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가 지속적으로 스스로 중국왕조에 인정을 요구한 관직명은 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육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 이 안에 속한 한반도 나라를 보면 백제(百濟), 신라(新羅), 임나(任羅), 진한(秦韓), 모한(募韓) 이며, 왜왕 제와 무에 이르러서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왕)로 가라(加羅)가 추가된다.
중국이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로 인정해준 관직명에서 백제(百濟)가 빠져있다.
왜가 자칭하고 중국이 인정해준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라는 관직명 진한과 모한이 나온다. 모한은 근초고왕 때까지 전라남도와 큐슈지방에 세력을 떨치던 마한의 후손이었고 진한은 당시에 없었다.
신라 법흥왕이 즉위한후 공을들여 ad522년 가야를 병합한 이후 왜가 신라를 침입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기록이 발생하지 않는다. 결국 왜는 신라에서 쿠데타에 실패하여 밀려난 가야세력과 관련이 있다.운영자가 주장하는 慕韓이 바로 신라에서 이탈하여 왜로 건너간 가야(伽羅)이다. (운영자의 저서에 근본적 이유가 수록되어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依山島為國邑.舊百餘國,漢時有朝見者,今使譯所通三十國.從郡至倭,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乍東,到其北岸狗邪韓國,七千餘里,始度一海,千餘里至對馬國.其大官曰卑狗,副曰卑奴母離.所居絕島,方可四百餘里,土地山險,多深林,道路如禽鹿徑.有千餘戶,無良田,食海物自活,乘船南北市糴.又南渡一海千餘里,名曰渤海.至一大國,官亦曰卑狗,副曰卑奴母離.方可三百里,多竹木叢林,有三千許家,差有田地,耕田猶不足食,亦南北市糴.又渡一海,千餘里至末盧國,有四千餘戶,濱山海居,草木茂盛,行不見前人.好捕魚鰒,水無深淺,皆沉沒取之.
왜인은 대방 동남쪽 큰바다 가운데 있다.산과 섬에 의지하여 나라 도읍을 한다.옛날에는 백여개 나라가 있었는데,한나라때 조공을 하러 온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삼십여 나라와 소통한다. 군읍을 따라 왜에 이르는데 해안을 따라서 물길을 따라가면 한국을 거치고 남쪽으로 갔다가 또 동쪽으로 가서 그 북안인 구야한국에 이르기까지 7천여리이고, 비로소 바다 하나를 건너며 천여리를 가면 대마국에 도착한다.
대마국의 대관은 비구, 부관은 비노모리라 한다. 육지에서 떨어진 외딴섬에 거주하며 사방4백여리쯤 되고, 토지는 산세가 험하고 깊은 숲이 많고, 도로는 짐승이 다니는 좁은길과 같다. 천여 호가 있다. 좋은 농지가 없어 해물을 먹으며 살기 위해 배를 타고 남쪽과 북쪽으로 다니며 양식을 구입한다.
또 남쪽으로 한해라 불리는 바다 하나를 건너며 천여리를 가면 큰나라 한 곳에 도착하는데, 그곳에서는 관리를 또한 비구, 부관을 비노모리라 한다. 사방 3백리쯤 되고 대나무와 울창한 숲이 많고 3천여가가 있다. 농지가 다소 있으나 경작해도 먹기에는 여전히 부족하여 또한 대마국 처럼 남쪽과 북쪽으로 다니며 양식을 구입한다.
또 바다 하나를 건너 천여리를 가면 말로국에 도착한다. 4천여호가 있어 산이나 바닷가에서 사고 초목이 무성해 길을 다닐 때 앞사람을 볼 수 없을 정도다. 물고기와 전복(魚鰒) 잡기를 좋아하여 물이 깊고 얕고를 가리지 않고 모두 물에 들어가 이를 잡는다.
주) 대방이 현재의 요서 광녕,호로도 지역이므로 왜는 한반도 남부도 해당이 된다.
양서 신라조
新羅者,其先本辰韓種也.辰韓亦曰秦韓,相去萬里,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馬韓亦割其東界居之,以秦人,故名之曰秦韓.其言語名物有似中國人,名國為邦,弓為弧,賊為寇,行酒為行觴.相呼皆為徒,不與馬韓同.又辰韓王常用馬韓人作之,世相系,辰韓不得自立為王,明其流移之人故也;恆為馬韓所制.辰韓始有六國,稍分為十二,新羅則其一也.其國在百濟東南五千餘里.其地東濱大海,南北與句驪,百濟接.魏時曰新盧,宋時曰新羅,或曰斯羅.其國小,不能自通使聘.普通二年,王募名秦,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其俗呼城曰健牟羅,其邑在內曰啄評,在外曰邑勒,亦中國之言郡縣也.國有六啄評,五十二邑勒.土地肥美,宜植五穀.多桑麻,作縑布.服牛乘馬,男女有別.其官名,有子賁旱支,齊旱支,謁旱支,壹告支,奇貝旱支.其冠曰遺子禮,襦曰尉解,洿曰柯半,靴曰洗.其拜及行與高驪相類.無文字,刻木為信.語言待百濟而後通焉.
진한은 처음 6국이었다가 차츰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는데,신라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그 나라는 백제의 동남쪽 5천여리 밖에 있다. 동으로는 큰 바다와 연(沿)해 있고, 남북으로는 고려·백제와 접하고 있다. 위나라 때는 신로라 불렀고, 송나라 때는 신라 또는 사라라 하였는데,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보통2년(521; 법흥왕8)에 성은 모, 이름은 태인 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그 습속에 왕성을 건모라라 부르며 그 읍이 건모라의 안에 있는것은 탁평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은 읍륵이라 하니, 이것은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나라 안에는 6군데의 탁평과 52군데의 읍륵이 있다. 토지는 비옥하여 오곡을 심기에 적합하다. 뽕나무와 삼이 많아 비단과 베를 생산한다. 소는 수레를 끌리고 말은 탄다. 남녀간의 구별이 엄격하다. 그 나라의 관직 이름에는 자분한지· 제한지· 알한지· 일고지· 기패한지가 있다. 그들은 관을 유자례라 하며, 저고리를 위해, 바지를 가반, 신을 세라 한다. 그들의 절하는 방법과 걷는 모양은 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으므로 나무에 금을 새겨 신표로 삼는다. 의사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구당서 동이
왜국 (한반도 포함)
倭國者,古倭奴國也.去京師一萬四千里,在新羅東南大海中.依山島而居,東西五月行,南北三月行,世與中國通.其國,居無城郭,以木為柵,以草為屋.四面小島五十餘國,皆附屬焉.其王姓阿每氏,置一大率,檢察諸國,皆畏附之.設官有十二等.其訴訟者,匍匐而前.地多女少男.頗有文字,俗敬佛法.並皆跣足,以幅布蔽其前後.貴人戴錦帽,百姓皆椎髻,無冠帶.婦人衣純色裙,長腰襦,束髮於後,佩銀花,長八寸,左右各數枝,以明貴賤等級.衣服之制,頗類新羅.貞觀五年(631),遣使獻方物.太宗矜其道遠,敕所司無令歲貢,又遣新州刺史高表仁持節往撫之.表仁無綏遠之才,與王子爭禮,不宣朝命而還.至二十二年(648),又附新羅奉表,以通起居.
왜국이란 옛 왜노국이다.경사에서 일만사천리를 가면 신라의 동남 대해중 산과 섬에 의거해 산다. 동서로 다섯달 거리이고 남북으로 삼월행이며 세세토록 중국과 통했다. 그 나라는 거함에 성곽이 없어 나무로 목책을 만들고 풀로 집을 만든다,. 사면이 작은 섬들이고 오십여국이 모두 부속된다. 그 왕성은 아매씨고 한 대솔을 두어 제국을 검찰한다. 대개 부지설을 두려워 한다. 관에는 12 등이 있고 그 소송하는 자는 포복하여 나온다. 땅은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으며 자못 문자가 있어 풍속에 불법을 존경하여 더불어 대개 선족하며 복포로 그 앞뒤를 가린다. 귀인은 금모를 쓴다. 백성들은 대개 추계머리를 하고 관대를 하지 않으며 부인의 옷은 순색 치마는 길고 저고리를 찬다. 뒤로 속발을 한다. 길이 팔촌 은화를 좌우에 차는데 각기 몇 가지로 귀천과 등급을 밝힌다. 의복지제는 자못 신라와 비슷하다. 정관 5년,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자 태종이 그 길이 멀음을 가여이 여겨 칙으로 사에 세공을 영하지 말라 하고, 또 신주자사 고표인을 보내 지절하여 가서 위무케 했다. 표인이 수원지재 없이 왕자와 예를 다투고 조명을 베풀지 못하고 돌아와 이르렀다. 22년에 또 신라에 붙어 봉표하여 통하여 기거했다.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爲名.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或云:日本舊小國,竝倭國之地.其人入朝者,多自矜大,不以實對,故中國疑焉.又云:其國界東西南北各數千里,西界,南界鹹至大海,東界,北界有大山爲限,山外卽毛人之國.
長安三年(703),其大臣朝臣眞人來貢方物.
일본국이란 왜국의 별종인데 그 나라가 해뜨는 쪽에 있는 때문에 일본을 이름으로 했다고도 하고, 왜국이 스스로 그 이름을 싫어하고 듣기 그리 좋지 않아서 고쳐 일본이라 했다고도 하고, 일본이 옛 소국으로 왜국의 땅을 아울렀다고도 한다. 그 사람들이 입조한자 많고 크다고 자긍하나 실제는 그렇게하지 않아 중국이 의심했다. 또 그 국계의 동서남북이 각기 수천리라고 한다. 서계와 남계 모두 대해에 이른다. 동계와 북계는 대산이 있어 한계가 되고 산 밖은 모인의 나라다. 장안3년(703), 그 대신 조신진인이 들어와 방물을 바쳤다.
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