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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朝鮮

시대에 따른 갈석의 이동 변화.

작성자文古里|작성시간20.01.22|조회수267 목록 댓글 0

갈석과 발해는 춘추전국시대 이전 부터 중국왕조와 동이왕조의 경계를 구분짓는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모든 전쟁이 이곳을 기준으로 벌어졌다,

우리역사계는 고조선을 비롯한 고구려를 포함한 역사를 해석할 때 Milestone 갈석이 시대에 따라서 변화하지 않고 고정된 것으로 인식하고 그 강역을 해석해왔다.

이결과 고조선 고죽국부터 고구려까지 지금의 난하를 넘지 못한 것으로 그려놓고 교과서부터 시작해서 각종 논문까지 심지어 북한학자 이지린 까지 그렇게 그려놓았다. 추측컨데 이지린도 공부를 많이하여 고조선이 황하 이북에 있었다는것을 알았겠지만 학위 목줄을 쥐고 있는 지도교수 고힐강에게 칼날을 들이대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1965년 발표한 이지린의 학설을 1974년이후 그대로 베껴 민족사학의 대표가된 윤내현 역시 갈석을 지금의 영평부 진황도로 보고 고조선강역을 그려놓았다.



이것은 사실일까?

그림에 순서를 배열하여 그 시대별 이동과정을 설명하기로한다.



(1) 춘추전국~전한의 갈석
<사기>와 <한서>등을 보면 춘추시대 이전의 갈석은 산서성 남부 삼문협이 있는 황하구에 있었고 하남성 회경부 즉 하남 심양현에 있었다. 위만이 연나라에서 조선으로 도망올때 건넌강 패수(浿水)가 제수(濟水)로 제원시에 남아있고 90년후 한무제가 우거조선을 치러갈때 제수군과 육군을 동원하여 이쪽을 지나 요동지인 하북성 북쪽에서 전쟁을 치렀다.

(2) 조위~수나라까지의 갈석
<후한서>와 <진서> 및 <북위서><수서> 등을 확인하면 우거조선이 망하고 하남 북쪽땅이 한나라에게 점령당하고 요동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가 북위때까지 고구려와 국경의 이동이 있었지만 남북조가 망할때 갈석은 하북 보정시 동쪽에 있었다. 당시 보정 동부 문안 부근에 황하(일명 북해)가 흘렀다.
좌우갈석의 논란이 당나라에서 있었는데 좌갈석이 고구려땅에 있다고 했다. 수양제가 발해와 갈석에 들려 요와 예의 땅을 침범하고 있는 고구려를 정벌한다고 선전 포고한 곳이 하북 중남부 보정 부근 이었다.


(3) 당나라 이후의 갈석
<구당서><신당서>등을 참고하면 수당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고구려의 최전선 경계가 하북 북부로 이동되었는데 이곳에 등장하는 갈석이 현재 진황도시에 있는 갈석이다. 당나라 이후 이곳을 춘추전국 이후의 갈석으로 고정시켜서 지금까지 그렇게 인식되고 있다. 결국 당.송사가가 그렇게 만든것이다.


(4) 송나라 이후 갈석
<오대사>및 <송서>그리고 <요사>등을 보면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여 요하 동쪽으로 밀어내고 고구려가 멸망하자 발해와 고려가 요동반도에서 개국했다. 당나라 이후 요서로 옮겨진 갈석이 다시 지금의 요녕성 금주지역으로 옮겨져 불려졌다.


춘추전국시대부터 당대 이전까지의 갈석을 품은 내륙호수 발해는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현재 산동과 하남에 걸쳐 남아있는 남양호이다. 당나라 이전 까지 만해도 발해는 동서3백리의 거대한 호수였다.(중공지리학자 축가정 논문 참고)


한무제가 우거조선을 침공할때 제(齊)수군이 내륙호수 발해로 나와 하북에 북경 동쪽에 있던 왕검성을 쳤다.

202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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