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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모용씨의 경상남부,일본 진출.

작성자石柱齋|작성시간15.09.14|조회수518 목록 댓글 3

 

먼저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사건 발생의 시간순으로 나열합니다.


 

시기적으로 영가의 난(307~312)으로 인해 몰락한 西晉의 일부 선진 무장세력이거나  모용씨 계통이 한반도로 이주해 왔을 가능성이 있다.


 

 

 

고고학적으로 경남 김해지방에 출토되는 철기껴묻이가 된 속칭 가야고분들은 4-5세기 시대의 것으로 그이전 3세기이전의 고분을 파괴하고 다시 무덤떼를 조성한것이라고 한다. 이로서 4-5세기에 진입한 집단이 그 이전 거주 집단과 문화적으로도 다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6세기 법흥왕이후 과거 내물마립간때와는 다른 고대국가의 법령과 군비가 확장된 기록이 보인다.이는 鐵騎鉀 문화인 선비족의 군사 시스템이 이동,습합된 것과 유목문화에서 갖추지 못한 농경과 중앙집권적 정치문화 제도 결핍에 따른 행정체계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한 왕조 스스로의 자각과 노력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것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韓化된 모용계열의 신라,가야족이 일본열도 정복 후 일본열도와 그들의 친족이 남아있는 한반도 남부 출신으로서 그 연고권을 중국에 요청했던 역사적 사실을 숨기고 단지 倭로 왜곡시킨 것이다.  

 

 이 시기 이후 만들어진 일본열도의 고분과 부장품에서 갑작스럽고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데서 연유하는데 그것은 말과 철기,토기의 유입이었고 가야지역의 갑작스런 고분 양식의 변화와 거의 같았다.

 

 선비모용씨가 일본으로 넘어가 지도층이 된 후 위진남북조에 都督倭·百濟·新羅·任那·· 慕韓 六國諸軍事로서 대표되기를 요청하였으나 대륙연고 강력한 고구려,백제국이 있어 뜻대로 되지 아니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翰苑 蕃夷部

新羅

開源祏[], 肇基金水之年

括地志云, 案宋書, 元嘉中 (424~453) , 倭王彌, 自稱使持節, 都督倭·百濟·新羅·任那·· 慕韓 六國諸軍事, 此則新羅有國在晉·宋之間, 且晉····[?], ()並無正傳, 故其有國所由, 靡得詳也. 金水, ·宋之.

왜왕 미가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6국제군사안동대장국왜국왕으로 해주기를 청하다.

 

齊書云, 加羅國 三韓種也. 今訊新羅耆老云, 加羅·任那昔爲新羅所滅. 其故今並在國南七八百里, 此新羅有辰韓·卞辰卄四國, 及任那·加羅· 慕韓 之地也.

제서에서 전하길 가라구은 삼한의 종자이다,. 지금 신라의 기로들이 말하길 가라와 임나는 신라가 멸했다고한다. 그땅은 신라의 남쪽 7-8백리에 있다.이 신라에는 진한,변한24국 임나,가라,모한의 땅이다.

倭國

阿輩鷄彌, 自表天兒之稱

宋死弟. 宋書曰, 永初 (420~422) , 倭國有王曰讚. 至元嘉 (424~453) 中 讚死弟珎立, 自稱使時[]節都督安東大將軍倭國王. 順帝時, 遣使上表云, 自昔禰, 東征毛人五十五國, 西服衆夷六十六, 渡平海北九十五國. 今案, 其王姓阿每, 國號爲阿輩雞, 華言天兒也. 父子相傳王, 有宮女六七百人, 王長子[朱爵]哥彌多弗利, 華言太子.

자칭 사시절도독안동대장국왜국왕으로 하여 송 순제시(479)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다. 옛 비미호왕때 동으로 모인55국을 정벌하고 서이를 정벌하였다. 북으로 바다를 건너 95국을 평정하였다. 지금 살펴보면 그왕은 성이 아매이고 나라이름을 아배계로 하였다. <미>는 중국어로 하늘의 아들이다. 부자상속을 하며 궁녀가 6-7백명이 있다.왕의 맏아들은 주작이고 호는 화이며 가미다불리 즉 중국어로 태자이다.

 

宋書 卷九十七 列傳 第五十七

夷蠻 東夷.

倭國

在高驪東南大海中, 世修貢職. 高祖 永初二年, 詔曰:倭讚萬里修貢, 遠誠宜甄, 可賜除授.太祖 元嘉二年, 讚又遣司馬曹達奉表獻方物. 讚死, 弟珍立, 遣使貢獻. 自稱使持節·都督倭 百濟 新羅 任那 秦韓 慕韓 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表求除正, 詔除安東將軍·倭國王. 珍又求除正倭隋等十三人平西·征虜·冠軍·輔國將軍號, 詔並聽.

421년 스스로 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6국제군사안동대장국왜국왕으로 해주기를 청하다. 그냥 안동대장군왜국왕으로만 하다.

 

南齊書 卷五十八 列傳 第三十九

倭國

, 在帶方東南大海島中, 漢末以來, 立女王. 土俗已見前史. 建元元年, 進新除使持節·都督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六國諸軍事· 都督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慕韓]六國諸軍事 據南史補. 按補一 慕韓 , 方符六國之數. 安東大將軍·倭王武號爲鎭東大將軍.

 

임나 일본부설은 일본 정치사학자이 만들어낸 사실을 오도한 윤색이고 실제는 대륙에서 신라지역에 진출했던 모용황의 기마병력중 신라왕권을 차지한 모씨일부를 제외하고  나머지 소외세력 군사력이 가야지역(경남일대)을 정벌하고 서로 독립하여 대가야,고령가야,금관가야 등으로 이름을 붙였다고 보여진다. 물론 일찌기 이 시기에 일본열도로 넘어간 집단이 있을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이지역의 무덤에서 3-4세기 이전의 무덤을 갈아 엎고 그위에 새로운 무덤을 쓴 철기무덤 흔적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민족간의 정복전쟁으로 볼수있다.  

 

이들은 결국 성장한 <모씨신라>에게 복속당하거나 합병당한후 잔류세력은 다시 일본으로 넘어갔던것으로 보인다. 즉 몇자에 걸쳐 묘모용선비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철기문화을 일으키고 일본열도에서 서로간에 정벌전쟁을 벌였다(5세기 중국기록에 근거). 

 

 모용선비군은 일본열도로 넘어가 그곳을  앞선 기마군단으로 정복하고 왕족이되어 그들의 연고지였던 한반도남부를 총괄하는 都督이 되기를 남북조시기 중국 宋朝에 요청하였으나 강성했던 고구려,백제간의 관계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알려진대로 한반도의 신라를 신라로 보기보다는 <慕容新羅>로 보는것이 타당하다고 하겠고 <사로신라>는 이미 같은 남북국 시기에 晉과 宋의 중간에 존재했음을 인지할 수 있다. 또한 통일신라시기 만주지역에 있었던 신라는 10세기 고려 왕건에 倂合되어  4세기 모용신라 땅이었던 현 경주지역에 食邑 慶州라는 이름으로 移置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신라의 수도는 금성(月城)으로 불리어졌고 경주라는 이름은 고려때 생겼다.) 

 

심제 글.

 

 

글쓴이의 <辯>

  기마민족도래설의 주창자 일본학자 江上波夫의 <기마민족설>이나 코벨의 <부여 일본 도래설>등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일본학자의 논문들이 오히려 냉정하고 합리적인 요소들이 많아보인다. 특히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설>하면  핏대부터 올리고 보는데 그것보다는 한,중,일사서를 비교하여 당시 日本의 주체가 누구냐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한반도에서 신라,가야를 세우고 열도로 넘어가 철기문화를 전달한 주체가 선비족이였던 것이다. 당시 선비족은 부여족의 遺習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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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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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榮成 | 작성시간 15.09.14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石柱齋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9.14 장수왕에게 개로왕이 죽임을 당한후 나라가 망할위기에서 신라의 구원을 요청후 신라상층부의 牟(혹은 慕)씨가 백제에서 정변을 일으켜 백제왕가에 참여 삼근왕-동성왕을 거치면서 잠시나마 백제의 왕가에 진입하지 않았나 판단됩니다. (그러나 3왕 모두 젊은 나이에 살해당함,즉 백제왕족에게 견제 당한것으로 보임)
  • 작성자榮成 | 작성시간 15.09.14 참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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