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동성왕때에 이르러 482년,488,490년에 북위와 전쟁을 치루었다.
《남제서》 58권 동남이열전 백제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중략) 去庚午年 獫狁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僵尸丹野. 由是摧其銳氣, 鯨暴韜凶. 今邦宇謐靜, 實名等之略, 尋其功勳, 宜在襃顯.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 贊首流爲行安國將軍․辟中王, 解禮昆爲行武威將軍․弗中侯, 木干那前有軍功, 又拔臺舫, 爲行廣威將軍․面中侯. 伏願天恩特愍聽除. 又表曰: 臣所遣行龍驤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 行建武將軍․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 兼參軍․行振武將軍․朝鮮太守臣張塞, 行揚武將軍陳明, 在官忘私, 唯公是務, 見危授命, 蹈難弗顧. 今任臣使, 冒涉波險, 盡其至誠. 實宜進爵, 各假行署. 伏願聖朝特賜除正." 詔可, 竝賜軍號.
건무 2년에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중략) 지난 경오년(490)에는 험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거꾸로 쳐서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말을 몰아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베어죽이니 그 시체가 평원을 붉게 물들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기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실상 사법명 등의 꾀이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합니다. 이제 사법명을 가행 정로 장군 매라 왕으로, 찬수류를 가행 안국 장군 벽중 왕으로, 해례곤을 가행 무위 장군 불중후로 삼고, 목간나는 과거에 군공이 있는데다 또 누선(臺舫)을 깨뜨렸으므로 행 광위 장군 면중후로 삼았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천은을 베푸시어 특별히 관작을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또 표문을 올리기를“신이 사신으로 보낸 행 용양 장군 낙랑 태수 겸 장사 신 모견과 행 건무 장군 성양 태수 겸 사마 신 왕무와 겸 삼군 행 진위 장군 조선 태수 신 장새와 행 양무 장군 진명은 관직에 있어 사사로운 것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공무에만 힘써,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내던지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지금 신의 사신의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그의 지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실로 관직을 올려주어야 마땅하므로 각각 가행직에 임명하였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성조에서는 특별히 정식으로 관직을 제수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허락함과 아울러 장군의 호를 내려주었다.
주) 백제가 험윤이라고한 대상이 북위인데 일본서기에는 고구려를 험윤이라고 기술. 따라서 북위와 고구려의 민족적 관계를 짐작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토착호족인 위사좌평(衛士佐平) 겸 가림성주(加林城主) 백가(苩可)는 그를 설득하다 실패하였는지 칼을 들어 동성대왕을 시해하고 만다. 대륙내에 대식민지를 건설하려던 동성대왕은 신하의 칼을 맞고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 때가 501년 12월의 일이다. 대왕의 나이 불과 37세, 재위 23년 만이다.
백제에게 패한 북위의 종말은 다음과 같다.
[魏書] 卷7 高祖紀下 太和22年紀
秋七月壬午,詔曰:「朕以寡德,屬茲靖亂,實賴羣英,凱清南夏,宜約躬賞效,以勸茂績。后之私府,便可損半;六宮嬪御,五服男女,常恤恒供,亦令減半;在戎之親,三分省一。
태화 22년(532) 7월 왕실과 궁중의 모든 경비를 절반으로 줄이고, 또 근위대의 삼분의 일을 축소했다.
다음해인 533년 북위는 망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 第27 百濟本紀 第5 威德王 18년
高齊後主又以王爲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
18년(571) 고제의 후주가 왕(위덕왕)에게 사지절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의 직함을 주었다.
이 말은 백제가 산동성 청주 동부지역을 차지하고 관할했다는 것을 뜻한다.
청주는 지금의 제남으로 전략적 요충지로 제남군구 사령부가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475년 개로왕이 장수왕에의해 참살당한뒤 불과40여년만인 무녕왕때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단시간에 강국으로 회복된 원인은 무엇일까?
백제의 일본 분국의 도움과 대륙의 鹽貿易 집단인 백제인들로 부터 강력한 지원을 받지 않았을까?
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