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漢書卷八十五 東夷列傳 第七十五
高句驪,...句驪一名貊*(耳)*。有別種,依小水為居,因名曰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
是也。
[一]
注[一]魏氏春秋曰:「遼東郡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驪別種因名之小水貊。」
王莽初,發句驪兵以伐匈奴,其人不欲行,強迫遣之,皆亡出塞為寇盜。
遼西大尹田譚追擊,戰死。
莽令其將嚴尤擊之,誘句驪侯騶入塞,斬之,傳首長安。
신나라 왕망초,구려가 병사를 일으켜 흉노를 정벌하였다, 사람들이 움직이려하지않아
윽박질러 내보내었다. 도망자들이 요새를 빠져나와 노략질했다.
요서대윤 전담이 쫒아와 격퇴하다가 전사하였다.
왕망이 그장군을 죽인 무리를 엄하게 다스리라 명하니, 구려후를 유인하여 요새로
들어오게 하여 참하고, 머리를 장안에 전하었다.
貢,光武復其王號。二十三年冬,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內屬。二十五年
春,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皆復款塞。
왕망이 맥인이 변경을 자주노략질하매 고구려왕을 하구려후(고구려의 비하)라 고쳤다.
한 건무8년 고구려가 사절을보내 조공했다.
광무때에 하구려를 고구려라 다시 고쳤다. 23년겨울 고구려 잠지락대가 재승 등 만여구가 낙랑에
내속하였다.
25년 봄,구려가 우북평(북평의 지명 위치 조작),어양,상곡,태원등을 노략질 했으나 ,
요동태수 제융이 은혜와 믿음으로 대하였다. 모두 다시 요새로 돌아갔다.
모본왕이 공격한 루트는 분명히 북평으로 우북평은 후대에 북평(하북서 ,산서동)을 친것이
망신스러워 후대사가들이 의도적으로 지역명을 기만하기위해 우북평(하북중간)으로 개작했다.
사무불통님 댓글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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