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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초기신라의 위치는 현 요서지방

작성자心濟|작성시간17.06.30|조회수687 목록 댓글 5


송산(松山)이 보이는 명나라지도


중국기록에 따르면 초기신라는 백제에 부용하고 있었으며 6세기에 이르러 백제사신을 따라 남조에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고 심지에 백제인이 신라왕을 하였다고도 기록되어있다. 학계가 인정하지 않는 우리기록에도 박혁거세가 부여의 왕족이었으며 이후 신라가 북에서 남쪽으로 집단 이주하였다고 하였다.  


온조13(기원전7)5월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혹 고구려)이 있는 상황이어서, 초기백제의 위치는 기존인식과는 달리 현 요서지역이나 요녕 서해안 지방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요서지방에서 건국한 백제는 이후 온조왕13(기원전6)에 수도를 다시 옮겼는데, 온조17(기원전2)에 다시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우고, 신라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원년(4) 낙랑이 진로를 바꾸어 신라 수도 금성을 포위한 적이 있고, 남해차차웅11(14)에 다시 침입하였다고 하였다.


온조왕41(23)에는 그동안 미루던 궁성을 비로소 수리하게 되는데, 이때 위례성은 패수(浿水)와 대수(帶水)사이에 있다고 하였다.


고구려 대무신왕은 37년 옥저지방에 있던 최리의 낙랑국을 거의 멸망시키고, 낙랑국 사람 5천명을 신라6부 땅에 옮겨 살게 하였다. 이로서 옥저지방에 있던 낙랑국은 해체된 것이다.


위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최리의 낙랑국은 백제의 동쪽에 있으면서 북쪽 고구려의 공격으로 멸망한 후 남쪽 신라의 백성이 되었다. 삼국지(위서동이전 예전)후한서(동이열전 한전)내용을 종합해보면, 낙랑의 북쪽에 조선이 있었고 ,동쪽에 예맥, 남쪽에는 진한이 존재하였다.


한나라의 요서와 요동의 지리적 위치에 대한 정의에 따라 초기 고구려,백제 등이 어디에 있었는지 결정되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요서지역이 한나라말의 요동이며 대방지(帶方地)흠정성경통지에 따르면 대방현에 한낙랑군이 있었다고 했다

 

이후 팔왕의 난으로 서진이 물러나고, 새롭게 등장한 동진 건흥(313~319)이후 요동 1천여리에 백제와 같이 있었던 고구려가 전한이 설치했던 낙랑군을 이미 차지하고, 현도를 영향권 아래 두었으며, 백제 역시 요서로 진출하여 대방을 소유하였다고 한 기록이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는 낙랑을 낙랑군과 최씨낙랑국 모두를 기록하고 있으나 백제본기는 낙랑군만을, 신라본기는 최씨 낙랑군만을 기록하였다. 따라서 백제본기에 기록된 낙랑군은 요서백제시기 그 동쪽에 있었던 한사군의 낙랑군인 것이다


황보은숙의 경주지구 고고학 발굴 논문에 의하면 경주일대에 왕도를 이룰만한 3세기이전의 유적이 발굴되지않았다고 경주사학논문집에서 밝히고 있다. 즉 경주는 4세기 이후에 확장되었다는 것으로 삼국사기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저서중에서)


1)󰡔宋書󰡕97 (夷蠻列傳)百濟國-“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여기서 당시 요동은 하북 동부로 현재의 요서지방(대방고지)을말한다.

隋書81(東夷列傳)百濟-,“始立其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漸以昌盛, 爲東夷强國.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이후 바다를 건너 이동하였다

2)최근 북한학계의 발굴결과에 의하면, 최리의 낙랑국은 비파형청동검 등 발달된 후고조선 문화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문명국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B.C.1세기보다 훨씬 이른 시기부터 존재하였던 나라로 알려졌다.

3)三國志󰡕30 魏書東夷傳濊傳,“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 之東皆其地也.”, 󰡔後漢書󰡕85 東夷列傳韓傳,“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4)欽定盛京通志󰡕28 古山川附考45 帶方山, “隋書)大業初 置遼西郡 有帶方山,禿黎山,鷄鳴山,松山. 按漢時有帶方縣,屬樂浪郡.

5)󰡔宋書󰡕97列傳蠻夷-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

한치윤의 󰡔해동역사󰡕사군사실(四郡事實)에도 기록됨.

6)민성욱,낙랑과 백제와의 관계 고찰을 통한 말갈의 위치 연구,선도문화15, 2013, p313.


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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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원길로이 | 작성시간 17.06.30 心濟 전위-고전자위 고구려성이 넘쳐납니다. 일본의 20세기초지도에도 고전자와 요하강 개주위의 백채자
    성만이 요동남부 고력성으로 표시되는 곳이지만 학계 누구도 연구한 것은 아직 보지못하였고 요하강변의
    말도 안되는 거리의 고구려 안시-건안-요동-백암등등의 위치비정보다 이 요서지역엔 일정거리 즉 서로
    감제 협조할수있는 조력 기마거리내를 유지하며 성들이 위치. 특히 개인적으로 지도는 고지도나 현대지도
    나 꼭 등고선지도를 봐야 군사, 강역의 이해에 절대적이라. 그냥 고지도, 평면지돈..2년전인가 개봉하였던
    차승원주연 고산자에서 김정호일가가 평면지도로 단거리 보고좌표따라가다..변을 당하는..
  • 답댓글 작성자원길로이 | 작성시간 17.06.30 원길로이 요동반도에서 당태종의 전설이 주민들에게 전하는 곳은 저곳 전위, 고전자 위와 안산,개주방향에서
    만이 당태종의 전설이나 지명이 남아 잇고 심양위로나 대련방향은 설인귀등의 전설만이 주로 남아 있습니다.
    저 고전자나 그 위의 지역에 촌장을 만났을때 촌장이 이곳이 바로 너희 조상들인 조선족 고리들이 살던곳이며
    저곳서 이세민이 병사들을 조련하여 동쪽으로 진군하엿다 등등 전설을 이갸기 하는 것을 들으면..현재도 지명
    들이 차음으로 남아있고 조금더 위 숭덕,적봉으론 청팔기중 조선적팔기군 제대후 거주한 즉 최초의 족보상박
    씨촌들 원형이 저 주변에서 시작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핏줄이 땡겨서인지..분발 연구합시다.
  • 답댓글 작성자心濟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7.01 원길로이 이거 아주 중요한 말씀 해주셨어요.고구려의 초기는 내몽골과 하북에 있다가 장수왕이후 요동으로 도읍을 옮긴 자료가 보이는데도 아니라고 하니원...고구려말기는 요동지방에서 끝을 맺었는데도 아니라는 분들이있어요.
  • 답댓글 작성자원길로이 | 작성시간 17.07.01 心濟 기 다수사학계에서 요하강변의 신성, 개모, 요양, 안시, 건안성등 비정하는 거리는 현재지도에 직선거리
    만로도 5~60 km입니다. 몽고의 나담축제에서 어린이를 태우고 수십km 달리고 말이 숨이차 죽는 일을 등은
    본적도 없는 분들 그냥 고서로 지도평면만으로 카더랴 수준 비정..장검의 기병이 기습을 요택을 돌아 건안성
    앞서 수천 어쩌구하는 우스게소리를..현장 고민이 없던 글선생+책장사들에 그냥 세뇌당하는..하지만 요서의
    북경위로의 고성을 등고선으로 보면 분명 목진지엔 고성이 존재하고 성의 감제거리는 대략20~25km 정도를
    유지..긴급시 감시병봉화를 보고 기병의 조력이 가능한 거리 4~5시간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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