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죽이 은나라 탕왕(湯王:BC1617~BC1588)때 제후국으로 책봉되었다는 기록에 의하면 고죽국이 그 이전인 요,순시대에도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죽국은 하·은등의 나라들과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해오다가 하,은을 멸망시킨 주나라에 의한 질서하에서 조선주민을 중국인들과 구별하고 박해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갈등관계가 시작되었다.
주나라 초기에 고죽군(孤竹君)의 아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주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하여 수양산(산서 中條山 추정)에 들어가 고사리를 먹으며 살았다는 고사가 유명하다.
이로부터 2세기후의 공자도 그의 논어·상서에서 백이·숙제를 모범이 되는 위인으로 칭송한 것으로 보아도 고죽국이 당시 도덕적 기반이 갖추어진 문명국이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그러나 어지러운 춘추시대에 접어들면서 제환공이 산융에 의한 제와 연나라 공격에 대응하여 BC663년 산융과 영지를 공격하고 아울러 고죽국을 크게 패퇴시켰다.
당시 고죽국 군주는 타리가(答里呵)로 이름 끝의 가(呵)는 고조선의 지방제후 지위로 부여·고구려의 5가(加)와 같은 성격과 같으며 부족이름으로 보면 될 듯하다.
당시 고죽국 왕이름 답리가(다리가,Tari-ga)는 논형(論衡)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전신 탁리국(橐離國)의 탁리(Tari)와 동일계통인 타리족의 일부로 부여족 가운데서도 가장 강성했던 왕족이었으며 이들은 부여를 고조선 후국에서 독립시켜 대부여국으로 발전시킨 왕족이었다.
또한 당나라 태종때 학자 공영달(孔穎達:574~648)은 일주서를 해석하면서 주소(注疏)를 붙이고 고죽을 불령지・불도하・산융과 함께 동북이(東北夷)즉 산융으로 규정하였기 때문에 고조선이라고 보면 될듯하다.
이후 대부분 중국왕조 학자들은 고죽에 대하여 고조선의 일종으로 그 후국(侯國)으로 분류하였으며 신채호 역시 백이·숙제가 조선종(朝鮮種)이라고 정의하였다. 고죽국은 중원왕조에서 고조선으로 무역을 하거나 전쟁을 수행할 때 통과하여야 하는 변경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고조선 중심부가 약할 때 그 제후국을 먼저 침노하는 구실이 되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우리나라 기록인 삼국유사에서 수서 배구전 기록을 인용해 고죽국을 고구려의 전신으로 보았다. 물론 삼국유사의 내용과는 별개의 연구결과이지만 고죽의 어원적 분석을 통해 고죽의 옛중어음가(中古語音)가 쿠추(Kutsu)로서 후대에 성립된 고구려왕족인 고추가(古鄒加)의 음가 쿠추(Kutsu)와 동일하므로 고죽국이 고구려의 전신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한다.
고죽국은 전고조선기에 서남방으로 진출하면서 고조선 이주민들이 황하지방에 정착한 BC21~17세기경 고추가를 파견하여 세운 고조선 후국(侯國)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전고조선이 상.주시대 이후 와해되면서 열국으로 분리되자 고죽국은 이후 하남과 산서남부에서 활동하다가 일부는 동북으로 귀환하여 대릉하 상류의 조양지구에서 청동문화를 남겼으며 조양(朝陽)지구가 고죽국의 속지로 BC3세기까지 고죽국 통치아래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73년 중국 요녕성 객좌현(客佐) 북동촌(北洞村) 고산(孤山)에서 고죽이라는 명문이 있는 은나라 말기의 청동으로 만든 제사용기와 대릉하 지역에서 기후라는 명문이 있는 청동기가 발견됨으로써 그 지리적 위치가 확인되었다고 하나 기후(箕侯)라는 글자는 갑골문이나 금문에 자주 보이고 기후 명문이 있는 청동기는 산동지방이나 하남 안양·낙양에서도 많이 발굴되었기 때문에 기후 명문 청동기만으로 요녕 지역을 고죽국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이형구는 그의 고고학 결과로서 은말·주초의 청동기가 북경과 요녕을 중심으로 발굴되기 때문에 BC12~BC10세기 사이 은나라가 주나라의 세력에 밀리면서 그 중심세력이 동북으로 이동하며 발해만 연안에 남긴 유물로 추정하고 BC9~BC7세기경 남산근(南山根)문화를 이룩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의견은 중국의 궈따순(郭大順)의 주장인 상왕조 동북귀환설과 견해가 일치하는 부분이다.
고죽에 대한 중국내 유적위치는 두 곳으로 한곳은 대표적인 하북 노룡현이며 다른 한곳은 산서성 운성시(雲城)이다.
당나라때 제상을 지낸 두우(杜佑:735∼812)가 편찬한 통전(通典) 북평군 평주조에서 평주는 지금의 노룡현(盧龍縣)으로 은(殷)시대에는 고죽국, 춘추시대에는 산융(山戎)과 비자(肥子)국이었고 지금의 노룡현에는 옛 고죽성(故孤竹城)이 있는데 백이(白夷)・숙제(叔弟)의 나라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숙신, 산융과 함께 역사가 오래된 고죽국 역시 그 연원적 흔적을 남기고 있다. 즉 주나라 초기인 BC11세기이후 춘추시대 다섯 패자 중에 하나였던 제나라 연합군에 의해 BC663년에 크게 패하기까지 5백여년간 황하변에 존재했던 고죽국의 유적이 산서 운성시에 남아있는 백이숙제 무덤으로 상징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사기를 해석한 집해에서 고죽국은 요서군 영지에 있다고 하였고 이후 정의괄지지에 고죽 옛성이 평주 노룡현(盧龍縣)에 있다고 하여 후대 학자들 사이에서도 고죽국의 위치가 요서와 요동설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곧 요서(遼西)의 위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시대에 따른 변이가 있었음에도 당시 요동지인 하북 노룡현으로 후대에 귀착된 것이다.
이처럼 고죽국은 상·주이후 후고조선 열국중에 하나로 고조선연맹의 서쪽을 맡은 후국(侯國)역할을 수행한 나라로 발달된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한 강력한 기마 군사력 및 8조법금등의 법치제도와 예의가 지켜지며 예악이 발달하여 주례(周禮) 춘관종백(春官宗伯)편에 기록될 정도였다.
진개(秦開)가 동정을 실행하기전 연나라가 소진의 합종설을 받아들이고 연합한 이유중의 하나도 흉노의 발호와 강력한 북방왕조의 견제가 목적이었을 것이다. 당시 연은 갑병이 수십만,전차 6백승,기병이 6천필로 이에 대항하는 조선도 비슷한 국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고죽국은 BC7세경에 망한것이 아니라 BC3C초 진개가 조선 침공시 멸망하였는데 바로 후에 동호(東胡)가 반격하여 회복했으나, 고죽의 본래 영지는 회복하지 못하고 BC206년경에 산융이 동호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고죽의 영주(榮州)지역은 다시 산융의 영지가 되었다고 하였다.
후고조선 국가로 황하변에 있었던 고죽국은 당시 하남 신향현(新鄕縣)을 중심으로 하던 제나라 연합국 공격을 받고 그 주력이 북쪽 발해만 유역으로 이동한 동북귀환 이후 옛땅을 수복하려는 부여와 고구려의 노력은 남북조의 팽창과 수·당의 영역확장에 의해 다시 축출과정을 거치며 원래 지명이 동북으로 이식된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살펴보아야 할 춘추시대 나라중에 하나가 중산국(中山國)이다. 이 나라는 이족(夷族)으로 분류되어 왔는데 제(齊)나라 환공에 의해 망했다는 고죽국 구성원의 일부가 동북으로 이동하여 나라를 다시 세운것 아닌가하는 것이다. 백적(白狄) 선우부(鮮虞部)가 태행의 서쪽에 있다가 무공(武公:재위BC414~BC406)이 사람들을 인솔하여 태행산맥을 넘어 석가장(石家庄)을 지나 하북 중부인 평산현 영수(靈壽)로 이주하여 BC414년 중산국이라고 하였으며 이후 백적 선우부의 제후국이 되었다고 사기 조세가(趙世家)에서 밝히고 있다. 선우라는 말이 산융족의 리더라는 뜻이 있어서 철륵 같은 산융 민족등이 이에서 파생되기도 하였다.
BC408년부터 3년간 위(魏)나라왕 문후는 중산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나 BC380년 환공(桓公)이 즉위하고 중산국은 재건된다.
BC369년에서 BC314년 사이에 중산국은 조나라와의 국경에 장성을 쌓고 제나라와 연합하여 조와 연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이때 나라가 거의 망할 위기에 처하자 조나라 무령왕이 흉노로부터 습득한 기병에 의한 기마전술을 이용 군제(軍制)를 강화한 후 중산국(中山國)을 공격하여 멸망시킨다.
제나라는 이후 산동 임치(臨淄)로 이동하고 노나라 역시 산동 곡부(曲阜)로 이동한 것이 중국사회과학원지도 춘추시대편에 나와 있다.
청나라때 제작된 대청광여도에 고죽이 산서성 해현(解縣)으로 표기되어 있음은 적어도 초기 고죽국의 무대가 그곳임을 암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제나라는 이후 산동 임치로 이동하고 노나라 역시 산동 곡부로 이동한 것이 중국사회과학원지도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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