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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朝鮮

(낙랑) 평양 낙랑은 한낙랑군 이전에 이미 있었다.

작성자心濟|작성시간15.10.17|조회수790 목록 댓글 0

 

평양 낙랑유물 주체에 대한 2가지 假設. 

 

 현재 평양 낙랑지역에서는 전한시대부터 후한을 거쳐 위진시대 까지의 지표 유물이 발굴되며 이 때문에 여러 역사적 논란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일본이 1911년부터 시작한 현 평양 낙랑구에서 발굴 결과를 한사군 낙랑지로 유도하고, 중국학계에서는 일본의 평양 한사군 낙랑군설을 그대로 인용 그들의 역사지도에 한사군이 황해도 수안, 이제는 평택까지 그려 놓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으며 사학계에서는 일본,중국주장 그대로  미국의회에 한반도 한사군 인정문서를 보내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전-후한서를 뜯어보면 요동반도 서북부의 칠로도산 동쪽으로는 한사군의 영향이 미치지 않았음이 문헌적으로 확인된다. 前代사가들의 지리비정 오류로 인해 한사군이 한반도로 깊숙히 들어와 있다고 판단된다.

 평양의 낙랑지역에서 발굴되는 유물들로 보면 한,위-진등 고대 중국왕조와 정치적 교류와 무역등이 서로 교류되었음을 인지하게 되며 직접적 전쟁과는 개연성이 적은것으로 보인다. 전한시기와 위만조선의 멸망이후 조선유민들과 후한시기 동이계열 인물들의 귀환지로 보이는 것이다. 

 

 

 그 사서문헌적 기록을 제시한다.    

 

가설1. 고조선계열 反漢 세력가의 망명.

 

후한서 권1

 

建武六年(30), 樂浪人王調據郡不服.,遣樂浪太守王遵擊之,郡吏殺調降.秋九月庚子赦樂浪謀反大逆殊死已下丙寅晦日有食之

낙랑인 왕조가 군에 근거하며 복종하지 않아 가을 낙랑태수 왕준을 보내 물리치고 군의 관리가 왕조를 죽이고 항복하였다. 가을9월에 낙랑이 반역하여 모반한 죄인은 죽이고 그 아래는 죄를 사면했다.

 

後漢書 卷七十六 循吏列傳 第六十六  

王景字仲通樂浪邯人也[]八世祖仲本琅邪不其人好道術明天文

諸呂作亂齊哀王襄謀發兵而數問於仲及濟北王興居反欲委兵師仲[]  仲懼禍及乃浮海東奔樂浪山中因而家焉父閎為郡三老更始敗土人王調殺郡守劉憲自稱大將軍樂浪太守建武六年光武遣太守王遵將兵擊之至遼東閎與郡決曹史楊邑等共殺調迎遵皆封為列侯閎獨讓爵帝奇而征之道病卒。  

[]音諾甘反邯音下甘反縣名[]襄及興居並高祖孫齊悼惠王肥之子也.

왕경의 자는 중통이다. 낙랑 담한 사람이다. 그의 8대조 중은 낭야 불기현 사람으로 도술을 좋아하고 천문에 밝았다. 여씨가 난을 일으키자 제애왕 양이 군사를 일으키려 모의하고 여러번 왕중에게 물었다. 또 제북왕 흥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왕중에게 군사를 맏기려 하였는데 왕중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바다의 동쪽인 낙랑 산속으로 달아나 가족을 이루고 살았다. 그의 아버지 왕굉은 군의 삼로가 되었다. 갱시가 패하자 토착인 왕조가 낙랑군수 유헌을 죽이고 스스로 대장군 낙랑태수라 하였다. 건무6(30) 광무제가 태수왕준과 장수를 보내 쳤다. 요동에 이르자 왕굉이 군결조사 양읍과 함께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았다. 모두 열후에 봉작되었는데 왕굉만이 홀로 작위를 사양하였다. 광무제가 기특하게 여겨 불렀으나 오는 도중에 죽었다.

 

왕경의 아버지인 왕굉,그의 7대조가 되는 왕중은 본래 산동 낭야인으로 제북왕 흥거의 반란사건에 연루되는 것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도망가 낙랑의 산중에 집안을 이루고 살았다는 내용으로 이 사건은 전한 문제 3년 즉 기원전 178년 가을의 사건이다.

 

漢書 卷27中之上 五行志 第7中之上

文帝三年秋天下旱是歲夏匈奴右賢王寇侵上郡詔丞相灌嬰發車騎士八萬五千人詣高奴擊右賢王走出塞其秋濟北王興居反使大將軍討之皆伏誅

가을 제북왕 흥거가 반란을 일으켜 대장군을 보내 토벌했다 모두 주살했다.

 

이 사건은 한 낙랑군이 설치되기 70년전의 일로서 낙랑군이 설치된 지역과 다른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즉 한반도의 평양지역으로 추정 할 수 있다.

 

 

가설2. 위만조선인 왕협(王㽠) 세력의 망명.

 

  B.C108년 한무제에 의해서 위만조선이 멸망할 때 망국에 합세한 한족계열로 알려진 장군 왕협(王硤)이 그 공로로  평주후로 봉해지고 현 산동지방에서 봉지를 받은 후 그 지역의 토호가 된 왕씨(王氏)일족이 이후 한나라의 견제에 의해 피신 도해(渡海)하여 이룬 2차 망명지 아니었나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사기에는 위만조선을 배반하고 한(漢)에 귀부한 5대신들이 전부 일찍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한나라 조정에서는 이후 이들에 대한 견제와 정치적 압력이 심했을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특히 평주후 왕협에게 자식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 또한 고전적 정치적 술사로 망명 또는 살해의 의구심을 자아낸다. 고낭야지역에 살던 왕중과 왕협 모두 고조선인 계열로 추정되어 이들의 운신은 고조선 지역과 토착 고조선인 세력 관계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심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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