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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朝鮮

☞ <위만조선>을 팔아먹은 후예들의 종말.

작성자心濟|작성시간08.04.13|조회수484 목록 댓글 3



1.내부분열로 조선을 망하게한 사람들의 末路.

 

서토족들은 역사의 중요 분기점으로 보았을 때 참으로 운이 좋았던 민족이었다.

고조선이 와해되어 위만조선을 치려했던 서한(전한)의 6장수들은 朝鮮 공격후 모두 참수 혹은 기시형을 당했음에도 조선의 대신들의 분열로 땅을 넓힐 수 있었고 고구려가 망할즈음 당의 공격에서라기 보다 고위층의 분열로 당에 투항 스스로 성문을 열어주어 대륙북쪽. 동변의 땅들을 힘 안들이고 차지할 수 있었으며 원말시기에 서역이 그랬고 오랑캐라 업신여겼던 한족이 누루하치 청의 끝없는 영토 확대전에 힘입어 운남성,티벳,신강,,만주까지 1,100만 평방킬로미터의 거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고 1920년대에 제정러시아에 몽골영토를 떼어줌으로서 21세기 까지 세게3위의 영토대국을 유지하고 있다. 이 얼마나 손안대고 코풀기했던 운 좋은 국가 였던가?

 

사기및 한서에 서술된 위만조선(고조선의 서쪽변방 제후국)을 와해시킨 조선의 배신자 니계상 참, 장군 왕겹, 우거왕의 아들 장항, 노인의 아들 최등...은 한의 작은 食邑을 받고 산동에서 발해에 이르는 제후에 봉해졌는데 누선장군등 조선을 공격했던 장군들은 모두 처벌을 받았는데 누가 이긴 전쟁인가?

 

 

 coo2.net의 그림발췌, 온양후의 지역은 추저후 죄측이다.

 

1)니계상 참이 봉해진 지역은 <사기집해>에 의하면 산동반도 지역이다.

 

2)한음이 봉해진 지역은 발해에 봉해졌다.

 

3)왕겹이 봉해진 지역은 평주지역으로 사수현으로 산동의 연주지역이다.

 

4)장항이 봉해진 지역은 冀로 하동에 속해있다 하였다.

 

5)최가 봉해진 지역은 溫陽지역으로 산동반도지역이다.

 

결국 전한은 이때 까지도 발해 및 산동반도 해안을 점령하지 못했음을 대변해준다.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항복한 지역을 제후에게 封地로 주는 관례가 있기 때문이다.

 

李陵장군을 옹호하다 한나라에 의해 宮刑(생식기 제거형)에 처해졌던 사마천으로서는 한나라가 패전했다고 기술했다가는 어떤 위험이 조정으로부터 내려질지 몰라 “양군이 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열후에 봉해진 자가 없었다“라고 한군의 패배를 우회적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전통적인 중국인의 병술인 한나라의 이간책과 우거왕의 왕권강화가 조선의 분열과 멸망을 가져왔다.

 

漢書17권등에 단서가 있는데 <경무소선원성공신표 5 >등에 기록되어 있는데

 

平州侯로 봉해진 王唊은 한서의 연표에 따르면 1,480호로서 그다지 크다고 볼수 없다.

사기에는 그가 제후가 된 이유에 대해 조선장수로서 한나라 병사가 쳐들어오자 항복한 공이라 적고 있고 기원전 108년 4월 봉후가 되었으나 이듬해 사망하였고 후사가 없었다 기록하고 있다.

 

荻菹侯 漢陰에 대해서는 그 공이 조선의 재상이자 장군으로서 한나라 병사가 포위하자 항복한것이고 받은 식읍은 540호에 지나지 않았다.기원전 108년에 봉읍을 받고 17년간 다스리다가 기원전 91년에 죽었는데 한서역시 그가 후사가 없었다 기록하고 있다.

 

溫陽侯 崔도 마찬가지로 한서에는 (열양강후 최)로 기록되어 잇으며 朝鮮相 路人의 아들이다.

노인은 한나라가 쳐들어오자 가장 먼저 항복했는데 도중에 죽어 그 아들이 물려받은 것이다.그는 지금의 산동성 南陽郡 涅陽縣 에 제수 되었는데 서기전 107년에 임명되었다가 103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며 마찬가지로 후사가 없이 죽었으며 그의 侯國도 없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홰청후 尼契相 參에대한 기록은 더욱 의문이다.홰청역시 산동반도 지역으로 위만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투항한 공으로 식읍1천호를 받았다고 사기에 적고 있는데 서기전 108년에 봉읍되어기원전 99년에 죽었는데 사인은 病死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의 달아난 포로를 숨긴죄로 하옥되어 옥사하였던 것이다. 제후로 봉한 인물을 옥사시켰다면 단순한 죄라기 보다는 부흥운동 역모죄로 인해 태형또는 장형을 당했을 가능성이 많다.

 

우거왕의 아들 張降은 하동에 속해있는 其지역에 제후로 봉해진후 조선의 왕자로서 한나라가 포위하자 항복한 인물이다.기원전 107년3월 봉후되어 기원전 105년에 사망한다. 나라를 들어 바친후 겨우 2년을 더살다 죽었다. 한서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인으로 하여금 모반케 했다가 맞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고조선 부흥운동은 한나라가 제압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원래 고조선 지역인 하북,산서,내몽고.몽골지역에서 고조선이 분리된 열국 부여,고구려,백제,신라등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한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오래살지도 못하고 조선의 부흥운동에 두려움을 느낀 漢나라에 의해 가족들도 전부 살해 당했다는 결과이다.

 

2. 수양제의 침공로에도 한사군이 나오는데...

 

한나라가 설치햇다는 한사군은 한국사학계에서만 주장하는 이론이다.

 

한서,사기등에는 한3군,한4군등으로 ,당서에는 2군으로 기록되어 잇는데 유독 원전에 없는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한국고고사학계는 한국의 자살률 세계1위의 현실에 동참하는게 어떨까?.

수양제는 고구려를 침공하기위해 612년 국경북부 涿郡 臨朔宮에서 112만 대군을 좌군12군,우군12군으로 나누어 평양성 (평남 대동강유역이 아님,산서성 임분추정 )에 모이게 하는데 진격로에 한사군의 이름이 나온다.

 

수서 <양제본기>에 좌군의 7군은 요동도를 거쳐 제8군은 현토도,제9군은 부여도 제10군은 조선도,제12군은 낙랑도 평양으로 집결하라 되어 있다. 제4군은 임둔도, 제11군은 대방도를 거쳐 평양으로 집결한다고 되어 있다.수나라 양제가 정해준 진격로에는 현도 ,낙랑,임둔이 등장하고 있다.좌군 12군은 낙랑을 거쳐 평양으로 집결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만약,낙랑이 대동강 유역 평양이라면 탁군에서 낙랑(평양)을 거쳐 다시 평양으로 집결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탁군에서 현도,임둔,대방을 거쳐 평양으로 집결해야하는 다른 軍들도 모순이 발생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도불원인 씀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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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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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뿌리기 | 작성시간 07.05.08 우리의 고토는 대륙인데 반도의 증거만 역사로 봤던 사학계가 원망스럽습니다 우리는 우수한민족입니다 후기오랜기간 우리를 팔아먹는 자긍심과 자존심을 상실한 저만 살기위한 간신 지방정권들이 민족을 망치고 연방정부 대국인 우리를 망쳤습니다 이제 서서히 본질회복한 모습이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 작성자도불원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05.09 저도 책방에 자주들리는 축에 속하지만 역사책의 흐름이 그렇게 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 작성자조약돌 사랑 | 작성시간 11.07.25 그러니 저놈 중국놈들은 떼거지 레서 떼국놈 이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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