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백 우사 운사(雲師).
단군왕검 백익 살해 사건은 여러번 설명 했다. 그와 같이 북쪽(홍산문화권)에서 3000명을 인솔하고 내려온 “將風伯雨師雲師”에 관해 알아 본다. 이 세 이름은 치우천왕과 황제의 탁록전을 비롯한 여러 사건에 나타난다.
치우가 싸운 곳은 태행산맥 서쪽, 옛 구주 땅 기주(冀州之野)라 했다.
황제가 용의 계책에 따라 물을 축적(應龍畜水)하여 이겼다. 삼황오제 시절의 전쟁 “昔者神農伐補遂, 黃帝伐涿鹿而禽蚩尤, 堯伐驩兜,舜伐三苗, 禹伐共工” 은 모두 옛 구주땅에서 나타났다.
산해경에는 조선이란 글자와 운사첩(雨師妾)이란 글자가 있고, 조선과 기자란 글자가 보이는 <초씨역림>에 우사취부“雨師娶婦”란 문구가 이다. 다른 두 사람은 몰라도, 우사는 분명 연인 또는 부인이 있었다.
우사를 강수가 분수와 이어지는 계곡의 치수사업과 관계가 있다 하여 우가 공공(共工)을 벌했다고 했다. 우(禹)가 방풍씨(殺防風氏)를 죽였다는 예기는 선진문헌 여러 곳에 실렸다. 방풍씨를 <산해경> 해외북경에 상유(禹殺相柳) 라고 했다. 방풍씨를 치수사업을 하던 공공의 신하 (共工之臣曰相柳氏)라고 했다. 분수가 강수와 만나는 곳이 백의민족의 본향이다.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 기원전179年-122年)이 편찬한 도가사상의 성격을 지닌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는 이들 세 신하에 관한 설명이 있다 . 백익(河伯)이 치수사업을 총 지휘하던 시절에 두 지도자 (二皇得道之柄,立於中央)가 나타났다. 빙이(馮夷) 즉 하백이 지도권을 잡고 (大丙之御) 잘 나가던 때에 풍흥운승(風興雲蒸)이라, 즉 폭풍이 일어났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설명 한다는 뜻의 남명훈 (覧冥訓) 에는, 풍백과 운사에 관한 설명은 모호 하나, 우사(雨師)를 잘 설명 했다. 전설적인 궁수 후예(后羿 yi;窮后羿)다. 백익을 도았던 우사(雨師)의 다른 이름이다. 병풍 병자에 해(백익, 왕중왕)를 보호 했다는 뜻의 일산(日傘) 예(翳)자를 붙여 병예 (屛翳)라고 했다 . 우사(雨師)가 앞서 설명한 견우 직녀(牽牛 織女) 설화에 등장한 궁수 후예(后羿 yi)다.
<초씨역림>에는 아닐 부자 부의 (否之)편에 부자가 진시황의 선조와 관계가 있다(號曰始皇)고 했다. 가인(家人)에는 “雲過吾西;風伯雨師,與我無恩”란 문구가 있다. 훈역하면 “운은 떠나 우리들의 서쪽, 풍백과 우사는 나와 같이 천은이 없구나” 라는 뜻이다. 고조선의 수도 평양에서 운사는 서쪽 진시황(秦始皇)의 선조나라 영역으로 갔다. 하동에 남아 있던 백익의 종말을 서술 했다. 이문구를 보면 초씨역림은 진시황 이후에 보충 되었다.
우사(雨師)가 햇님 같이 높으신 지도자 백익을 보호하다 죽었다 하여 병예 (屛翳)라고 했다. 그러나 풍백과 운사(雲師)가 누구인가는 분명치 않다
다른 중국문헌에는 풍백(風伯)을 비렴(飛廉, 蜚廉)으로 진시황의 먼 선조라 했다 . 초씨역림에 실린 내용과 같다. <강희자전>에는 비렴운사(飛廉雲師)라 했다. 또한 <좌전> 내용을 인용하여 전설적 오제의 보좌관을 雲사, 火사, 水사, 龍사, 烏師 등의 이름을 붙였다. 황제에 우름운자 운사를 붙였다. 소호 금천씨(少昊金天氏)를 황제의 후손이라 했다. 각종 유가 경전에는 운사를 황제와 관련 시켰다 .
한무제 이전에 가의(賈誼, 기원전 200년 ~ 기원전 168년)가 남긴 신서(新書)에 백익의 땅이란 뜻의 익양(益壤)에 동생 염제와 형 황제가 탁록에서 싸웠다 . 염제(炎帝)는 부싯돌을 이용하여 불을 사용한 수신으로 고구려 개천절 행사 동명에 나오는 수신의 어원이다 .
두 세력이 싸웠던 지역에 伊水 또는 떠러질 낙 낙수(洛水) 가 있었다. 풀초 자를 더하 낙수(落水)가 함곡관 동쪽 낙양(落陽, 洛陽)에 나타났다.
우사(雨師)를 병풍 병자와 햇볓을 막는 양산이란 뜻의 글자를 모아 병예 (屛翳)라 했다. 우사가 끝까지 백익을 보호하다 융우에게 살해 당했다 .
끝
모솔 이돈성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