두 눈을 가진 건강한 사람도 하지 못한 큰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명의 맹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맹인 두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치며 따라 오는 그들에게 예수님이 ‘내가 너희 눈을 뜨게 해 줄 수 있다고 믿느냐’라고 물었고 그들은 ‘예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그의 눈을 만지며 “네 믿음대로 되리라”고 하시며 고쳐 주셨습니다(마9:29).
그리고 여리고에 구걸하는 맹인 바디매오도 ‘다윗의 자손 예수를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 질렀고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했을 때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시며 ‘보라’고 하시며 고쳐 주셨습니다(눅18:35-38).
그런데 맹인으로 난 이 사람은 자신이 ‘맹인 된 것은 누구의 죄도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말씀을 예수님으로부터 들었음에도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치거나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거나, 보게 해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맹인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눈을 밝게 해 줄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믿음도 없는 사람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믿음 없는 이 맹인의 눈을 뜨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맹인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눈을 만지거나 ‘보라’는 말씀도 하지 않았고 안수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여리고에 삭개오도 예수님에 대한 소극적인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부르거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의 집에 유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믿음도 없는 이 맹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오늘도 소극적인 믿음의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 없는 사람을 어떻게 해서 구원해 주시는 가를 관심을 가지고 배워야 합니다. 고쳐 달라고도 하지 않은 맹인의 눈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고쳐 주셨습니까?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6,7).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 이긴 진흙을 눈에 바르는 것은 맹인에게는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별로 좋지 않습니다. 더구나 침을 뱉어 이긴 진흙은 비위생적 일 뿐 아니라 모욕적인 방법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비록 맹인으로 구걸하지만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하며 예수님의 손을 뿌리치며 화를 낼 수도 있을 만 합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말도 맹인으로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불평을 할 수 있습니다. ‘실로암 못에 씻는다고 내 눈이 밝아질 수 있느냐’, ‘지금까지 실로암 못에서 씻고 눈을 떴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하며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속아도 본전이니까 한번 속아보자’는 생각으로 실로암으로 가다가 자신을 보고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가다가도 돌아 설 수도 있습니다. 실로암 못도 가깝지 않습니다. 눈에 흙을 바른 맹인으로서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쉽지 않습니다.
눈에 바른 진흙은 햇볕에 말라서 눈꺼풀은 댕기고 얼굴에는 땀이 흘러내려 눈은 따가울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인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께서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비록 소극적인 믿음이라 해도 이것 만큼은 칭찬을 해 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맹인에게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맹인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 입니다. 침을 뱉어 이긴 진흙을 눈에 바르는 것은 맹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욕적입니다. 눈에 손을 대고 안수를 했다면 그래도 이해가 될 수 있겠지만 더구나 침을 뱉아 이기 진흙을 눈에 바르는 것은 맹인에게는 모욕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겨내기가 매우 어려운 시험 입니다.
그런데 맹인은 참고 불평하지 않고 어려운 시험을 이겼습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습니다.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됩니다. 우리에게도 큰 복을 주시기 전에 시험부터 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참고 이겨내기 어려운 시험을 하십니다. 이해도 안 되는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는 말씀으로 시험을 하십니다. 우리는 시험을 참고 이겨내야 합니다. 시험을 이겨야 크고 놀라운 기적적인 복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험을 이기지를 못합니다. 무엇보다 말이 많습니다. 상식적으로 또는 과학적으로 맞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시험을 이기지 못합니다. 시험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 생각에는 이치가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믿음에 맞추어 이해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옳다고 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십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도 하지 않은 맹인을 하나님께서 시험하시고 그 시험을 이겼을 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도 짧은 내 생각을 주장하지 마시고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아도 참읍시다. 이겨냅시다. 시험을 이기면 달라고 구하지 않은 것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 없는 맹인도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순종하여 눈을 뜨는 복을 받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시는 기적으로 눈을 뜨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눈을 떳 습니다. 구걸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원망하던 부모님 모시고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그 말씀을 내 맘대로 이해를 하려고 하지 맙시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내 생각을 주장하지 마시고 시험을 이깁시다. 그래서 원망하고 한을 품고 살던 어둔 터널에서 벗어납시다. 여러분이 세상을 얼마나 살겠습니까. 얼마 남지 않은 세상을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고 행복하게 살다가 주님께서 부르시면 천국에 들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