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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선비의 한반도 강습 (한반도 정세 대변동)

작성자心濟|작성시간17.04.30|조회수463 목록 댓글 0


운영자는 부여의 후신인 선비의 모용황군대가 한반도의 남부를 점령하고 신라의 선대왕대를 끊고 경주김씨의 왕계를 만들었으며, 백제의 왕계(문주왕~동성왕)까지 만들었다고  저서에서 주장한바 있다. 이러한 주장은 서지학적으로 고고유물학적으로 충분히 입증이 가능한 것으로 본다.  


선비가 강성한 1~2세기에서 적어도 4세기까지 기록과 유물전개 시기가 일치한다 .  


慕容氏 =牟氏 =慕氏 =毋氏=末氏  (變姓)   


삼국사기18 髙句麗本紀 6  

고국원왕

十二年 春二月 修葺丸都城又築國內城. 秋八月 移居丸都城,冬十月 燕王皝遷都龍城立威將軍翰請先取高句麗 後滅宇文,然後中原可圖 高句麗有二道 其北道平闊 南道險狹 衆欲從北道 翰曰虜以常情料之.必謂大軍從北道 當重北而輕南 王宜帥銳兵 從南道擊之 出其不意 丸都不足取也 別遣偏師 出北道 縱有蹉跌 ,其腹心已潰 四支無能爲也皝從之.

十一月 皝自將勁兵四萬,出南道 以慕容翰·慕容覇爲前鋒 別遣長史王㝢等,將兵萬五千 出北道以來侵 王遣弟武 帥精兵五萬 拒北道 自帥羸兵 以備南道 .慕容翰等先至戰 皝以大衆繼之.我兵大敗 左長史韓壽斬我將阿佛和度加 諸軍乘勝 遂入丸都 王單騎走入斷熊谷 ,將軍慕輿埿 追獲王母周氏及王妃而歸王遇等戰於北道 皆敗沒,由是 皝不復窮追 遣使招王 王不出 皝將還.韓壽曰 “高句麗之地 不可戍守 今其主亡民散 潛伏山谷 大軍旣去 必復鳩聚,收其餘燼 猶足爲患 請載其父尸 囚其生母而歸 俟其束身自歸 然後返之 .撫以恩信 策之上也皝從之.發美川王墓載其尸 收其府庫累世之寶,虜男女五萬餘口 燒其宮室 毁丸都城而還.

 11월에 모용황이 스스로 날랜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남도로 나와서, 모용한(慕容翰)모용패(慕容覇)를 선봉으로 삼고, 따로 장사(長史) 왕우(王㝢) 등을 보내 군사 15천 명을 거느리고 북도(北道)로 나와서 침략해 왔다. 왕은 아우 무()를 보내 정예군 5만 명을 거느리고 북도를 막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남도(南道)를 막았다. 모용한 등이 먼저 와서 싸우고 모용황이 대군을 이끌고 뒤이어 오니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가 우리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의 머리를 베니 여러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마침내 환도로 들어 왔다. 왕은 말 한 필을 몰고 도망가 단웅곡(斷熊谷)으로 들어갔다. 연나라 장군 모여니(慕輿埿)가 쫓아가 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비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이때, 연나라 왕우(王㝢) 등은 북도에서 싸우다가 모두 패하여 죽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 이사금

三十九年 宮井水暴溢

39(348) 궁궐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다.

(왕실에 변고가 생긴것으로 추정한다)


四十一年 春三月 鸛巢月城隅. 夏四月 大雨浹旬 平地水三四尺 .漂沒官私屋舍 山崩十三所

41(350) 3월에 황새가 월성 귀퉁이에 집을 지었다 .여름 4월에 큰비가 열흘 동안이나 내려 평지에 물이 서너 자나 되었고, 관청과 민가가 물에 잠기고 떠내려갔으며 산 13곳이 무너졌다.

(또 다른 이종세력이 왕실에 안착했음을 말한다.)


 나물 이사금

七年 夏四月 始祖廟庭樹連理.

 7(362) 여름 4월에 시조묘 뜰에 있는 나뭇가지가 다른 나뭇가지와 이어져 하나가 되었다.

(신라 정통왕계에 또 다른 세력이 들어와 기존세력을 뒤엎고 왕계를 형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수서(隋書)》46 東夷

新羅國,在高麗東南,居漢時樂浪之地,或稱斯.將毌丘儉討高麗,破之,奔沃.後復歸故國,留者遂為新羅.其人雜有華,高麗,濟之,有沃,不耐,獩之.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祚至金真平,開皇十四年,遣使貢方.祖拜真平為上開,浪郡,.先附庸於百,因百濟征高,麗人不堪戎,率歸,致強,襲百,庸於迦羅.其官有十七等:其一曰伊罰,如相國;次伊尺,,破彌,大阿尺,阿尺,乙吉,沙咄,及伏,大奈摩,,,,,,,.有郡.,兵同於中.人壯健者悉入,,,俱有屯管部.風俗,刑政,衣服,與高..正月旦相,設宴,賚群.日拜日月.八月十五,設樂,官人,以馬.有大,聚群官詳議而定.色尚.人辮發繞,雜彩及珠為.嫁之,酒食而,重隨貧.婚之,先拜舅,即拜.有棺,起墳.及父母妻子,服一.甚良,陸兼.,果菜,獸物產,略與華.業以,遣朝.羅地多山,與百濟構,濟亦不能圖.

위나라 장수 관구검(毌邱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자(244), 고구려왕(동천왕)이 옥저(沃沮)로 달아났다. 그 뒤에 다시 고구려왕이땅으로 돌아가자 따라가지 않고 그곳에 남아 있던 자들이 드디어 신라를 세웠다. 그러므로나라 사람 가운데는 중국인ㆍ고구려인ㆍ백제인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ㆍ불내(不耐)ㆍ예(穢)ㆍ한(韓)의 지역을 아울러 차지하였다. 신라왕은 본디 백제사람으로, 바다를 통해 도망가 신라로 들어가서나라의 왕이 되었다. 선대 때에는 백제의 부용국(附庸國)으로 있다가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할사람들이 군역(軍役)을 견디지 못하고 서로 이끌고 신라로 귀화함으로 인해 드디어 강국이 되었으며, 인하여 백제를 습격하였고, 가라국(迦羅國)을 부용국으로 삼았다.



내몽골 알선동에 새겨진 북위태무제의 축문기록.

 

선비족의 이동 1차 알선동에서 대동으로, 2차 대동에서 낙양으로.

 

부여선비족의 청동솥과 말안장 


동일형태의 청동말방울은 북방 부여선비족이 직접 한반도로 내려왔음을 말하는 증거가 된다.



통전 변방전1


,時新盧國,先本辰韓種.韓始有六,分為十,羅則其一.曰新盧,宋時曰新,曰斯.國在百濟東南五百餘,在高麗東,有漢時樂浪郡之.濱大.將毋丘儉討高,破之,.後復歸故,者遂為新羅,其人雜有華,高麗,濟之,有沃,不耐,,.王本百濟,海逃入新,王其.,能自通使.

신라는 위나라때 신로국으로 본시 진한 출신이다.진한은 본래 6나라가 있었는데 후에 12나라로 나뉘었는데 그 중의 한나라이다. 처음에 신로라 하였다. 송나라때(420~479) 신라, 혹 사라 였다. 그 나라는 백제의 동남5백여리 또는 고려 동남에 있으며 한나라 때 낙랑지 였다. 동으로 큰 바다와 접한다.  위나라 모구검이 고구려를 쳐부수자 옥저로 달아났는데 이후 복국 되자 남은자들이 신라로 갔다. 그 왕은 본래 백제인으로 바다로 도망가 신라로 들어가 왕이 되었는데 그 나라가 작아 스스로 사신을 보내지 못하였다. 


苻堅,王樓寒遣使衛頭朝.曰:「卿言海東之事與古不,也?」答曰:「亦猶中,代變,號改,焉得.梁武帝普通二,姓慕名,使人隨百濟獻方.俗呼城曰「健牟羅,邑在內曰「喙評,,.外曰「邑勒」,亦中國之言郡縣.有六喙,十二邑.地肥,植五,桑麻果菜鳥獸,物產略與華.

전진(前秦)부견(357∼385) 그 왕 한이 사신 위두를 보내 조공했다. 부견이 말하길경이 말하길 해동의 일들이 옛날과 다르다 했는데 어떤가?”하자 답하길역시 중국과 같이 시대에 따른 변혁이 있었고 나라이름 역시 쉽게 고치는데 지금과 같습니다하였다. 양무제 보통2(521)왕 모진이 처음으로 백제를 따라 사신을 보냈다. 세속에서 성을 건모라, 읍륵은 중국의 군현과 같은데 52읍륵이 있다. 토지는 비옥하며 가히 오곡을 심고 뽕,,과일,채소,조수 등이 중국과 같다.



운영자는 북에서 내려온 선비족 모용씨는 신라 왕실을 점거하고 법흥왕계를 만들었으며 나머지 세력이 가야를 만들고 일본으로 진출한다고 주장한다. 김해지역 고분을 보면 4세기경에 새로운 고분의 형태가 그 이전에 만들어진 고분 위에 만들어지고 있었음이 이를 방증한다. 


백제는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참살당한 후 대가 끊겼는데 문주왕부터 동성왕의 성인 모(牟)씨는 백제귀족에의해서 신라에서 초빙된 모씨 귀족이 백제왕의 자리에 올라 국가재건을 목표로 대리정치를 하였다고 보여진다. 그 증거가 3왕(문주-삼근-동성) 모두 백제 왕비귀족에게 용도 폐기 당하며,두번째 증거가 라-제 동맹이다.   


심제.


본인의 저서에 역사적 가설이 자세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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