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인사동이라고 불리는 곳은 종로 2가에서부터 관훈동 북쪽인 안국동 사거리까지를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예전 인사동은 종로에서 인사동길과 태화관길이 만나는 곳까지였다고 한다. 관청들이 있던 곳이라 관료들이
많이 살았기에 규모가 큰 전통 한옥들이 많았고 가구점과 병원 등도 있었다는 인사동의 유래는
.조선시대 관인방(寬仁坊)의 인( 仁)과 대사동(大寺洞)의 사(寺) 합쳐져 인사동(仁寺洞)이 되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이 시-구-동으로 나누어지는 것과 같이 '방', '동'은 조선시대 행정구역상의 이름이다.
인사동과 인접한 관훈동에는 조선왕조를 건립한 때부터 국가나 왕실에 공을 세운 사람을 공신으로 책록(冊祿)하기
위해 그 업적을 조사하던 관청인 충훈부가 있었다. 그리고 도적을 막고 법에 금한 사치스러운 잔치나 문란한 풍속
등을 단속하던 이문(里門)이란 관청도 이 지역에 있었다.인사동에는 유학자인 이율곡이 승동교회 인근에 살던 곳이
있었고 효종 때 장수인 이완 장군의 집터도 있으며 중종 때 왕도정치를 주장했던 유학자 조광조의 집도 관훈동에
자리하고 있었다. 명성황후의 친척이지만 친일행각을 하던 민병옥의 집도 이 지역에 있었으며
지금도 경운동 민병옥 가옥으로 유지되고 있다
. 이 집은 일제강점기 화신백화점 등을 설계하였던 한국인 건축가 박길룡이 지은 집으로 내부 화장실과
목욕탕이 있어 한국주택사의 변천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또한 인사동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배에 항거하여 일어난 1919년 3월 1일 기미년 독립운동의 시작지라는
것이다. 그 길을 따라 인사동을 걸어 봅니다
1910년부터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어 양반들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되자 상류층이었던 북촌에 거주하던
양반 계층이 붕괴되었다. 이를 계기로 점차 상점화되기 시작한 점포들 중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경영되던
골동품상이 있었으며 이곳에 의해 몰락하기 시작한 양반들 소유의 도자기, 고서화 및 고가구 같은 골동품들이
인사동에서 주로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이들 상점들은 명동, 충무로의 상점들과 함께 문화재 수탈의
창구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골동품 상점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 초까지 성시를 이루었는데
,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은 먹고 살기 힘들어 많은 골동품이 인사동으로 몰려들었다. 골동품과 서화 거래가
활발해지며 예술과 전통의 거리가 형성되었는데, 특히 60-70년대에는 미술인과 서예가들의 사랑방 역활을 했던
찻집과 갤러리들이 생겨나며, 우리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귀천’에 머물며 막걸리 집을 드나들었던 천상병시인,
술보다 커피 향을 즐기던 방송작가 박이엽, 시인 신경림 인사동에 예술단체가 몰려 있었다는 점도
또 하나의 특징이다. 63년 ‘예총’에 이어 80년대 중반에는 ‘민미협’이 창립되며 인사동에 형성된 예술지형은
화가, 문인, 사진가뿐 아니라 연극인, 행위예술가, 스님, 언론인 등 다양한 문화인이 모여 들였다.
거지행색으로 인사동을 누비던 중광스님과 원광스님 등 괴짜 스님들도 속속 등장했다
이생진 시인
인사동
인사동에 와서도 인사동을 찾지 못하는 것
동서남북에 서 있어도
동서남북이 보이지 않기 때문
그렇게 찾기 어려운 인사동이
동은 낙원동으로 빠지고
서는 공평동으로
남은 종로 2가에서
북은 관훈동에서 사라지니
인사동이 인사동에 있을리가 없다
종로 1.2.3.4가에 어우러져
하루 6만 명의 발걸음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사라의 물결
조선시대 관인 관인방(寬仁坊)의 인( 仁)과
대사동(大寺洞)이 합쳐져 인사동(仁寺洞)의 사(寺)가 만나
인사(仁寺)라 하였으니
거기 가거든 반갑다고 인사 (人事) 仁寺나 하리
이생진
귀천(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잡고
노을빛 함께 단 둘이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천상병은 일본 효고현 히메지에서 태어났으며, 광복 후 경상남도 마산으로 귀국했다
.천상병은 마산중학교 다닐 때 시인이자 담임선생인 김춘수에게서 시를 배웠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군 통역관으로 6개월 동안 근무하였다. 전란 와중이었던 1951년에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송영택 · 김재섭 등과 함께 동인지인 《처녀》지를 발간했다
그러다 .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서 4학년으로 중퇴하였다
1964년에는 김현옥 당시 부산직할시장의 공보실장으로 재직하였는데 이것이 천상병의 생애에 월급쟁이로
직장생활을 한 유일한 이력이었다 그러나 자유로운 성향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던 천상병은
그마저도 2년 만에 그만두게 된다 일정한 거처가 없었으므로 친분 있는 지인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더부살이를 하거나 여인숙에 묵기도 했다 1967년 천상병은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대규모 간첩사건인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돼 3차례의 심각한 고문을 받고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형기를 마치고 다시 거리로 나선 그는 고문 후유증이 겹쳐 행려병환자로 입원하고 서울시립정신병원에서
누워있었는데 몇 달째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천상병이 죽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지인들이 불쌍한 그를 위해 유고 시집 ‘새’를 발간했다 이런 미담이
신문에 실리자 한 병원에서 '천상병 시인이 여기에 있다'는 연락이 왔다. 간호사이던 목순옥 씨와 만나
1972년 결혼하였다. 부인이 인사동에 찻집 '귀천'을 열면서, 아내에게 하루 2천 원씩 용돈을 타 쓰며 시를
짓다가 1993년 4월 '귀천'하였다 서울대학교에 다닐 때였다. 하루는 교수님 집 화장대에 멋있는 병이 있어
양주인 줄 알고 마셨다. 무슨 향이야? 좋은 술은 향기부터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향수였다
천상병 시인 부인 목순옥(귀천 대표)
인사동 1호점 목순옥 부인이 2010년 , 75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문을 닫았다
지금은 부인 조카가 이어받아 운영 중인 귀천 2호점 전통찻집입니다 1935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오빠 친구였던 천상병 시인과 1972년 결혼했으며 평생을 무직으로 살았던 천상병 시인의 뒷바라지를 했다
수락산 밑 초가집 방 한 칸을 얻었다. 그리고 5월 14일 결혼식을 올렸다. 김동리 선생님의 주례와 신봉승씨의
사회로 모든 사람의 축복의 박수를 받으며 그렇게 출발을 했었다. 남편이라기보다 어린애를 돌보며 보살피는
그런 마음으로 나는 살았다고 목순옥씨는 회고했다
명신당필방
’ 명신당필방은 4대에 걸쳐 이어진 가게로 1932년 충청남도 보령에서 벼루공장으로 시작하여 1987년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겨온 곳이다. 얼마 남지 않은 붓 가게이자 전각으로도 유명한 곳으로, 엘리자베스 여왕과
스페인 국왕 부부 등 외국의 국빈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도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김병천 (영화감독)
봄의 왈츠, 가을동화, 겨울연가 등 계절성 제목의 드라마를 찍은 감독
손 숙(연극배우)
환경부장관 지낸 ‘신의 아그네스’ 연극배우
인사동 큰길가 상점에서 팔리는 그림도 싸게는 만원부터 5만원까지의 저렴한 작품들이다.
그런 그림이 대량 생산되는 곳은 대부분 삼각지라는데,
미대생들이나 아르바이트생을 통해 만들어져 인사동에 들어온다고 한다
전유성(방송인)
“학교종이 땡땡” 교장 했던 인생개그의 대부
조문호 (사진가)
인사동 사람들은 하나같이 술을 즐겨 마신다.
이 집 저 집에서 술과 더불어 맛있는 안주를 찾는다.
배가 출출하면 '월평'의 한정식이나 '툇마루'의 된장비빔밥을 먹고, 막걸리와 가자미 식혜를 시킨다.
낙원상가 '일미집'의 청국장,'사동면옥'의 만두전골도 맛있다.
소주 한 잔 하려면 '부산식당'의 생선찌게, '이모집'의 불고기와 간장게장, ‘종로찌게’의 내장탕도 괜찮다.
전형적 대폿집 분위기까지 찾는다면 '여자만'의 꼬막과 병어무침,
'피맛골'의 양푼막걸리와 고갈비는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색다른 먹거리다.
해장국으로는 풍류사랑'에서 맛보는 올갱이국이 별미고,
술집마담의 눈웃음이 그리우면 '소담'이나 '흐린세상 건너기'에서 맥주를 마시면 된다.
비주류를 위한 찻집도 여럿 있다. 작설차하면 ‘수희제’와 ‘초당’이고, 모과차하면 ‘귀천’이다.
인사동에서 만나면 인사말은 접고, 맛있는 집에 가서 대포나 한 잔 합시다!
ㅡ조문호 (사진가) 글 中에서ㅡ
통인가게
인사동의 살아있는 역사 김완규(통인가게 대표)
통인가게는 1924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미술 가게로 인사동에서 가장 오래된 고미술품
전문갤러리이기도 하며 민화 속 호랑이가 통인가게의 대표 캐릭터이다. 전통공예품과 카페가
함께 있다. 인사동에서 더 이상 비싼 그림이 거래되지 않고, 골동품이나 귀한 물건은 인사동까지
오지도 않는다 골동품상은 대부분 장안동으로 자리를 옮겼고, 표구사도 대부분 떠났다.
대신 중국에서 들여온 석물이나 골동이 그 자리를 메웠다.
'통인가게', ‘통문관’ 등 몇몇 업소가 옛 명성을 지키고 있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배평모(소설가)
소설이 안 팔려 “작가폐업” 술집 낸 소설가
김여옥(시인)
인사동 대폿집, “시인”의 주모 시인
오래된 술집으로 아직까지 명맥을 잇는 곳이라면 ‘부산식당’과 ‘사동집’ 정도다
쌈지길이란 작은 주머니라는 뜻이다 - ‘ㅁ’자 마당을 둘러싸고 골목길을 감아 올린 것 같은 구조로 길을
형상화 했다. 가끔 ‘길’ 이름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사실은 건물의 이름이다 화랑, 전통공예점,
전통가구점, 생활용품점 등이 옹기종기 모여있으며, 마당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나 옥상에서의
체험 프로그램은 쌈지길을 찾는 분들에게 다양하고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준다
박영효
. 조선 철종의 딸 영혜옹주의 부군이자 고종의 매제인 금릉위 박영효의 집이 있던 곳이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주도했고 태극기를 만든 인물로 알려진 박영효의 저택으로 박영효는 급진개화파의
일원으로 1884년 12월 4일 조선 말기 일본의 도움을 받아 조선을 개혁하기 위해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과 함께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기회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청군의 무력 개입으로 자주독립과
근대국가 실현의 꿈은 거사 3일 만에 좌절되며 정변은 실패하고 개화파는 일본에 망명했다.
박영효는 20여 년이 넘는 일본 망명 생활을 이어가다 끝내 변절하여 친일행각을 벌이게 된다
태권도인이었던 이금홍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총장이 퇴직 후 본인의 아호를 따 1983년 경인미술관으로
개관한 곳이다 한옥으로 된 경인미술관에는 전시실과, 전통찻집(다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문화공간으로 각광 받는 곳이다
납청놋전
명인 이봉주는 1983년 우리나라 최초 중요무형문화재 77호 방짜 유기장으로 지정받았다
평안북도 납청 지역에서 만들던 유기 제작 방식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는 놋그릇 가게 ‘납청놋전’은 방짜유기
제조기법을 반세기 이상 이어온 곳으로 1986년부터 인사동에서 방짜유기를 판매해오고 있다 이 가게를
둘째 아들 가게를 물려받았다. 2002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청와대 만찬에서 이 가게
식기를 사용했다. 이 사장은"부시 대통령이 방짜 유기 식기가 아름답다며 감탄했다고 전해 들었다"며 "사용한
방짜 유기 반상기 세트를 청와대로부터 선물로 받아 미국으로 가져갔다"고 말했다. 2003년 방영한 인기 드라마
'대장금'에 나오는 그릇과 수저도 대부분 이곳에서 대여했다. 이 사장은 "주변에선 드라마 간접광고(PPL)인 줄
알고 방송국에 얼마를 줬느냐고 묻는데 실제로는 1000만원을 받고 빌려줬다"고 했다 가게 초창기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부인이 유일한 큰손이었다. 1987~1989년 3년간 놋수저 1000 세트를
선물용으로 사갔다. 이후엔 불교 단체나 절에서 종교의식 행사용으로 값비싼 좌종을 주로 구매해 갔다.
1990년대에는 집회와 시위가 늘어나 '데모꾼'들이 유기로 만든 꽹과리를 많이 찾게 됐다. 한 달에 꽹과리만
1500개씩 팔기도 했다. 2000년대 중·후반 들어서 방짜 유기가 살균 작용을 하고, 독물이 묻으면 변색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놋그릇 열풍이 불었다. 이때부터 가게 살림이 피고 납품처가 늘었다.
한때는 한 해 매출액이 120억원에 달했다. 방짜 유기의 매력은 외국인 고객에게도 통한다. 미국 시애틀대학 교수
이만 마즈드가 이 가게에 왔다가 500만원짜리 대형 징이 맘에 든다면서 그 자리에서 결제했다.
. 사물놀이 원조격인 김덕수 사물놀이패는 납청놋전의 꽹과리나 징을 10여 년째 구매하는 오랜 단골이다.
세계적인 드럼 심벌 생산업체 '질지언'의 사장단이 1982년 이봉주 선생이 운영하는 공장을 찾아와 방짜 징과
꽹과리 제작 방식을 견학하기도 했다. 당시 이 회사 경영진은 방짜 징소리를 듣고 "마법 같은 소리"라며
감탄했다.
납청놋전에 깡마른 영국 남성 5명이 와서는 주물 좌종을 크기별로 20개를 샀다. 판매원이 왜 이렇게 많이
사가느냐고 물어보니 "우리는 영국의 록밴드 그룹인데 연주할 때 보조 악기로 쓰려 한다"고 했다고 한다.
강서구 염창동의 한 유명한 무당도 "굿할 때 이만한 소리를 내는 꽹과리가 없다"며 가게를 찾는다.
대한불교총본산조계사
갑신정변의 발화지이자 근대적인 우편 사업의 발상지 ㅡ우정총국(郵政總局).
우정총국은 한국 최초의 우편행정관서로서 우체국 건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이다.
1884년 일본과 미국에서 신식 우편 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온 홍영식이 건의해 만든 관청이다. 1884년 12월 4일
우정총국 개설연(開設宴) 때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전의감터
조선시대 궁중에 쓰이는 의약을 제조하고 약재를
재배하던 관아터로 조선말에 우정총국이 들어섰다
우정총국 옆에 세워진 '도화서터' 표석
인사동에는 태조 때부터 충훈부, 이문 도화서가 있었다.
비록 왕실, 사대부를 위한 작업을 담당하는 관청이긴 했으나 국가가 제도적으로 화가를 양성하는 토대를
마련한 곳이다. 당시 여기서 김홍도, 신윤복 등 당대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인사동은 관가이면서
동시에 거주지였는데, 중인들이 많이 산 것으로 전해진다
민영환은 서울에서 민치구의 손자, 호조판서 민겸호의 친아들로 태어났다. 임오군란으로 피살당한 악덕 관료
민겸호가 그의 생부였다. 민영환은 민겸호의 맏형으로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민태호(흥선대원군의 처남)에게
입양돼 성장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부인 민씨가 그의 고모여서 고종에게는 외사촌 동생이다.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 조카로 알려지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13촌쯤 되는 먼 친척에 불과하다. 그는 개화파이자
개혁파였고, 러시아의 힘으로 청ㆍ일을 견제하려 했던 온건 친러파였다. 러일전쟁(1904) 직후
친일파가 득세하며 그는 권력 중심에서 밀려났다 순국 후 충정공 시호를 받았으며, 고종 사후 종묘에 함께 배향됐다.
죽동궁터
순조의 장녀 명온 공주와 그 남편 김현근이 살던 곳이다 그후 명성왕후의 조카인 민영익이
이곳에 살면서 김옥균 홍영식 어윤중 등의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정국을 주도하였다--
을사늑약' 체결에 분개하여 국민에게 사죄하고 자결한 대한제국의 시종무관장 민영환
.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은 열사흘 전인 11월 17일이었다. 용인에서 이 소식을 들은 민영환은
서울로 돌아와 전 좌의정 조병세 등과 대궐로 나아가 5적의 처단과 조약의 폐기를 청원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상소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는 마침내 향년 44세 죽음으로써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민영환이 자결한
이완식의 집터에 태화빌딩 옆에 한미빌딩이 들어서 있다 다음날 서구식 명함 앞뒷면에 깨알처럼 적힌 유서 세 통이
그의 옷소매에서 발견됐다..
민영환 자결터
“오호! 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서 진멸하리라.
대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제공(諸公)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는가. 단지 (민)영환은 한번 죽음으로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그러나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제공을 기어이 도우리니 다행히 동포형제들은 천만 배 더욱 분려(奮勵)
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하고 학문에 힘쓰며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서라도
마땅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오호!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죽음을 고하노라.”
1919년 3월1일 민족대표들이 선언서를 선포한 서울 종로 인사동의 태화관 70년대 모습.
1980년 철거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태화관은 24대 왕인 헌종의 후궁 사당으로 쓰이다 이완용에게 넘어갔다.1907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에 분노한 군중의 방화로 집을 잃은 이완용에게 일제가 선물한 것이다.
이완용은 사당을 개조해 별장으로 꾸몄다. 을사오적을 비롯한 친일파가 주로 이용했다.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도 자주 드나들었으며 별장은 1918년 음식점으로 탈바꿈한다.
광화문 사거리에 있던 명월관이 소실되자 태화관은 우리나라 최초 근대 요릿집인 명월관 분원이 됐다.
태화빌딩
태화관은 1921년 미국 선교사들에게 팔려 감리교 포교 공간으로 활용됐다.1940년에는 일제가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하고 건물을 몰수해 종로경찰서 청사로 사용했다. 오늘날 종로경찰서가 왜 여기에 있는지
짐작이 가는 상황이다 1979년에는 도심재개발로 철거되고 태화빌딩이 들어섰다.
안순환
<안순환>에 대해서는 이미 친일파 명단에 들어있어 친일행각의 혐의를 벗을 수 없다
고려시대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의 후손으로 조선 최초 근대식 극장이라는 ‘원각사’를 안순환이 운영했다
. 1908년 7월 개관한 원각사는 판소리와 민속춤, 판소리를 변형한 창극을 공연했으며 전환국 기수 안순환이 외식사업으로
성공을 거두자 1908년 대한제국에서 그를 임금의 음식상과 연회를 담당하는 전선사 (典膳司) 장선 (掌膳)으로 채용했다
1915년 1월 인사동 이완용 별장에 ‘태화관’ 이라는 대규모 호텔이 들어섰다 호텔인데 음식과 술을 팔아 말썽이 많았다.
1918년 안순환은 이를 인수해 요리점으로 업종을 바꿨다. 명월관 분점이다.명월관 덕분에 일반인도 궁궐 음식을 맛볼 수
있게 됐다. 노래와 춤으로 흥을 돋우는 궁궐 기생과 나인이 나중에 합류하면서 요정으로 운영됐다.
친일파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돈으로 여기서 방탕하게 놀았다. 이완용, 송병준, 이지용 등 핵심 친일파가 단골이었다.
손병희 천도교 교주도 가끔 이용했다. 독립선언서 낭독 장소가 된 것은 이런 인연 때문이었다.
조선 현종 임금의 후궁이 사는 곳이었다는 '순화궁터' 표석이다.
조선 전기에는 중종반정에 가담해 정국공신 2등에 책록된 구수영이 살았고, 당시 이곳에는 태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안동김씨 김흥근의 소유를 거쳐 다시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의 순화궁이
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 이완용의 소유로 넘어갔다 나중에 이완용의 별장으로 쓰이다
조선 음식점 명월관의 지점인 태화관으로 임대되었다. .
태화복지재단 1층에 있는 ‘민족대표 삼일독립선언도’
. 태화관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자 모인 민족대표들의 모습을 그린 기록화. 본래 33인이 왔어야 하나
, 4명(길선주, 유영대, 김병조, 정춘수)이 사정상 오지 못하여 29인이 참여한 상태로 낭독하였다
3·1 운동의 발상지 인사동 삼일독립선언 유적지
. 태화빌딩 자리는 조선 시대 초 태화정과 부용당이 있던 곳으로, 어린 시절 인조가 살던 잠저(潛邸)였다. 태화정은
헌종 때 후궁 경빈 김씨의 사당으로 순화궁이 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 이완용이 소유했다. 1918년 마당에 있던 고목이
벼락을 맞아 쪼개지자 놀란 이완용이 유명한 기생집 명월관 주인에게 팔면서 순화궁은 태화관이라는 요정으로 바뀐다
. 이곳에서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곳은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이
을사늑약을 모의한 곳인데, 민족대표들은 일부러 이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해 을사늑약을 무효화하려 했다
승동교회( 서울시 유형문화재)
승동교회는 1893년 옛 곤당골(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 한옥에서 사무엘 무어 선교사의 인도로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곤당골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이 승동교회 지하실에서 3·1 독립선언문
일부가 인쇄됐고 3·1운동 당시 학생대표들이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장소이기도 하다 1904년 현재의
위치인 인사동(당시 승동) 이전 후 1913년에 세워진 본당건물은 신분제가 명확했던 당시 백정들도
다닐 수 있던 교회로 유명했으며 백정교회’로 불리기도 했던 곤당골교회가 1895년 양반이 천민과 함께
예배할 수 없다며 양반 신자들이 길 건너편 홍문섯골에 예배당을 지어 나갔다. 여러 차례 수리하고
보완 작업을 거쳤지만 기본적인 형태와 구조는 예전 거의 변함이 없다
이율곡 선생이 살던 절골 집터
이 표석은 처음에 백상빌딩(관훈동 197) 앞 화단에 세워졌다가 이곳으로 이전된 것이다
표지석의 절골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원각사(현 탑골공원)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으로 보인다
이율곡이 관직에 있을 때 거주하였을 한양의 집 위치는 명확히 알려진 게 없다.
이율곡
45세 쯤 병을 얻자 출퇴근이 편한 대사동(大寺洞, 인사동과 관훈동)으로 옮겨와 남의 집 살이를 하다
선조 1584년 1월 16일 49세의 일기로 이곳 절골에서 별세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대사동,
즉 오늘날 종로구 인사동 관훈동 일대에서 거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향인 파주 자운산 선영에는
선생이 16세 때 돌아가신 어머니 신사임당의 묘소도 함께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항일운동의 거점 천도교 중앙대교당( 서울시 유형문화재)
1919년 7월에 착공해 1921년 2월에 준공한 천도교중앙대교당. 기초는 화강석, 벽은 붉은 벽돌, 지붕은 미국에서
수입한 철재 앵글로 중간에 기둥이 없게 지어졌다. 건축비 30만 원을 모금해 총건축비 등 27만 원을 제외하고
남은 돈을 3·1운동 자금으로 썼다고 한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은 한때 종현성당(명동성당), 조선총독부 창사와 함께
경성 3대 건물로 꼽히기도 했다
이곳은 천도교의 총본산 교당이며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다.
. 천도교 제3대 교주 손병희가 주도해 건축한 건물로 당초 건평 400평 규모의 대교당을 계획하고 당국에 건축허가를
신청하였으나 조선총독부는 위험하다는 구실을 붙여 불허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교당이 너무 크다는 것과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것이었는데, 천도교가 민족운동에 활발히 참여했던 종교였기 때문에 천도교를 견제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규모를 줄여 교당을 완성했다
. 천도교는 동학을 계승하여 발전된 한국의 신흥 종교로 1860년 조선 말기에 대신사 최제우 선생이 민족주의
이상향의 신앙을 제창하며 창립한 동학을 1906년 3대 교주 손병희가 천도교로 개편하였다. 또한 이곳은
1920년 6월 천도교 청년회의 기관잡지로 발행된 잡지인 ‘개벽’의 발행처이기도 하다. 신 문화운동을
열게 된 개혁적이고 민족적인 계몽잡지 ' ‘개벽’은 당시의 잡지 중에서 《개벽》은 가장 많은 탄압을 받았으나
꾸준히 신문화 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다했다
이곳은 아동문학가 소파 방정환이 ‘어린이’라는 호칭을 일반화한 잡지 ‘어린이’를 창간한 개벽사
터이다 어린이 계몽운동에 앞장선 방정환 선생이 세운 ‘색동회’와 잡지 ‘어린이’를 발행하던
곳이기도 하다. 방정환 선생은 기미독립선언서 대표 33인의 한 명인 손병희 선생의 사위이기도 하다
1923년에 창간된 어린이 잡지는 ‘어린이’라는 이름의 천도교 소년회의 기관잡지로, 이또한 개벽사
에서 발행하였다고 한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최장수 어린이 잡지로 방정환 선생이 발간 당시 편집인이었다.
조선 최고의 갑부 민병옥 가옥’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유산)
휘문고등학교 설립자이기도 한 민영휘는 명성황후의 먼 친척으로 구한말 대표적인 탐관오리였다. 임오군란때부터
공공의 적으로 지탄을 받아 그의 집이 부서지는 등 화를 입었으며, 갑오경장때도 대표적인 탐관오리로 유배를 받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탐관오리를 하면서 수탈한 재물을 불려서 조선최고의 갑부가 되었으며 자신의 이름을 딴
휘문고등학교와 다섯 번째 소실 안유풍의 이름을 딴 풍문여고를 설립하기도 했다
000의 아들 000은, 대표적 친일파의 거두로 일제 때 경제계의 실권자가 되어 동화은행을 설립하는 등
은행가로 막대한 재산을 불렸다. 현재도 충청도 일대에는 000 집안 소유로 수십만평의 땅이 있다.
(동화은행은 조흥은행을 거쳐 현재 신한은행이 되었다.)
친일파 000의 아들이자 그 역시 친일파인 000이, 아들 민병옥과 민병완을 위해 두 채를 똑같이 지었다
. 한옥의 건축양식과 서양의 주거 양식을 도입한 한국 최초의 개량 한옥이다 이 집은, 같은 모양의 한옥 중
북쪽편에 있던 한옥(민병옥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