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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백제 멸망이후 왜가 일본으로 합쳐짐 .

작성자文古里|작성시간17.11.27|조회수323 목록 댓글 0

왜가 지속적으로 스스로 중국왕조에 인정을 요구한 관직명은 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육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 이 안에 속한 한반도 나라를 보면  백제(百濟), 신라(新羅), 임나(任羅), 진한(秦韓), 모한(募韓) 이며, 왜왕 제와 무에 이르러서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왕)가라(加羅)추가된다.

중국이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인정해준 관직명에서 백제(百濟)가 빠져있다.

왜가 자칭하고 중국이 인정해준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라는 관직명 진한과 모한이 나온다. 모한은 근초고왕 때까지 전라남도와 큐슈지방에 세력을 떨치던 마한의 후손이었고 진한은 당시에 없었다.

신라 법흥왕이 즉위한후 공을들여 ad522년 가야를 병합한 이후 왜가 신라를 침입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기록이 발생하지 않는다. 결국 왜는 신라에서 쿠데타에 실패하여 밀려난 가야세력과 관련이 있다.운영자가 주장하는 慕韓이 바로 신라에서 이탈하여 왜로 건너간 가야(伽羅)이다. (운영자의 저서에 근본적 이유가 수록되어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山島為國.百餘,時有朝見,使譯所通三十.郡至,海岸水,,南乍,其北岸狗邪韓,千餘,度一,餘里至對馬.大官曰卑,曰卑奴母.居絕,可四百餘,地山,,路如禽鹿.千餘,,海物自,船南北市.南渡一海千餘,曰渤.一大,亦曰卑,曰卑奴母.可三百,竹木叢,三千許,有田,田猶不足,南北市.渡一,餘里至末盧,四千餘,山海,木茂,不見前.捕魚,無深,沉沒取.

왜인은 대방 동남쪽 큰바다 가운데 있다.산과 섬에 의지하여 나라 도읍을 한다.옛날에는 백여개 나라가 있었는데,한나라때 조공을 하러 온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삼십여 나라와 소통한다. 군읍을 따라 왜에 이르는데 해안을 따라서 물길을 따라가면 한국을 거치고 남쪽으로 갔다가 또 동쪽으로 가서 그 북안인 구야한국에 이르기까지 7천여리이고, 비로소 바다 하나를 건너며 천여리를 가면 대마국에 도착한다.

대마국의 대관은 비구, 부관은 비노모리라 한다. 육지에서 떨어진 외딴섬에 거주하며 사방4백여리쯤 되고, 토지는 산세가 험하고 깊은 숲이 많고, 도로는 짐승이 다니는 좁은길과 같다. 천여 호가 있다. 좋은 농지가 없어 해물을 먹으며 살기 위해 배를 타고 남쪽과 북쪽으로 다니며 양식을 구입한다.

남쪽으로 한해라 불리는 바다 하나를 건너며 천여리를 가면 큰나라 한 곳에 도착하는데, 그곳에서는 관리를 또한 비구, 부관을 비노모리라 한다. 사방 3백리쯤 되고 대나무와 울창한 숲이 많고 3천여가가 있다. 농지가 다소 있으나 경작해도 먹기에는 여전히 부족하여 또한 대마국 처럼 남쪽과 북쪽으로 다니며 양식을 구입한다.

바다 하나를 건너 천여리를 가면 말로국에 도착한다. 4천여호가 있어 산이나 바닷가에서 사고 초목이 무성해 길을 다닐 때 앞사람을 볼 수 없을 정도다. 물고기와 전복(魚鰒) 잡기를 좋아하여 물이 깊고 얕고를 가리지 않고 모두 물에 들어가 이를 잡는다

주) 대방이 현재의 요서 광녕,호로도 지역이므로 왜는 한반도 남부도 해당이 된다.

양서 신라조 

新羅,先本辰韓種.韓亦曰秦,去萬,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亦割其東界居,,名之曰秦.言語名物有似中國,國為,,,酒為行.呼皆為,與馬韓.辰韓王常用馬韓人作,,韓不得自立為,其流移之人故也;恆為馬韓所.韓始有六,分為十,羅則其一.國在百濟東南五千餘.地東濱大,北與句,.時曰新,時曰新,曰斯.,能自通使.通二,募名,使使隨百濟奉獻方.俗呼城曰健牟,邑在內曰啄,外曰邑,中國之言郡縣.有六啄,十二邑.地肥,植五.,.牛乘,女有.,子賁旱,,,,貝旱.冠曰遺子,曰尉,洿曰柯,.拜及行與高驪相.,木為.言待百濟而後通.

진한은 처음 6국이었다가 차츰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는데,신라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나라는 백제의 동남쪽 5천여리 밖에 있다. 동으로는 큰 바다와 연(沿)해 있고, 남북으로는 고려·백제와 접하고 있다. 위나라 때는 신로라 불렀고, 송나라 때는 신라 또는 사라라 하였는데,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보통2(521; 법흥왕8)성은 모, 이름은 태인 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습속에 왕성을 건모라라 부르며 그 읍이 건모라의 안에 있는것은 탁평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은 읍륵이라 하니, 이것은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나라 안에는 6군데의 탁평과 52군데의 읍륵이 있다. 토지는 비옥하여 오곡을 심기에 적합하다. 뽕나무와 삼이 많아 비단과 베를 생산한다. 소는 수레를 끌리고 말은 탄다. 남녀간의 구별이 엄격하다. 나라의 관직 이름에는 자분한지· 제한지· 알한지· 일고지· 기패한지가 있다. 그들은 관을 유자례라 하며, 저고리를 위해, 바지를 가반, 신을 세라 한다. 그들의 절하는 방법과 걷는 모양은 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으므로 나무에 금을 새겨 신표로 삼는다. 의사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구당서 동이 

왜국 (한반도 포함)

,倭奴國.京師一萬四千,新羅東南大海.山島而,西五月,北三月,與中國.其國,無城,木為,草為.面小島五十餘,附屬.王姓阿每,一大,察諸,畏附.官有十二.訴訟,匐而.多女少.有文,敬佛.皆跣,幅布蔽其前.人戴錦,姓皆椎,.人衣純色,,髮於,,,右各數,明貴賤等.服之,類新.觀五(631),使獻方.宗矜其道,所司無令歲,遣新州刺史高表仁持節往撫.仁無綏遠之,王子爭,宣朝命而.二十二(648),附新羅奉,通起.

왜국이란 왜노국이다.경사에서 일만사천리를 가면 신라의 동남 대해중 산과 섬에 의거해 산다. 동서로 다섯달 거리이고 남북으로 삼월행이며 세세토록 중국과 통했다. 그 나라는 거함에 성곽이 없어 나무로 목책을 만들고 풀로 집을 만든다,. 사면이 작은 섬들이고 오십여국이 모두 부속된다. 왕성은 아매씨고 대솔을 두어 제국을 검찰한다. 대개 부지설을 두려워 한다관에는 12 등이 있고 그 소송하는 자는 포복하여 나온다. 땅은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으며 자못 문자가 있어 풍속에 불법을 존경하여 더불어 대개 선족하며 복포로 그 앞뒤를 가린다. 귀인은 금모를 쓴다. 백성들은 대개 추계머리를 하고 관대를 하지 않으며 부인의 옷은 순색 치마는 길고 저고리를 찬다. 뒤로 속발을 한다. 길이 팔촌 은화를 좌우에 차는데 각기  몇 가지로 귀천과 등급을 밝힌다. 의복지제는 자못 신라와 비슷하다. 정관 5,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자 태종이 그 길이 멀음을 가여이 여겨 칙으로 사에 세공을 영하지 말라 하고, 신주자사 고표인을 보내 지절하여 가서 위무케 했다. 표인이 수원지재 없이 왕자와 예를 다투고 조명을 베풀지 못하고 돌아와 이르렀다. 22년에 또 신라에 붙어 봉표하여 통하여 기거했다.

本國,國之別種.其國在日,以日.曰:倭國自惡其名不,為日.云:日本舊小,國之.人入朝,自矜,以實,中國疑.云:其國界東西南北各數千,西界,界鹹至大,東界,界有大,山外人之. 安三(703),大臣朝來貢方物.

일본국이란 왜국의 별종인데 나라가 해뜨는 쪽에 있는 때문에 일본을 이름으로 했다고도 하고, 왜국이 스스로 그 이름을 싫어하고 듣기 그리 좋지 않아서 고쳐 일본이라 했다고도 하고, 일본이 소국으로 왜국의 땅을 아울렀다고도 한다. 그 사람들이 입조한자 많고 크다고 자긍하나 실제는 그렇게하지 않아 중국이 의심했다. 또 그 국계의 동서남북이 각기 수천리라고 한다. 서계와 남계 모두 대해에 이른다동계와 북계는 대산이 있어 한계가 되고 산 밖은 모인의 나라다. 장안3(703), 대신 조신진인이 들어와 방물을 바쳤다.


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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