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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ㅡ99칸 대저택 ㅡ구례 운조루

작성자백두대간|작성시간26.06.18|조회수96 목록 댓글 0

운조루 전경도 (현석화)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이곳을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살기 좋은 곳으로 꼽았다 이 동네에는 3개의 진혈(眞穴) 터가 있다는데, 금거북이 진흙

 

속으로 들어간 ‘금구몰니’, 지리산 선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금환락지’, 그리고 다섯 보물이 서로 모여 있는 ‘

 

오보교취’의 땅이다. 운조루 창건 시 땅속에서 거북 모양의 돌이 출토되어 가보로 삼았으며.이후 이 집은 대를

 

이어  재력을 키운 명문가가 되었으며 오미동은 풍수설을 입증한 대표적인 명당 마을이 됐다.하지만 ,근래에

 

도난으로 거북돌은 없어졌다

일제강점기 무라야마라가 쓴  <조선의 풍수> 를 보면 풍수적 목적으로 1912년

 

부터 .충청남도,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각 처에서  1929년 까지   이주한 가구가 100여호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후 운조루는 토지개혁으로 대부분 가산을 해체당하고, 해방 공간의 빨치산

 

전쟁으로 장손을 잃는 등 가문의 운세도 기울었다

연당은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 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이 집은 조선 영조 (1776년)에 당시 삼수 부사를 지낸 대구 태생의 류이주가 세운 것으로 

 

전라도 낙안군수를 지낼 당시 인근 구례 땅에서 명당 터를 발견하고 이곳에 정착할 뜻을 두었다 한다.

 

그는 소싯적부터 학문보다 사냥을 즐겼고, 관직은 주로 남한산성과 함흥성 공사 등 국영 건설업에 종사했다 

 

이 집을 지을 당시 창건주인 류이주는 함흥, 상주, 용천 등 외지의 관직에 있었고, 실질적인 공사는

 

조카 류덕호가 맡았다. 그러나 류이주는 다년간의 국가 기반시설 공사 경험을 바탕으로 운조루를 직접 설계했고,

 

류덕호는 그 설계를 충실히 따라 감리 역할을 했다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봉우리를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 

 

날다 지친 새들은 집으로 돌아올 줄 아는구나.

시구의 첫 자를 합한 것이 이 집의 당호라 한다. 

곡식이 닷섬 들어가는 커다란 나무로 된 뒤주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적혀있다 ,  

 

배고픈 사람은 누구든 곡식을 꺼낼 수 있눈 구멍을 만들어 .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이 곡식이 떨어졌을 때

 

언제든지 운조루에서 먹을 만큼  꺼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웃외  과객이나, 걸인들도 운조루를 자주 찾았다

 

고 전한다.. . 운조루의 주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베푼 쌀은 한 해 수확량의 20%나 되었다고 한다

 

타인능해는 바로 나눔의 삶, 베품의 삶인 것이다  200년이 지나도록 망하지 아니하고 오늘날까지 가문이 번창한

 

것은 오로지 분수를 지키며 생활하고,이웃을 돌보았던 마음이 전승 되어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호랑이 뼈

 

운조루의 솟을대문 앞쪽에는 호랑이 뼈가 두 개 걸려 있다.

 

흔히 풍수에서 잡귀를 막기 위해 엄나무 가지를 대문 위에 걸쳐놓거나

 

또는 문패를 밤나무로 만들어 걸어두면 도둑이 들지 않는다고 하는데

 

호랑이뼈를 걸어 잡귀의 출입을 막은 것이 특이하다.

 

이 뼈는 집을 건축한 류이주가 직접 때려잡은 호랑이의 뼈라고 한다.

어느 때 류이주는 평안북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면서 삼수갑산을 넘게 되었는데

 

서재에 이르렀을 때 호랑이를 만났다.

 

그러자 가지고 있던 채찍으로 그 호랑이를 잡아 죽였는데 가죽은 벗겨

 

임금인 영조대왕에게 바치고 뼈는 잡귀의 침범을 방지하기 위해

 

대문 앞에 걸어 두었다고 하는데 이로 인하여 영조대왕은

 

류이주를 박호장군이라 불렀다고 한다.

류이주가 집을 짓고 귀만와(늙어 돌아와 살 움집)라 했고 누각이름이 운조루였는데 지금은 전체를 운조루라한다

창건주 류이주의 친영.

 

류이주는 낙안 군수 시절인 1773년, 낙안의 세곡선이 한양으로 가다 침몰하여 그 책임을 지고

 

함경도 삼수 땅으로 유배까지 다녀왔지만, 구례에 와서도 다시 관직에 나갈 기회를 잡자

 

집 짓는 일을 조카에게 맡기고 출사했다고 한다

유이주의 전신 초상화

 

그는 경상북도 안동 출신이지만, 구례와 가까운 낙안에 잠시 수령으로 온 적이 있어

 

방문했다가 아예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리기로 했다. 그는 영조때 사수부사를 지냈다

높고 넓은 사랑채의 기단

 

운조루는  99간 (현존73간)의 대규모 주택으로서 조선시대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품자형의 배치 형식을 보이고

 

있는 양반가이다.운조루의 사랑은 서측의 큰 사랑채와 남측의 중간사랑채로 나누어져 있다.

 

그전에는 중간사랑 아래도 작은사랑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이렇게 사랑채가 많이 있는 것은

 

당시의 대가족제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운조루에는 다른 한옥에서 구경하기 힘든 것들이 여럿 있다. 굴뚝을 따로 만들지 않고, 기단에 구멍을 내서

 

연기를 빼내는  가렛굴이 여럿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어려운 시절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여 밥 짓는

 

연기가 멀리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설계 라고 한다

전라구례오미동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

 

전라도 구례 오미골에 있는 집- 배치도란 뜻이다.

 

위 아래로 산 이름이 적혔는데, 지리산 노고단이 주산(主山)이고 

 

좌청룡은 왕시루봉, 우백호는 형제봉이다.

 

이 집터의 명당수  섬진강은 (마주 볼 때)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흘러 간다. 안산은 오봉산인데,

 

그 화기를 막기 위해 비보로 판 것이 연지로 풍수 상 선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혈처

 

.이 그림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집을 보여주기 위한 설명용이다. 집에 대한 주인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어서,

이 한 장의 그림만으로 운조루와 조선시대 한옥의 중요한 특징들을 이해할 수 있다 오미동가도에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서쪽 큰사랑 누마루에 남자 주인을, 동쪽 안사랑 누마루에 여자 주인을 그렸다. 두 인물은

조선시대 
한옥이 갖는 내외 구별의 상징인 동시에 건물과 마당과 외부의 자연까지 사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천인합일의 주인공이다.  이 집 곳곳에는 땅 위에 떠있는 누마루를 마련했고,

안채에는 아예 2층 다락인 층루들을 두었다

 

홍패교지

 

류이주선조가 1753년 무과최종 급제 교지(초시나 진사 생원은 백패교지를 내린다고 한다)

이들은 마당을 내려 보고 먼 산의 경관을 바라보는 곳이다. 바깥의 경치를 집 안으로 끌고 들어와 내 것으로

 

만드는, 이른바 ‘차경’을 위한 곳이다. 한옥의 앞마당에 정원을 가꾸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정원을 차경하기 위함이다. ‘오미동가도’ 주인 내외가 각자의 누마루에 앉아 있는 모습도 멀리 앞산의 차경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다  ‘"운조루의" 문화재적 가치가 알려지면서 수십 차례 도둑과 강도가 들어 가보를 비롯한

 

소장품들을 강탈해갔다. 위의 ‘오미동가도’도 절취당해 복사본만 남아 있다

사랑채 건축에서 기단이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 않다.누마루는 건축적으로 운조루 전체 건축의 중심이다

 

누마루는 높은 기단 덕분에 풍경을 들일 수 있고, 집에 들어서는 이는 넓은 기단 덕에  자칫 사랑채가 주는

 

긴장감을 해소할 수 있다

사랑채

.
높이를 강조하는 영남 한옥과 개방감을 강조하는 호남 한옥이 운조루에서 만나는 부분이다. 

류이주는 대지의 남쪽과 중앙에 긴 행랑을 직각으로 설계했다. 남쪽 행랑은 집의 안과 밖을 구별하며,

중앙 행랑은 
남자와 여자의 영역을 구획한다. 남자 영역은 바깥사랑마당을 중심으로, 여자 영역은

안마당과 안사랑마당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주인들의 영역 뒤로는 나뭇간과 우물 등 작업 영역이 위치하고

, 집의 동쪽 뒤 양지바른 곳에 
사당을 두어 조상의 영역을 마련했다. 매우 조직적이고 합리적인 설계였다

안채

 

운조루의 안채는 사랑채와 사이에 있는 중문간을 통하여 진입할 수 있다. 안방 위에는 골방이 있고

 

그 위로는 다락을 두었는데 좌측 채와 우측 채 모두 상부에 다락이 있다. 이렇게 다락을 두어층을 구성하는

 

수법은 경북의 예천권씨 종가나 의성김씨 종가처럼  경상북도 가옥에서 주로 볼 수 있는데 서측 

 

다락은 사랑뒷마당으로 오를 수 있는데 남단 벽에는 원래 가로로 누워진 띠살 들창문이 달려 있어서

 

과거 남성들에 의해 통제된 젊은 여성들이 사랑마당을 오가는 남성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

 

이다.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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