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서에서는 각왕조별로 저술된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를 당대 기준으로 전대의 기록을 보고 저술하였기때문에 위서,진서,구당서와 달리 신당서에서는 현재의 평양을 고구려 평양성으로 기술하였는데,신당서에 등장하는 가탐도리기에 등장하는 거리,방향기록은 모두 맞다.단 요양의 평양성을 기록하지 않고 평안도 평양성(한성)을 고구려 평양으로 기록했는데 이는 송대의 관점에서 기록한 것이다. 이에 반해 요사와 원사에서는 자신들의 뿌리인 고구려가 요녕성에 있었던 평양성을 기술하고, 송나라때 고려도경에서는 그 변천기록을 기록하였다.
결과적으로 종합해보면 평양이 한군데가 아니라 적어도 3군데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평양의 평양성 역시 고구려 한성으로 장수왕때 부터 양원왕 이전까지 150여년간 거점지역으로 사용되었는데 위진남북조의 극심한 분열기를 이용 전방인 평주 평양으로 수도를 전진 재배치하였을 것이고 아울러 신라 가야를 압박하여 한반도 중남부에도 고고학적 유물들을 남겨놓았다.
양원왕대에 이르러 다시 요양으로 이후 평양을 옮기고 고구려 말기까지의 수도로 이용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평안도 평양은 이후 한성에서 이름이 바뀌어 보수에 들어간다. 이후 668년 기록에서 당군은 평주 평양을 이미 수중에 넣고 요양(평양성)을 공격하고 신라군은 평양(한성)을 공격하여 남북으로 고구려를 압박하게 된다.
지금의 평양은 한때 고구려의 부수도였던 곳이지만 고구려 말기의 수도 평양은 아니다. 고구려가 패망 즈음 보장과 연남건이 지금의 평양으로 피신하고 항전했던 곳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삼국사기 기록에서는 장수왕때부터 문자왕때까지 모든성에서 백제,신라,타왕조와 충돌기록이 없다. 그것은 고구려가 내지에 들어와있다는 것이거나, 주변에 감히 고구려에 도전할 주변왕조가 없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을것 이다.
고려도경
高麗自唐以前 蓋居平壤 本漢武帝所置樂浪郡 而唐高宗所建都護府也 以唐志考之 平壤城乃在鴨綠水東南 唐末 高麗君長 懲累世兵革之難 稍徙移東 今王城在鴨綠之東南千餘里 非 平壤之舊
고구려는 당 나라 이전부터 도성이 평양에 있었다. (그 곳은) 본래 한 무제가 낙랑군을 설치했던 지역이며, 당 고종이 안동도호부를 둔 곳이다. 당서지리지를 살펴 보면 평양성은 압록수 동남에 있었는데, 당 말에 고려 군장들이 여러 대를 겪은 전란에 혼나서 점차 동쪽으로 도성을 옮겼다. 지금(고려)왕성은 압록수 동남 천여 리에 있는데, 옛 평양성이 아니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
晉陷高麗, 後歸慕容垂;子寶,以勾麗王安為平州牧居之. 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 遼東京本此.唐高宗平高麗,於此置安東都護府;後為渤海大氏所有.大氏始保挹婁之東牟 山.武后萬歲通天中,為契丹盡忠所逼,有乞乞仲象者,度遼水自固,武后封為震國公.傳子祚 榮,建都邑,自稱震王,併吞海北,地方五千里,兵數十萬.中宗賜所都曰忽汗州,封渤海郡王.十 有二世至彝震,僭號改元,擬建宮闕,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為遼東盛國.忽汗州即故平壤 城也, 號中京顯德府.(중략) 遼河出東北山口為范河,西南流為大口,入于海;東梁河自東山西流,與渾河合為小口,會遼河入于海,又名太子河,亦曰大梁水;渾河在東梁,范河之間;沙河出東南山西北流,徑蓋州入于海.有蒲河;清河;浿水,亦曰泥河,又曰蓒芋濼,水多蓒芋之草;駐蹕山,唐太宗征高麗,駐蹕其巔數日,勒石紀功焉,俗稱手山,山巔平石之上有掌指之狀,泉出其中,取之不竭.又有明王山,白石山--亦曰橫山. 天顯十三年,改南京為東京,府曰遼陽. 四萬六百四. 轄州府軍城八十七.〔四〕統縣九: 遼陽縣. 本渤海國金德縣地. 漢浿水縣, 高麗改為勾麗縣,渤海為常樂縣。戶一千五百.
서진이 고구려를 함락하고 후에 후연의 모용수가 돌아오자 그 아들 모용보 때 고구려왕 고안(광개토왕)이 평주목에 머무르다. 원위 태무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평양성에 머무르게 했던 곳이 요 동경으로 바로 그곳이다. 당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는데 나중에 대씨가 차지하였다.... 요나라 중종이 그곳을 내려 도읍을 세우고 홀한주라 하여 발해군왕을 봉하였다. 홀한주가 옛 평양성으로 중경현덕부라고 하였다.
<元史> 「地理志」 東寧路.
本高句驪平壤城 亦曰長安城 漢滅朝鮮 置樂浪玄菟郡 此樂浪地也 晉義熙後 其王高璉始居平壤城 唐征高麗 拔平壤 其國東徙 在鴨綠水之東南千餘裡 非平壤之舊 至王建 以平壤為西京 元至元六年(1269년) 李延齡 崔垣 玄元烈等 以府州縣鎮六十城來歸 八年(1271년)改西京為東寧府 十三年(1276년)升東寧路總管府 設錄事司 割靜州義州麟州 威遠鎮隸婆娑府 本路領司一 余城堙廢 不設司存 今姑存舊名.
동녕로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이다. 장안성이라고도 한다.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낙랑군, 현도군을 두었는데, 낙랑군 땅이다. 동진 의희(AD 405~418년) 후 고구려 장수왕 때부터 이 평양성에 기거하기 시작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이 평양을 점령하자 고구려는 동쪽으로 옮겼는데, (그곳은) 압록수 동남 천여리에 있다. 이곳은 전의 평양이 아니다. 고려 왕건 때에 이르러 평양을 서경으로 하였다. 원나라 지원(AD1264-1294년) 6년에 이연령, 최탄, 현원렬등이 부, 주, 현, 진 60성을 가지고 (원나라에) 귀복하였다. 지원 8년에 서경을 동녕부로 하였고, 지원 13년에 동녕로총관부로 승격시키고 녹사사를 두어 정주, 의주, 인주를 떼어서 관장하고, 위원진을 파사부에 예속시켰다. 동녕로에 영사 1인을 두고 나머지 성은 폐지하고 사(司)를 설치하지 않았다. 지금의 마고는 옛 명칭을 존속시킨 것이다.
장안성이라고도 하였다. 서진 의희(405~418) 이후 고구려왕 고련(장수왕)이 처음으로 평양성에 거하였다. 당이 고구려를 치자 그 나라는 동쪽으로 옮겨 평양은 압록수 동남쪽 천여리에 있다. 옛 평양이 아니다. 왕건에 이르러 평양을 서경으로 하였다. (현 평양 안학궁지)
<고려사> 志 卷第十二 地理 三 북계 서경유수관 평양부
平壤府本三朝鮮舊都. 唐堯戊辰歲, 神人降于檀木之下, 國人立爲君, 都平壤, 號檀君, 是爲前朝鮮. 周武王克商, 封箕子于朝鮮, 是爲後朝鮮. 逮四十一代孫準時, 有燕人衛滿, 亡命聚黨千餘人, 來奪準地, 都于王險城【險一作儉, 卽平壤】, 是爲衛滿朝鮮. 其孫右渠, 不肯奉詔, 漢武帝元封二年, 遣將討之, 定爲四郡, 以王險爲樂浪郡. 高句麗長壽王十五年, 自國內城, 徙都之. 寶藏王二十七年, 新羅文武王, 與唐夾攻, 滅之, 地遂入於新羅. 太祖元年, 以平壤荒廢, 量徙鹽·白·黃·海·鳳諸州民, 以實之, 爲大都護府. 尋爲西京. 光宗十一年, 改稱西都. 成宗十四年, 稱西京留守. 穆宗元年, 又改鎬京. 文宗十六年, 復稱西京留守官, 置京畿四道. 肅宗七年, 設文武班及五部. 仁宗十三年, 西京僧妙淸及柳旵, 分司侍郞趙匡等叛, 遣兵斷岊嶺道. 於是, 命元帥金富軾等, 將三軍, 討平之. 除留守·監軍·分司御史外, 悉汰官班, 尋削京畿四道, 置六縣. 元宗十年, 西北面兵馬使營記官崔坦·三和校尉李延齡等, 作亂, 殺留守, 以西京及諸城, 叛附于蒙古. 蒙古以西京爲東寧府, 置官吏, 畫慈悲嶺爲界. 忠烈王十六年, 元歸我西京及諸城, 遂復爲西京留守官. 恭愍王十八年, 設萬戶府. 後改爲平壤府.有大同江【卽浿江, 又名王城江. 江之下流, 爲九津溺水】. 有大城山【一云九龍山, 一云魯陽山. 文獻通考云, 平壤城東北, 有魯陽山, 卽謂此也. 山頂有三池】. 古城基二【一, 箕子時所築, 城內畫區用井田制. 一, 高麗成宗時所築】. 箕子墓【在府城北土山上】. 東明王墓【在府東南, 中和境龍山, 俗號珍珠墓. 又仁里坊有祠宇, 高麗以時降御押, 行祭, 朔望亦令其官, 行祭. 邑人至今有事輒禱. 世傳東明聖帝祠】. 乙密臺【臺在錦繡山頂, 臺下層崖之旁. 有永明寺, 卽東明王九梯宮. 內有麒麟窟, 窟南白銀灘. 有巖出沒潮水, 名曰朝天石】. 屬縣四.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겼다. 태조원년 이곳이 이미 황폐해지자 염주,백주,황주.해주,봉주 백성을 옮겨 채웠다. (중략) 묘청이 반란을 일으킨 곳. 원종10년 최탄,이연령이 반란을 일으켜 몽고에 귀부하였다. 이에 몽고가 서경을 동령부로하고 자비령을 경계로 하였다.
평양성에 대성산이 있는데 노양산이라고도 한다. 문헌통고에 이르길 평양성 동북에 노양산이 있다하였는데 바로 그곳이다. 정상에 연못 세개가 있고 옛성터가 두 개 있다.
读史方舆纪要 卷37 산동8
辽东旧都司城(현 요양),〈东至鸭绿江五百六十里,南至旅顺海口七百三十里,西至山海关一千一十五里,西北至大宁废卫八百六十里,东北至故建州卫七百九十里。自都司至山东布政司二千三百三十里,至江南江宁府三千四百里,至京师一千七百里。〉
평양성각자의 고고학적 변증과정 필히참고 (장수왕 천도시 또다른 명칭은 장안성,양원왕때 수리할때 한성이라고 일컬음.)
[新唐書] 권43, 志33下 地理7下, 羈縻州, 嶺南道, 諸蠻, 峯州都督府.
營州東百八十里至燕郡城. 又經汝羅守捉, 渡遼水
至安東都護府五百里. 府, 故漢襄平城也.
영주 동쪽180리 연군성에 이른다.또 여라수착(義縣추정)을 지나 요수를 지나 500리에 안동도호부에 이르는데 옛 한 양평성이다.
[武經總要] 前集 권16下, 邊方
地理志 宣州條.
營州東百八十里
凡九遞 至燕郡城 自燕郡東 經汝羅守捉 渡遼川 十七驛
至安東都護府約五百里.
영주
동으로 180리
아홉 역참을 지나면 연군성에
이르고, 연군
동쪽에서 여라수착을
지나 요천과
17개역을
지나 안동도호부 까지 약5백리이다.
(선주:辽置宜州崇义军,治弘政县,在今辽宁省义县东北二十五里,金改曰义州,移今义县治)-당나라때 위치 아님.
고고학으로 조사된 평안남도 평양의 유적으로 대성산성과 지금은 터만 남은 안학궁은 산성이 아닌 궁전으로 형성되어 두 건축물의 건축연대가 약간 다르다.
평양성의 내성과 외성은 발굴된 각석의 기록상 6세기에 42년간에 걸쳐 개축된 것이다. 이때가 양원왕 때로 요동의 평양성으로 옮기면서 수도로 사용하던 평양의 그곳은 한성으로 명칭이 바뀌고 중수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후 평안도 평양성 즉 한성에서 천남건이 당군에 최후로 저항하다가 사로잡힌 곳이다.
연남건 묘지명에서...
遼東朝鮮人...漢城不守貊弓入獻楛矢來王君以摠章元年襲我冠帶乃授司宰少卿仍.
요동조선인이다...한성(漢城)을 지키지 못함에 미쳐 맥궁(貊弓)이 입헌(入獻)되고 호시(楛矢)가 왕에게 바쳐졌다.
그는 요양 평양성에서 태어났다. 끝까지 저항한 죄로 2명의 형과 달리 이후의 종적이 없다.
두우의 통전에서 ' 위진때 좁아졌다가 수나라 이전에 고구려가 그 폭이 6천리로 늘어났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즉, 위진강성시에 국가안보를 위해 수도를 내지인 요양 평양으로 옮겼다가 위진이 망한후 혼란기에 국세를 평주 평양까지 진출하고 산동성과 하북성 남단까지 확대한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단고기 태백일사등과 로사,송서등은 장수왕때 평양성을 평주(하북 노룡)로 보았고 구신당서,통전,요사,원사등은 그 평양성을 현재의 요녕 요양으로 보고 있다. 어쨋건 평주가 전성기때(광개토왕~양원왕) 고구려의 수도였던 것은 맞다.
그 이유로는 ,
ⓐ 宋書에서 고련을 더하여 영.평주제군사로 한것.
ⓑ 수양제 조서에서"고구려가 발해와 갈석사이에 모여들어 그들의 땅을 침범하고 있다"
ⓒ 路史에서 고구려가 평주에 도읍을 했다.
ⓓ 晉書에서 모용황이 고안(광개토왕)을 평주목사로 했다.
결론적으로 초기평양은 의견이 분분하지만 요녕지역이 맞다. 국내성으로 알려졌던 集安도 고고학적으로 확실하지 않고 중기도성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중기부터 수나라 이전 까지 평양성은 지금의 노룡(평주)이다. 수양제의 침공조서에도 고구려가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들어 나라를 어지럽힌다고 하였기때문이다.
587년경 요양(요동성)을 평양으로 했는데, 한반도 평양성은 한성이었다가 당나라의 645년 이후 공세때 수도가 되었다. 667년 당나라의 총공세때 평양에서 분전하다가 끝을 맺고 연남건은 평양(한성)에서 항전하다가 보장왕과 함께 사로잡힌 것으로 보여진다.
여러자료 즉, 구당서,신당서,통전, 요사, 금사,원사등을 종합할때 고구려 수도로 사용되었던 곳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 하북 북경(유주)
ⓑ 하북 노룡(평주)
ⓒ 요녕 금주
ⓓ 요녕 심양
ⓔ 요녕 요양(요동)
ⓕ 요녕 봉성(평양)
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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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史穿 작성시간 19.02.27 마지막 平壤城 관련 隋書의 戰史:
六月己未,帝幸遼東城南,觀其城池形勢,因召諸將詰責之曰“...”諸將咸戰懼失色.帝因留止城西數里御六合城,我諸城堅守不下.左翊衛將軍來護兒帥江淮水軍舳艫數百里,浮海先進入自浿水去平壤六十里,與我軍相遇,進擊大破之.護兒欲乘勝趣其城,副摠管周法尙止之請俟諸軍至俱進,護兒不聽簡精甲數萬直造城下.我將伏兵於羅郭內空寺中,出兵與護兒戰而僞敗.護兒逐之入城,縱兵俘掠,無復部伍.伏兵發,護兒大敗僅而獲免,士卒還者不過數千人.我軍追至舡所,周法尙整陣待之,我軍乃退.護兒引兵還屯海浦,不敢復留應接諸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