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길 따라 걷는 ㅡ공주 공산성 둘레길

작성자백두대간|작성시간26.05.16|조회수147 목록 댓글 2

우리가   공주를 여행할때 공산성에서 무녕왕릉을 가거나  혹은 무녕왕릉에서 공산성으로 올때

 

무심코  이곳을 지나게 된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왕의 발받침대를 본떠 만든 ‘무령왕릉연문이다

잠시 이해를 돕는다면 이 글의 위쪽  공주박물관의 사진 왕의 발받침대를 거꾸로 엎어 놓으면

 

바로 저 모습이 된다

기원전 18년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한강유역에서 세운 나라가

 

지금의 서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으로 추정한다 백제는 이곳에서 500년 간  존속했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3만여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죽이자

 

당시 태자였던 문주왕은 도읍을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옮긴다  그러나 웅진은 한 왕조의

 

도읍으로는 땅이 협소해  도성의 기능을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따라서 해외진출에 유리하고,

 

보다 넓은 평야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재천도를 염두에 둔 것이 부여였다

동성왕이 사비에서 3번이나 사냥을 했던 이유가 바로 천도를 염두에 둔 사전작업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런 동성왕이 501년 8월 사비(부여)에서도 사방을 조망할 수 있고, 금강 하구를 통제할 수 있는 성흥산에

 

(가림성)을 쌓고  가림성의 성주로 지금의 국왕 경호실장격인 위사좌평에  백가를 임명했다.

 

그러나 웅진(공주)에 기반을 둔 귀족 출신으로 추정되는 백가는 이 인사발령을 ‘좌천’으로 여겼다. 본거지(웅진)

 

에서 외지(사비)로 쫓겨났다고 여긴 것이다. 

<삼국사기>는 “백가는 병을 핑계로 왕명을 사양했지만 동성왕은

 

허락하지 않았다”면서 “백가는 이 때문에 왕을 무척 원망했다”고 기록했다. 3개월만인 11월 . 동성왕이

 

사비 벌판에서 사냥에 나섰을 때 마침 큰 눈이 내려 어느 마을에서 묵게 되었다. 이때 백가가 자객을 보내

 

동성왕을 시해했다 결국 백제는  538년 성왕 때 수도를 사비로 천도한다

제민천교 영세비

 

조선 순조 1817년 제민천이 범람하고 제민천교가 붕괴되자 이를 재 건립한 사실을 기리는 비석이다.

 

비문에는 1817년 여름 홍수로 다리와 둑이 무너지자, 다리의 복구를 8월에 마치고 하천의 둑을 고쳐쌓은

 

일은 이듬해인 1818년 4월에 모두 완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사업 자금의 조달방법 및

 

그 과정에서 공이 있는 관리와 자금을 지원한 강신환 등 10여명의 일반백성 이름도 적혀 있다

 백제시대에는 웅진성,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그 후부터 공산성으로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공산성을 "공주 북쪽 2리에 있는 큰 산으로, 산의 모습이 공(公)자 같이

 

 생겨서 공산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원래 백제 때는 흙을 다져 쌓은 토성이었는데 조선 시대

 

 임진왜란 이후 돌로 다시 고쳐 쌓아서 지금 같은 석성이 되었다고 한다

사적 제12호 공산성ㅡ 금서루(서문)

백제 무왕 31년에 사비(부여)의 궁궐을  수리할 때 5개월 동안 머물렀으며

 

660년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은 나당연합군에게 황산벌에서 패하자  의자왕은 태자와 공산성으로

 

 피신하고 부소산성에는 둘째가 왕을 자처하며 버텼다. 그러나 공산성으로 들어간 왕이 5일만에  

 

항복하면서 부소산성도 문을 열고 나와 무릎 꿇었다. 얼마나 잔혹했는지, 우물에서 머리가 잘린

 

두개골이 나왔다

1624년 정월, 평안병사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 정예병 1만의 반란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조선 조정은  큰 혼란에 빠졌고 인조는 급기야 차령 이남의 공주 공산성으로 피란처로 결정됐다

공산성에는 조선 인조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피난 온 인조에게 성안 마을 사람이  떡을 해 바쳤는데,

 

그 맛이 하도 좋아 인조가  떡 이름이 뭔지 물어봤는데 임씨네 집에서 바친 떡이라고 대답하자

 

 '그 맛이  참 절미라고 하여 임절미’로 불렀고 이것이 오늘날 인절미가 됐다고 한다

쌍수정

쌍수정

 

조선왕조 16대 왕 인조는 조선의 왕 중에서 종묘사직을 버리고 백성과 한양을 버리고

 

세 번이나 몽진한 왕이다  첫 번째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에 성공한 인조이지만 반정의

 

공신 중 하나였던 이괄은 평안도로 좌천되자 이에 앙심을 품고 난을 일으켜 공주 공산성으로 몽진했고

 

두 번째는 이괄의 난이 일어난 3년 후인 1627년 후금의 침략으로 강화도로 몽진한 정묘호란이고

 

세 번째는 청태종의 침략을 받아 남한산성의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예식을 한  병자호란이다

공산성 왕궁지

 

사비로 다시 천도하기까지 웅진은 백제의 왕도였다. 63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이었음에도 이 시기에는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 성왕 등 5명의 왕이 재위했다. 그 가운데 문주왕과 동성왕은 신하에게

 

시해됐고 삼근왕은 어린 나이에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았다. 웅진이 현재의 공주임은 분명하지만 일제강점기

 

이래 왕궁이 어디에 있었는지 논란이 벌어졌다

2018년 말부터 이듬해 봄까지 진행된 발굴에서 왕궁의 위치를

 

알려주는 결정적 실마리가 드러났다. 공산성의 남문인 진남루와 추정 왕궁지 사이에서 ‘대궐의 문’에 해당하는

 

문궐(門闕) 흔적이 발견된 데 이어 쌍수정 주변에서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만든 대형 건물의 기초부가

 

확인됐다. 이 발굴을 통해 웅진기 백제 왕궁의 위치가 쌍수정 앞뜰이었음이 분명해졌다

공산성 우물

 

공산성에는 3개의 우물이 있다고 전한다. 공주 공산성 연지와 쌍수정 남쪽의 것

 

2개만 확인되고 있다. . 금강 가까이에서 물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지형상의 조건을 이용하여

 

공산성에 필요한 식수를 확보할 목적으로 만든  우물이다

쌍수정사적비

진남루(남문)

 

공산성 남문인 진남루는 공산성 성문 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성문으로

 

조선시대 한양에서 전라도로 갈 때 천안을 거쳐 금강에서 나룻배로 건너 공복루(북문)를 통과하여

 

논산으로 가는 삼남 대로의 관문이었다 1948년 붕괴 된것을 1970년대에 해체복원 하였다 토성이었던

 

공산성을 석성으로 바꾸어 만든 성문으로 공주 시가지와 통하는 길이 진남루와 연결되어 있다

영동루(동문)

 

4개의 성문 가운데 동쪽 문루로  백제시대 성벽이 축소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1980년 발굴 당시 문 터와

 

  문 양옆에서 문을 지탱하고 있던 받침돌을 확인하였다 조사에서 얻은 자료와 조선 철종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1993년에 조선시대 성문의 일반작인 모습으로 다시 세웠다 문루의 이름을

 

알 수 없어서 2009년 시민의 공모를 거쳐 영동루라 지었다

임류각

 

임류각은 백제 동성왕 22년 왕궁의 동쪽에 건축한 건물로서 신하들의 연회장소로 사용되었다.

 

동성왕의 지나친 연회에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 충신들이 탄원하자 못 들어오게 하며 연회를

 

계속했다고 한다.결국  파벌 싸움에서 신하들에게 제거되고 만다 흐르는 금강 물을 내려다 본다는

 

뜻으로 임류각이라 했다 높이가 15m 되는데다  굉장히 화려했다고 알려져 있고 이곳에서 금강과

 

아름다운 산세를 감상할 수 있었다고 한다 건물은 1980년 공산성에서 발굴 조사된 추정 임류각지의

 

구조를 근거로 1991~1993년까지 본래의 위치에서 윗쪽으로 이동하여 새로이  복원한것이다

임류각지

 

경주 동궁  월지 (674년 문무왕) 보다 40년  앞서 백제 무왕 634년 3민평의 연못을 축조한

 

 부여 궁남지가  있었고 백제는 삼국중에 조원기술이 가장 뛰어나서 "노자공"이란 백제사람은

 

 612년에 일본 황궁의 정원을 꾸며  일본 아스카시대의 정원사의 시조가 되었다 그런 부여의

 

 궁남지보다 112년 앞선 그러니까 백제가 부여로 천도하기전  500년 동성왕 때 만들어졌다는

 

 임류각지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단지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2년(500년) 조에는

 

 "22년 봄에 임류각을 궁궐 동쪽에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장이었으며 연못을 파고 진기한 새를

 

 길렀다" 라는 기록만 남아 있어 그 실체를 알수없음이 안타깝다  

명국삼장비

 

 정유재란 이듬해인 선조 (1598)가을 공주에 주둔하면서 공주민을 왜(倭)로 부터 보호 해주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보살펴준 명나라의 3장수 제독 이공/ 위관 임제/유격장 남방위의

 

업적을 기린 사은 송덕비로서 원래 이 비석은 금강변 남안에 있었는데, 홍수로 물속에

 

 매몰되었다가 아전의 꿈에 홀연히 백발 노인이 나타나 간곡하게 비를 다시 세우도록 부탁하자

 

 이를 전해 들은 당시 관찰사 송정명이 적극 지원하여 숙종(1713) 새로 건립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이들 비석은 다시 일본인들에

 

의하여 공주 읍사무소 뒷뜰에 매몰되었다가 1945년 해방이 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다

광복루

 

광복루는 원래 이 자리가 아니라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었다 그곳은 충청감영에 소속된 군사들이 주둔하던

 

중군영이라는 곳이었는데 광복루는 군영의 출입문이자 높은 곳에서 밖을 관찰하기도 했던 대문의 누각으로

 

본래 해상루라 했다 그런데 일본에 의해 강제로 군대가 해산하게 될 때  공산성에 있던 중군영도 폐쇠되어

 

쓰임새가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일본 데라우찌총독이 공주를 방문한다는  기념으로 해상루의 위지를 옮겨

 

웅심각으로 바꾸었다 광복 직후인 1946년 공주를 찿은 백범 김구 선생이 

 

나라를 되찿을 것을 기리는 마음에서 광복루라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시대 얼음창고(석빙고)

 

얼음이 귀했던 조선시대에는 금강에 얼음이 얼면 그것을 채빙하여  왕겨에 싸서 저장했다가

 

석빙고에 저장해 두었다가 여름이면 꺼내 사용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약제를 보관하거나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로 다시 사용하기도 했다

 

근대에 와서는 충청남도 잠업 농가에 누에씨를 보급하기 위한 지하 저장시설로

 

누에의 알을 적당한 시기까지 보관해주는 잠종저온창고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것은 지세가 험준하기 때문이라 백제 문주왕에서 성왕까지

 

5대 64년간 도읍지였던 공주는  예로부터 금강이 비단처럼 아름답다 하여 (錦江)-비단강]이라 하였다. 

 

 금강은 한강과 낙동강에 이어 남한에서 세번째로 큰 강이다 백제는 항상 고구려의 남침을 경계하여 위례성은

 

한강을 북쪽에 두었고 공주에서는 금강을, 부여에서는 백마강을 북쪽에 두는   방책을 유지하였다

만하루

 

사람이 왕래하는 성문이 아니고  금강과 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군사적 방어를 목적으로

 

누각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1870년대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기록된  만하루는

 

 1980년 공산성 유적 발굴시 건물터가 확인되어 1984년 당시의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박윤원의 <만하루기>에는 만하루의 명칭을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세명마(洗兵馬:병마를 씻어)라는  시 귀절에서 따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安得壯士挽天河하여 淨洗兵甲長不用(안득장사만천하하여 정세병갑장불용)

 

어떻게 하면 하늘 나라 물을 끌어들일 장사를 얻어 무기들을 깨끗이 씻어 두어

 

영원히 사용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라고 하여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의 염원이 담겨있다

공산성 공북루 앞 광장에서  발굴된 검은색 갑옷 조각  붉은 글자인

 

‘행정관십(行貞觀十)’, ‘구년사월이십일일(九年四月x一日)’은 정관은 당나라 연호로, 19년은 645년이며

 

백제 의자왕 5년에 해당한다 백제 의자왕 ‘645년 4월 21일’이란 뜻으로 백제가 멸망하던 시기 땅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그러나 이 갑옷의 주인이 패망한 백제 의자왕 혹은 왕족인지, 백제를 패망시킨 당나라

 

장수인지 단정하기 어려우나  백제 ‘최후의 날’을 전후해 땅에 묻혔음은 분명해  보인다.

 

작은 사진은 건물 추녀 끝에 장식하던 기와인 수막새.

 

ㅡ 공주대 역사박물관·국립공주박물관 제공 

공복루/북문(유형문화재 37호) 

 

공산성의 북문이면서 실제 정문은 공복루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금강철교(금강교)가

 

 가설되기 전까지는 조선시대 한양과 호남지역을 오갈때 유일한 내륙교통의 거점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출입문이다 공북루를 나서면 금강을 건너는 나루가 있었고  걸어서 

 

 차령산맥의 관문인 차령을 넘어 서울로 향할수 있었다고 한다

영은사  

 

  영은사는조선 세조(1458년)에 세워진 사찰이다. 묘은사로 불렀다가 이괄의 난 (1624년)떄에

 

이 절에 피신한 인조가 은적사라 하였다가 다시 영은사로 고쳤다.광해군 (1616)

 

이 곳에 僧長(승장)을 두어 전국 8도의 사찰을 관장케 했다는 기록도 있다 한다

원통전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합숙 및 훈련소로 이곳에서 훈련된 승병들이

 

영규대사의 인솔하에 충남 금산전투에 참여했었다

"예식진 묘지석

 

근래 중국 시안 당나라의 고위 관료들이 묻히는 무덤 군에서 "예식진"의 묘지석이 발견되었는데

 

내용을 보면 당나라에서 높은 벼슬을 하고 황제가 최대의 예우를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다

 

황산벌의 계백이 패하고 사비성으로 신라군이 쳐들어오자 의자왕은 가족을 데리고 야밤에  

 

웅진성(공산성)으로 도피한다 그러나 5일만에 공산성에서 나와 660년 7월18일 김춘추와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항복한다 중국 당나라 역사서 <신당서>와 <구당서>에는 

 

의자왕이 공산성의 성주인  "예식"이라는 사람에게 잡혀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식진은 나라와  의자왕을 배신하는 대가로 편안한 삶을 택하여 660년  백제가 멸망하게 된다

의자왕은 감옥에 갇힌 뒤 신라왕(김춘추) 김유신 소정방이 당상에서 내려다보는 곳에서 항복 의식을 거행하고

 

술을 따라 올리는 치욕을 당한다 의자왕 왕족 신료 93인과 1만 2천 명의 백성들이 전리품으로 당나라로

 

끌려가게 된다 황해를 가로지르고 2천 리 길을 걸어 낙양에 도착하게 된다

 

의자왕은 쌓인 피로와 처형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며칠 만에 죽어 북망산에 묻히게 된다

공산성의 미스터리

 

국내에서 공산성처럼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방어시설로 활용된 사례는 찾기 어렵다.

 

백제 패망 후 그 터에 여러 시기에 걸쳐 새로운 건물이 지어짐에 따라 백제의 흔적은 상당 부분 지워졌다

.

 발굴을 통해 왕궁, 관아, 공방, 연못, 도로 등이 발굴됐고 건물 지붕을 장식했던 각종 기와, 일상에서 사용한

 

토기, 전장에서 쓰던 갑옷과 무기 등이 쏟아졌다그러나 공산성을 문주왕 때 처음 쌓았는지, 궁궐 내 전각은

 

언제 만들어졌고 어떻게 배치되어 있었는지, 동성왕 때 세운 임류각은 어디에 있는지, 무왕은 사비의 궁궐을

 

수리할 때 왜 한동안 공산성에 머물렀는지 등은 지금도 여전히 풀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남기는 글>

 

역사속에서 공산성은 늘 쫓기는 자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어머니 품속과 같은 곳이었다  

 

 나당연합군이 부여 사비성을 위협하자  백제 의자왕은 왕자를 데리고 공산성으로 피신해

 

 항전하였으나 끝내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였다 882년 신라 헌덕왕 때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데 불만을  품고 "정안"이라는  국호를 내걸고 난을 일으킨 김헌창도 광주 전주에서

 

 승승장구하다 관군에  쫒기자  공산성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 거란의 침입을 맞아

 

 현종이 일시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고, 1623년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난한곳도

 

공산성이었다 그것은 바로 공주가  역사지리적으로  행정의 중심지이자 지방 세력의

 

거점으로 멀리 차령의 높은 산줄기는 공주 외곽에서 북쪽의 적을 막게하고, 가까이는 금강이

 

다시 한번 천혜의 방어선을 만들어 준다  그런가 하면 공주는 남쪽으로는 큰 산이 가로막은 

 

분지형 지형으로 방어에 매우 유리한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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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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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추소리 | 작성시간 26.05.16 공산성에 대한 역사 기행문 잘 읽었습니다 . 대단한 필력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
    고맙습니다 . 건강 하십시요 .
  • 답댓글 작성자백두대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5.16
    감사합니다
    올린 글은
    현장 해설과
    무관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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