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관념을 탈피하려 항상 의심하고 다시 살펴보는 것이 연구자의 본분이다.
한반도가 고대로 부터 정치적 군사적 충돌관계가 매우 적은 지역이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두우의 <통전>에도 남북조 송서기록을 인용하여 신라왕의 성과 관련하여 백제가 신라의 왕이되었다는 기록과 신라왕대의 쿠데타 의혹이 제기되었다. 기록 오류로 폄훼하기 보다는 백제의 선향 부여족과 부여족이 상층부를 차지했던 선비족의 정치적 관계를 추론해 보는 가설이 필요하다.
342년후 신라모용씨 계열 왕들과 중국기록에 공식적으로 나타난 신라 법흥왕 모진(慕秦), 백제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 모도(牟都),문주왕의 아들 삼근왕, 문주왕의 조카이자 곤지의 아들 동성왕(牟大) 모(牟)씨와 법흥왕에 복속된 금관가야 그리고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구해왕의 이름 무득(茂得) 즉 무력(武力)등이 선비계 동족 관계로 소흘히 볼 수 없을것 같다.
주)1. 학계에서도 백제 문주왕 모도가 개로왕의 자식이 아니라는 논문이 있다. (이기동『백제의 역사』)
2. 백제 위 시기의 역사는 무언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듯하다. (김운회 주장)
3. 위의 내용과 상통한다. (KBS PD-장한식)
慕-牟-武씨(중국음으로는 같다)로 이어지는 선비계열의 신라-백제-가야-왜의 가문인맥이 결국 선비인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 멸망에 앞장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 모씨(慕氏) - 내물마림간(奈勿麻立干) 이후 법흥왕(法興王) 부터 金씨로 改姓 추정.
백제 모씨(牟氏) - 문주왕(문주왕),삼근왕(三斤王),동성왕(東城王) 피살후 부여씨계열 복권 추정.
가야 무씨(武氏) - 5세기이후 모용부족 금관가야 구해왕(김유신) 계보 본래 武(茂)氏추정.
같은시기 신라의 왕위계보표
내물(奈勿), 나밀(那密) | 356년 ~ 402년 | 각간 말구(末仇)의 아들 (왕족 장자 승계가 아님) | |
실성(實聖) | 402년 ~ 417년 |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왕족 장자 승계가 아님) | |
눌지(訥祗) | 417년 ~ 458년 | 내물 마립간의 장자. | |
자비(慈悲) | 458년 ~ 479년 | 눌지 마립간의 장자. | |
소지(炤知) | 479년 ~ 500년 | 자비 마립간의 장자. | |
지대로(智大路), 지도로(智度路) | 500년 ~ 514년 | ||
원종(原宗) | 514년 ~ 540년 | 지증왕의 아들. | |
삼맥종(彡麥宗) | 540년 ~ 576년 | 법흥왕의 조카. | |
사륜(舍輪), 금륜(金輪) | 576년 ~ 579년 | 진흥왕의 차남. | |
백정(伯淨, 白淨, 白丁) | 579년 ~ 632년 | 진흥왕의 장손이자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 | |
덕만(德曼) | 632년 ~ 647년 | 진평왕의 장녀.성조황고선덕여대왕(聖祖皇姑善德女大王). | |
승만(勝曼) | 647년 ~ 654년 |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國飯)의 딸. |
내물마립간의 아버지 이름이 말구(末仇) 인데 모용씨(募,慕氏)의 또 다른 이름으로 보인다. 中音으로 말(末)은 모(慕)와 동음이다. 왜 이름이 원수 구(仇)인가?
5-6세기이후 신라,가야,왜와 임나 관련하여 선비(부여)모용씨 연원관계 연구과제이다.
卷第25 百濟本紀 第3
蓋鹵王 (개로왕)
二十一年秋九月 (475)麗王巨璉帥兵三萬來圍王都漢城王閉城門不能出戰麗人分兵爲四道夾攻又乗風縱火焚燒城門人心危懼或有欲出降者王窘不知所圖領數十騎出門西走麗人追而害之先是髙句麗長壽王隂謀百濟求可以間諜於彼者時浮屠道琳應募曰愚僧既不能知道思有以報國恩願大王不以臣不肖指使之期不辱命王恱密使譎百濟於是道琳佯逃罪奔入百濟時百濟王近蓋婁好愽 弈道琳詣王門告曰臣少而學碁頗入妙願有聞於左右王召入對碁果國手也遂尊之爲上客甚親昵之恨相見之晩道琳一日侍坐從容曰臣異國人也
개로왕21년(475)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거련(巨璉)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한성(漢城)을 포위했다.왕이 싸울 수가 없어 성문을 닫고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이용해서 불을 질러 성문을 태웠다. 백성들 중에는 두려워하여 성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왕을 죽였다.
고구려 장수왕이 여러 장수를 시켜 백제를 공격하여 개로왕 일족이 참수당하므로서 백제는 거의 망했던것 아닌가 추정된다. 따라서 그의 동생 곤지를 백제의 구국(救國) 차원에서 일본으로 보낸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일본서기>「백제기」기록;
"개로왕 을묘년 겨울 박(狛)의 대군이 와서 큰 성을 공략한 지 7일 만에 왕성이 함락되여 드디어 위례를 잃었다. 국왕 및 태후, 왕자 등이 다 적의 손에 죽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卷第26 百濟本紀 第4 文周王 1年冬十月
冬十月移 都於熊津.
원년(475) 겨울 10월에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卷第26 百濟本紀 第4 文周王 2年秋八月
秋八月拜解仇爲兵官佐平.
476년 해구를 병관좌평에 올리다.
해구는 중국사서에 기록된 전통적인 백제의 귀족가문으로 보인다 즉 개로왕 이후의 국가의 위기에서 신라에서 넘어온 이족(異族)왕을 견제를 하기위해 국방장관으로 임명된것 아닌지.
『수서(隨書)』와 『신당서(新唐書)』
사씨(沙氏)․연씨(燕氏)․협씨(劦氏)․해씨(解氏)․정씨(貞氏)․국씨(國氏)․목씨(木氏)․백씨(苩氏)
『북사(北史)』
사씨(沙氏)․연씨(燕氏)․협씨(劦氏)․해씨(解氏)․진씨(眞氏)․국씨(國氏)․목씨(木氏)․묘씨(苗氏)
『한원(韓苑))』 <괄지지>
사씨(沙氏)․연씨(燕氏)․협씨(劦氏)․해씨(解氏)․진씨(眞氏)․목씨(木氏)․수씨(首氏)
『통전(通典))』
사씨(沙氏)․연씨(燕氏)․협씨(劦氏)․해씨(解氏)․진씨(眞氏)․국씨(國氏)․목씨(木氏)․백씨(苩氏)
卷第26 百濟本紀 第4 文周王 3年夏四月
夏四月拜王弟昆支爲内臣佐平封長子三斤爲太子.
477년 여름 4월에 왕의 아우 곤지(昆支)를 내신좌평으로 임명하고, 맏아들 삼근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일본의<신찬성씨록>에는 곤지가 곤지왕으로 표기되어 있어 일본으로 건너가 천황정도의 지위를 유지한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九月王出獵宿於外解仇使盗害之遂薨.
왕이 사냥을 나가 밖에서 묵었는데 해구가 사람을 보내서 죽였다.
卷第26 百濟本紀 第4 三斤王 2年
二年春佐平解仇與恩率燕信聚衆據大豆城叛王命佐平真男以兵二千討之不克更命徳率真老帥精兵五百擊殺解仇 燕信奔髙勾麗収其妻子斬於熊津市.
2년 봄, 좌평 해구가 은솔 연신(燕信)과 함께 무리를 모아 대두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좌평 진남(眞男)에게 명령하여 군사 2천 명으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다시 덕솔 진로(眞老)에게 명하여 정예 군사 5백 명을 거느리고 해구를 공격하여 죽이게 했다. 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그의 처자들을 체포하여 웅진 시장에서 목을 베었다. (능지처사형 했음을 전한다)
卷第26 百濟本紀 第4 三斤王 3年冬十一月 (479)
冬十一月王薨.
왕이 훙했다.
卷第26 百濟本紀 第4 東城王 1年 冬十一月(479)
東城王諱牟大 或作摩牟文周王弟昆支之子膽力過人善射百發百中三斤王薨即位.
동성왕은 이름이 모대로 문주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이다.
주)《삼국유사》 왕력편(王曆篇) 동성왕(東城王)에는 一名牟大一云麻帝又餘大로 되어있다.
卷第26 百濟本紀 第4 東城王 10年(488)
十年魏遣兵來伐爲我所敗.
위나라가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했다.
『남제서』 북위-백제 동성왕의 전쟁기록
南齊書 卷58 列傳第39 蠻 東南夷
是歲,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幹那率眾襲擊虜軍,大破之。建武二年,牟大遣使上表曰:「臣自昔受封,世被朝榮,忝荷節鉞,克攘列辟。往姐瑾等並蒙光除,臣庶鹹泰。去庚午年,獫狁弗悛,舉兵深逼。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宵襲霆擊,匈梨張惶,崩若海蕩。乘奔追斬,殭屍丹野。由是摧其銳氣,鯨暴韜凶。今邦宇謐靜,實名等之略;尋其功勳,宜在褒顯。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贊首流為行安國將軍、辟中王,解禮昆為行武威將軍、弗中侯,木幹那前有軍功,又拔台舫,為行廣威將軍、面中侯。伏願天恩特愍聽除。」又表曰:「臣所遣行龍驤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行建武將軍、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兼參軍、行振武將軍、朝鮮太守臣張塞,行揚武將軍陳明,在官忘私,唯公是務,見危授命,蹈難弗顧。今任臣使,冒涉波險,盡其至誠。實宜進爵,各假行署。伏願聖朝特賜除正。」詔可,並賜軍號。
加羅國,三韓種也。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
倭國,在帶方東南大海島中,漢末以來,立女王。土俗已見前史。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為鎮東大將軍。
卷第26 百濟本紀 第4 東城王 十五年春三月 (493)
十五年春三月王遣使新羅請婚羅王以伊飡比智女歸之.
왕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해 결혼을 청해 이찬 비지의 딸을 데리고 돌아왔다.(결혼동맹)
<추모경>에 의하면 신라 자비왕의 딸 준삭이 모대에게 반해 먼저 유혹해 임신한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卷第26 百濟本紀 第4 東城王 22年 (500)
二十二年春起臨流閣於宫東髙五丈又穿池養竒禽諌臣抗䟽不報恐有復諌者閉宫門.
22년 봄, 대궐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었다. 또한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간관들이 이에 항의하여 글을 올렸으나 듣지 않고 다시 간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대궐 문을 닫아 버렸다.
卷第26 百濟本紀 第4 東城王 23年冬十一月(501)
十一月獵於熊川北原又田於泗沘西原阻大雪宿於馬浦村初王以苩加鎮加林城加不欲徃辝 以疾王不許是以怨王至是使人刺王至十二月乃薨謚曰東城王.
冊府元龜云南濟津 元二年百濟王牟都遣使貢献詔曰宝命惟新澤被絶域牟都世蕃東表守職遐外可即授使持節都督百済諸軍事鎮東大将軍又永明八年百濟王牟大遣使上表遣謁者僕射孫副䇿命大襲亡祖父牟都爲百済王曰於戯惟爾世襲忠勤誠著遐表海路肅澄要貢無替式循彜典用纂顕命徃敬哉其敬膺休業可不慎歟行都督百済諸將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而三韓古記無牟都爲王之事又按牟大 盖鹵王之孫盖鹵第二子昆支之子不言其祖牟都則齊書所載不可不疑
11월에 왕이 웅천 북쪽 벌판과 사비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馬浦村)에서 묵었다.이전에 왕이 백가로 하여금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을 때 백가는 가기를 원하지 않아 병을 핑계로 퇴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백가는 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때에 와서 백가가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찔러서 12월에 이르러 왕이 사망하니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였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 이르기를,
남제(南齊)의 고조(高祖) 건원(建元) 2년에 백제 왕 모도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전하였다. 조서(詔書)에 “보명(寶命)이 새로워 은택이 원성(遠城)에까지 미치었다. 모도는 대대로 동방에서 번국(藩國)이 되어 직책을 먼 곳에서 지켰으니 가히 사지절(使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을 수여할지어다.”라고 하였다. 또 무제(武帝) 영명(永明) 8년에 백제왕 모대(牟大)가 사신을 보내어 글을 전하매, 알자복야(謁者僕射)손부(孫副)를 보내 모대를 책명하여 망조부(亡祖父) 모도(牟都)를 승계해서 백제왕을 삼게 하고 이르기를, “아아 생각하건대 그대는 대대로 충근하여 정성이 원방(遠方)에 드러났다. 바닷길이 고요하고 조공이 변함없기를 바라며, 상전(常典)에 따르고 천명을 이어갈수록 삼갈지어다. 국가의 대업을 이어받으니 삼가지 않을 수 있으랴. 행도독백제제군사(行都督百濟諸軍事)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백제왕(百濟王)을 삼는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삼한고기(三韓古記)》에는 모도(牟都)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없다. 또 생각하건대 모대(牟大)는 개로왕의 손자이며, 개로왕의 둘째 아들 곤지의 아들 이다. 그 조부를 모도(牟都)라고는 하지 아니하였으니 제서(齊書)의 기록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이상 원문)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해왕(仇亥王, ~ AD 532년)의 2남과 3남으로 무득(武得) 즉 무력(武力)이 김유신의 할아버지로 김유신은 동족나라인 신라에서 입신(立身)한 것은 아닐까? 운영자는 모(慕-牟)와 무(武)는 음운학상 같다고 보아 동족이라고 추정한다.
법흥왕의 8년간의 끈질긴 회유와 무력시위에 의해서 금관가야가 마지막으로 신라에 복속하였으며 가야고분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결과로 보면 4세기 이후 가야와 신라의 고분양식과 철기유물은 동일계열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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