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 위략은 <부여는 자원이 풍부하고 그 곳에 자리잡은 이래 파괴된적이 없었다(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甞破壞也)하는 기록>이 있다. 진수는 그곳 노인들로 부터 들은 예기를; <옛적에 도망온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성을 쌓았다(作城柵皆員). 마치 감옥같았다. 예맥 땅에 있던 예성(濊城)이다. 그 안에 옥갑이 있고, 은정월 (전욱역; 顓頊歷,상달,초사흘, 3일)에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전국적인(殷正月祭天,國中大會) 행사를 지냈다 . 자기들은 도망온 사람들이다>라고 남겼다.
부여인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경로를 통하여 그 곳에 도망을 왔는지는 운영자의 저서에서 밝혔다.기원전 208년의 흉노 모돈선우 침입과 BC108년 한무제가 우거왕을 침입했던 시절에도 부여성(夫餘城, 濊城)은 점령당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공손도가 남만주(양평)에 나타난 시기부터 공손연이 주살당한 내용을 옳바로 판독해야 동북아시아 상고사의 문젯점이 풀린다. 5호16국의 혼란한 시대에 중국사가들이 너무 이리저리 휘돌려 섞어놓아 맥을 잡아 풀이하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역사연구가들이 이해를 못하는 부분임)
공손홍(公孫弘)이 한무제(漢武帝)의 재상으로 있을 당시인, BC128년에 창해군 (蒼海郡;滄海之郡)을 설치했다. 전한때 그의 후손 공손도(公孫度)가 산양태수(山陽太守)가 된지 10년만에 죄를 지어서 작위를 잃었다. 사마천이 살아있을때 작위를 삭탈당했다. 같은사건을 전한서 제후년표에는 <어느 후손 경(侯慶)이 BC107년 (元封4), 전쟁이 끝난 다음해)에 일설에는 사통 또는 근친 강간이라는 경미한 죄로 작위와 봉지를 잃었다. 일설에는 가혹한 벌이 무서워 도둑의 소굴이였던 현토땅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제후년표에 적힌 후경(侯慶)이 공손홍전에는 공손도 (公孫度)로 기록되었다. 한서 제후년표에는 <해변가 출신 공손홍이 재상(宰相)에 이르러 황실의 은총을 받아 열후의 패자가 되였다. 그 후손 양산태수 도(山陽太守 度)가 죄를지어 5년 동안 성을 쌓는 형벌(完為城旦)을 마쳤다. 고성(高城), 즉 성이 높다 라고 했다. 당시에 요동(遼東)에 현토성(玄菟城)을 쌓았다는 노역장에서 일한 듯하다.
사기 평진후 <공손홍 열전>에; “태사공왈(太史公曰)하고 사마천이 글을 끝낸 다음에, 어느 태상황후(太皇太后)가 공손홍의 후손을 찾아 한(西漢)나라 서울에 살게 하라고 지시했지만 조정에서는 <찾을 수 없다고 알렸다>는 기록을 “반고칭왈 공손홍 (班固稱曰; 公孫弘)”하는 긴 문구를 첨가하여 설명했다. 한서 고혜고후 문공신열표(漢書高惠高后文功臣表)에는 선조는 밝히지 않고 기원후2년(元始二年)에 “후경이 꺼려서(侯慶忌) 오만한 현손이(敖玄孫紹封)이어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지 저자 진수는 신원이 분명치 않은 공손도 (公孫度)란 이름을 정당화 하려고 공손강(康)이 공손도의 아들이라고 했다. 고구려전에는 공손씨 3명(公孫度-康-淵) 이름이 실려있다. 공손도(度)는 169년에, 공손강(康)은 고국천왕(故國川王,재위:179~197)사후 왕위 계승문제로 발기(發岐)가 공손강에게 귀화했다는 사건에 나타난다. 이를 진수는 건안중(建安中;196-220)이라 했다. 사건은 후한시대 발생했다. 후한서에는 공손도(公孫度)란 이름이 두 번 나온다. 건안2년(建安二年, 169년)에 칙소를 내려 유능한 사람(有道之士)을 찾았다. 사필(謝弼)과 동해 사람 진돈 (東海陳敦)과 현토 공손도(玄菟公孫度) 세사람이 모두 심의대상이 되어 낭중에서 제거(皆除郎中) 되였다. 고구려와 관계하여 공을 세웠다는 근거가 없다.
건안 12년(建安12年, 207)에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이 자기진영으로 피신온 원상(袁尙, ? ~ 207) 형제를 죽여 그들의 수급을 조조에게 바쳤다. 태평어람에는 위지(魏志)의 내용을 인용하여 <공손강이 죽고 그의 아들 황(子晃)과 연(淵)이 모두 어려 여러 사람들이 동생 공손공(恭)에게 지도권을 맏겼으나 능력이 없어 공손연이 탈취했다>고 했다. 공손연은 30년후(景初元年, 237)에 양평성에서 사마선왕(사마의)에게 잡혀 주살당했다. 공손씨에 관한 사료의 출처는 진수의 삼국지다.
통전(通典) 고구려편에는 같은 내용을 기록하면서 <박위거(駮位居)란 이름을 삭제> 했다 . 또한 왜(倭)는 사음자라하고, 왜와 부여는 후한시대 부터, 백제와 신라는 조위시절부터 조공을 바쳤다고 했다. 부여, 고구려, 백제, 왜, 신라가 모두 만주에 있었다는 증거다. 부여왕 위구대(尉仇台)가 공손도(公孫度)와 결합한 대륙백제가 남만주 해안선을 통치했다는 뜻이다. 고구려는 <나라를 양보 했다는 별명 국양왕(國壤王) 이리모(伊夷模)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179~197) 13년(191)에 졸본부여에서 밀려 압록강 서쪽에 있던 환도성(丸都城)으로 옮겼다.
부여에서 위거가 계부를 죽여(位居殺季父父子) 왕권이 바뀐 사건은 245년에 무구검이 환도성을 침략한 사건 이후에 발생했다. 진수(陳壽 233-297)와 관구검 (毌丘儉, ? ~ 255)은 같은시대 사람이다. 진수가 집필할 당시에 발생했던 사건이다.
고구려는 238년에 사마중달이 이끌고온 조위 무구검을 도와 졸본부여 수도 양평성(襄平城)에 숨어 있던 공손연을 제거했다. 공손연의 사슬에서 풀려난 졸본부여 사람들이 조위 조정을 찾아 (歲歲遣使詣京都) 고맙다고 했다. 공손연이 주살 당한 뒤에 고구려는 졸본부여의 수도 양평성(襄平城=노룡현)을 수리하고 그곳으로 천도했다. 이곳이 평양(平壤)이다. 공손연 통치하에 있던 대륙백제가 소유했던 졸본부여는 조위에 협조를 요구했다(歲歲遣使詣京都). 공손씨와 부여의 혈연관계를 이은 공손연(公孫淵)이 사라진 이후에는 국경을 마주하자 요동의 주도권을 놓고 몇차례 고구려와 조위간 전쟁이 발생했다.
조위가 243년에 동천왕의 환도성을 점령한 전쟁때 부여사람들이 관구검을 도와 군수 물자를 윤송해 주었다. 진수는 부여전에 위략의 내용을 인용하여 (魏畧曰) 공손도가 남만주에 들어온 이후부터 <조용했던 (未甞破壞) 졸본주(卒本州)에 풍파가 일었다>고 했다. 졸본부여의 통치권을 놓고 고구려와 대륙백제가 오랫동안 싸웠다는 뜻이다.
후대에 북제(北齊)의 건국기반을 닦은 고환(高歡; 496-547)의 6대 선조가 조위시대 쯤에 현토태수(晉玄菟太守) 고은(高隱)이라고 한다. 고은(高隱)은 “은거한 사람”이란 뜻이다.그가 고담(高瞻)의 숙부(叔父隱)다. 모용외때 평주자사(平州刺史) 최필(崔毖)과 같이 서진말기 영가의난 (永嘉之亂; 永嘉 307~312)에 나타난다.진서 모용외전에도 고담의 숙부은(叔父隱) 이라고 했다. 자치통감 (資治通鑑)에는 고은(高隱)이란 이름은 없고, 동진 332년에 처사요동고후(處士遼東高詡)를 현도태수로 임명(高詡為玄菟太守)했다.
모용황(慕容皝, 297~348, 재위:337 ~348)이 전연(前燕)의 초대황제가 되기전에 고구려15대 미천왕(美川王, 재위 : 300-331)과 요동만 서쪽에서 세력다툼을 했다. 동진(東晉)의 평주자사 (平州刺史) 최비가 320년에 고구려로 도망을 오고(崔毖來奔), 현토태수 고후 이외 여러사람은 성을 버리고(玄菟 太守高詡等 棄城奔還) 모용황 진영으로 도주했다.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도 같은 내용이 실렸다. 태평어람(太平御覽)에는 고후(高詡)가 동서진(東, 西晉) 교차기(高祖)에 “自王公政錯, 士人失望” 라는 문구를 써서 진(晉)왕조를 설득시키려 했다. 고후(高詡)가 왕공(王公)의 후손이란 뜻이다. 진서(晉書)와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도 나온 현토태수 고후(玄菟太守 高詡)가 처사요동고후(處士遼東高詡)라고한 고은(高隱)이다. 대륙백제의 선조는 졸본부여(卒本扶餘) 사람이고, 그 후손이 서진 현토태수 (晉玄菟太守) 고은(高隱) 이다.모용(慕容)씨가 대륙백제고(高)씨의 동반자가 되였다.
공손씨(公孫氏)란 이름이 삼국사기에 121년에 고구려를 침입해 왔던 요동태수 채풍을 제몸으로 막으려다 죽은 마부 공손포(公孫酺)로 처음으로 나온다. 삼국지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후한서에 같은 사건으로 나타났다. 마부 공손포가 죽은해에 6대 태조왕 (太祖王, 재위 53~146)이 현토성을 포위했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대
(尉仇台)를 보내 한나라 군사를 도와 고구려 군사가 패했다. 부여왕 위구대와 공손도가 있던 곳은 발해만 서남쪽 옛 대방땅(현 창려지역)이 분명하다.
진수가 부여왕 “우대(優台)를 비하하여 원수 구(仇)를 넣어 새로만든 이름”이 위구대 (尉仇台)다. 우 또는 위(위에 높은)로 기록한 글자(衛, 魏,禹)는 높다는 뜻의 사음자다. 이를 훈역한 글자가; 높을 고, 최, 원(高,崔,元)하는 글자다. 그에게 공손도가 딸을 바쳤고 우대(優台)의 아들은 죽었다.
신대왕(新大王;재위 165~179) 사망후에 큰 아들 발기(拔奇)가 공손도에 항복했다가 비류수상에 되돌아와 살았다는 사건이 나타났다. 이는 졸본부여 일대의 통치권이 발해만 연안에 있던 백제 비류왕의 후손으로 넘어갔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는 이사건을 백제본기에 실었다. 졸본부여에서 내려와 옛 대방땅 미추홀 (彌鄒忽; 천진 일대 발해만 서안)에 수도를 정했다. (부여란 이름이 여기저기에 나타나니까) 어느설이 옳은가를 알 수 없다고 했다. 뒤에는 비류왕의 후손이 졸본부여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후에도 조상을 같이한 고구려와 백제간에 졸본부여의 통치권이 여러번 바뀌었다.
후한 말에 공손도가 옛 요동땅 남쪽을 잘라 천진-당산 일대에 대방군을 새로 설치했다. 비류왕이 그곳에서 백제를 세웠다. 이를 중국문헌을 인용하여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대방고지에 수도를 정했다(帶方故地)고 했다. 온조왕의 형 비류(沸流)가 졸본부여에서 옛 통로 였던 발해만 서안을 따라 천진-당산일대에 수도를 정했다. 이를 대륙 백제라고 이르는것이 타당하다. 백제역사에 비류(沸流)와 같은 발음을 다른 글자로 적은 비류(比流, 毗有)가 몇사람 왕이 되었다.
그는 228년(太和二年)에 숙부 공손공(公孫恭)의 작위를 빼았아 조위 명제(曹丕)로 부터 요동태수 (遼東太守) 작위를 받고 강남 손권에 사신을 보내서 뇌물을 주고받았다 . 손권은 237년12월에 장미와 허안(張彌,許晏等)이 인솔한 사절단을 양평(襄平)에 보내서 공손연을 연왕(燕王)에 봉했다. 마음이 불안하여 봄 정월 (春正月)에는 칙소를 내렸다. 그 내용에 유주·청주·요동태수 연왕 “今使持節督幽州領青州牧 遼東太守 燕王” 이라는 문구가 있다 . 공손연의 영향력이 미치던 지역은 활모양 같이 ( “C” shape)산동성 북쪽에서 발해만 서쪽 해안을 돌아 요하입구에 이르는 지역이다. 진서(晉書)에 <공손도가 원주민, 대륙백제 사람들을 이용하여 발해만, 한해(翰海)의 해상교류를 장악 했다.>는 문구와 일치한다.
강남의 손권이 보냈던 사신을 죽여가며 잔꾀를 부리던 공손연은 237년에 무구검의 공격을 받았다. 요하를 건너 천애의 요새 양평성에 방진을 첬다. 관구검이 인솔하고 왔던 조위군이 명령에 따라 회군하자, 공손연은 연왕(燕王)이라고 자칭했다. 몇달후에 사마중달(의)이 4만명의 조위군사를 인솔하고 와서 고구려를 비롯한 고조선의 후예들(鮮卑)이 협조하여 공손연을 토벌했다. 사마중달은 조위 중진들의 모략으로 넉넉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남만주와 한해 (翰海)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고조선 후예들을 이용하여 공손연 토벌작전에 성공 했다. 공손연이 잡힌곳이 옛적부터 예맥 (濊貊)족의 수도 예성(濊城)이라 하던 부여왕이 살았던 곳이다.
공손도 일당이 사라진후 해안일대를 장악한 대륙백제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공손연(公孫淵, ? ~ 238) 이 주살 당한후 그의 영향력이 미치던 활 모양의 지역에 관한 역사는 둘로 나누어 요동만 서북쪽에서 요하 입구에 이르는 지역은 삼국사기에 실려있다. 요동만 서남쪽에서 산동성 북부에 이르는 지역의 역사는. 중국기록에실렸다. 오호십육국이 등장한 혼란기라 중국측의 사료가 혼잡하다. 중국기록으로는 진서, 오호 십육국 시대 (五胡十六國時代: 304~439) 역사서 십육국춘추, 북사와 위서, 그리로 남조의 송서(宋書) 등에 숨어 있다. 뜻밖에, 그후 당-송시대에 편찬된 사서에 오호십육국 시대의 역사가 나타나기도 한다.
강남의 손권이 고구려와 밀약을 하려고 사신을 보냈다. 동천왕 (東川王, 재위: 227~248)은 재위 10년인 236년 봄에 도착한 손권이 보낸 사신을 7월에 처형하여 수급을 조위에 바쳤다. 다음해 조위에서 경초 원년
(景初元年, 237)으로 정한 행사에 사신을 보냈다. 그 다음해인 238년에는 사마중달이 인솔하여 공손연을 토벌하려는 작전에 협조하여 파병했다. 공손연이 주살당한지 4년 뒤인 242년에는 왕이 직접 인솔하여 발해만 연안의 요동 서안평(遼東西安平) 을 공격했다. 고구려의 세력이 확대되자 재위 19년(245)에는 요동반도 동쪽 옥저땅에서 미녀를 바쳐 내부했다. 발해만 서쪽에 있던 신라 북쪽을 점령했다. 이렇게 공손연 치하에
있던 남만주 요동만 연안을 모두 고구려가 통치하게 되었다. 이에 졸본부여(대륙백제의 일부 영역) 일대를 돌보아 주던 조위는 246년에 유주자사 무구검(毋丘儉)을 총사령관으로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예전과 달리 졸본부여의 지역민이 조위에 협조하여 전쟁에서 크게 패망했다. 졸본부여에는 득래(得來)라는 사람이 동천왕의 국토확장 정책에 반대하여 단식투쟁을 하다 죽었다. 관구검은 그의 묘지를 극진히 돌보아 주었다. 수도 환도성(丸都城)을 점령한 무구검(毋丘儉)은 돌아가고, 현토태수 왕기(王頎)를 선봉장으로 보내 동천왕을 추격했다 . 왕은 몇년 전에 내부했던 요동반도 남쪽 옥저땅으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유유(紐由)의 묘책이 성공하여 적군을 대파했다. 전쟁이 끝나고, 247년(재위21년)에는 공손연이 숨었던 졸본부여 양평성(襄平城)을 수리하고 수도로 정했다. 이곳이 평양성(平壤城)이다.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248)이 247년에 관구검을 도와주었던 양맥곡(심양지역)의 숙신씨가 소유했던 평양성(平壤城, 瀋陽추정)으로 수도를 옮기자, 그 지역 토착민 숙신씨 (肅愼)가 이를 되찾으려고 반항했다.동천왕의 아들 연불(然弗)이 뒤를 이은 중천왕(中川王, 재위 248~270) 이다.259년에 조위가 졸본부여까지 침입하였다. 양맥(梁貊)에서 싸워서 이겼다.
중천왕의 둘째아들 약로(藥盧)가 뒤를 이은 13대 서천왕(西川王, 재위 :270- 292) 이다. 졸본부여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서천왕은 여러 중진의 추천으로 동생 달가(達賈)를 사령관으로 단로성(檀盧城)을 빼앗고 진압했다. 동생을 안국군 (安國君)으로 봉해서 졸본부여의 독립운동을 막았다. 달가(達賈)는 졸본부여의 추장을 죽이고 6백여 가구를 부여 남쪽의 오천(烏川)으로 이주시키니 그 곳에 있던 6-7부락이 항복해 왔다. 졸본부여 남쪽지역이다.
다음해(295년)에는 서진이 약해짐틈을 타 전연(前燕)을 세운 모용황(慕容皝)의 아버지 모용외(慕容廆, 269-333)가 침입했다. 고구려에 졸본부여를 빼았긴 모용씨의 첫공격이였다. 또 다시 296년에는 천추의 원수 고구려를 쳐들어와 서천왕릉을 도굴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성역 졸본부여를 소유하려는 치열한 투쟁의 한 면모다. 고구려가 247년에 수도를 졸본부여로 옮긴 뒤로는 요동반도 끝에 남아있던 (한반도) 백제와 요동만 서쪽을 관장 하던 대륙백제가 합세한 대백제(大百濟)세력과 오랫동안 싸웠다.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 (故國原王, 재위: 331~ 371)이 요동반도에 있던 백제 치양성 (雉壤)을 치려다 실패했다. 다음해에 백제가 반격하여 졸본부여에 들어왔다. 고국원왕이 여기서 평양성을 방어하다 전사했다 .
고구려는 16대 부터 19대 광개토대왕이 만주를 통일할 때 까지 동이 최강국이였던 대백제(大百濟) 세력과 싸웠다. 고구려의 전쟁 상대가 서쪽은 진 (秦), 현토, 요동, 글안, 연(燕), 모용씨 (慕容), 왜(倭) 로 나오고 요동만 끝에 있던 온조왕의 영역은 백제로 실렸다. 고국양왕은 요동만 서북쪽 해안에 있던 신라을 인질로 삼았다. 고국양왕의 아들 광개토왕이 남만주를 통일한 내용은 광개토왕(廣開土王) 비문에 실렸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백제왕 부여경 (王 扶餘慶)을 대동강 하류에 있던 수도 한성(漢城)에서 몰아내고 영토를 확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해의 주도권을 잡았던 “삼한의 후예들 (백제,신라,가야,일본,유구)이 만주를 떠나 뱃길로 중국 동쪽 바다에서 부터 한해(翰海)의 동서 해안에 흐터저 있는 여러섬으로 퍼져나갔다.
사마선왕이 공손씨를 정벌한후 그여왕이 사신을 대방에 보내 천자를 만났다. 그후로 공빙이 그치지 않았다. 문제는 그들을 재상으로 임명하여(文帝作相) 여러해를 지났다. 태시초(泰始:265-274년)에 다시 와서 조공을 바쳤다.> 졸본부여 지역 또는 대방사람들(汗人, 倭人)이 서진의 조정에서 높은직을 맡아 보았다는 뜻이다. 사마씨가 서진을 세운 뒤에는 왜(倭)라고 기록되던 대륙백제 사람들이 서진의 중진으로 일했다. 진수는 이사실을 부여전(夫餘傳)에 실어 매년 조위 수도에 사신을 보넸다(歲歲遣使詣京都貢獻)고 기록 했다.
진서 본기(晉書 帝紀)에는 사마씨가 강남으로 쫓겨간 이후인 동진시대(東晉, 317~420) 372년(咸安2年)에 처음으로 백제(百濟)가 나온다. 진서보다 2세대 후에 편찬된 통전(通典)에는 삼국지에 나타난 오림이낙랑 (吳林以樂浪)사건이 실렸다. 마한왕이 서진 황실을 찾았다지만 진서(晉書)에는 오림이 낙랑사건이 없고, 여러 나라와 같이 287년에 마한(馬韓)이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했다. 한국이나 일본역사서에는 그때에 서진(西晉)과 교류 했다는 기록이없다.이 사건을 설명한 통전에 나오는 마한왕 (馬韓王)은 한반도 사람이아니라, 대륙에 있던 마한, 즉 대륙백제왕이 분명하다.
양나라 때 소자현이 편찬한 남제서(南齊書)에는 대륙백제가 하북평원에서 활발하게 해양권을 소유한 강자로서 대륙을 본향으로 하던 선비족과 싸웠다. 진동대장군 백제왕 모대(鎮東大將軍百濟王牟大) 즉 동성왕이 올린 표(表曰)에, <태시중에이르러 (泰始; 465-471) 서는 이웃에 있던 송나라에 사신 (比使宋朝)을 보냈다.
조부 모도(牟都)의 작위를 이어받아 백제왕에 봉했다. 위로(魏虜) 수십만명이 백제를 공격하려고 국경을 넘어와서 해례곤(解禮昆)과 목간나(木干那)등을 보내 크게 무찔렀다,
백제왕 모대(牟大)의 선조는 대륙백제 고(高)씨가 모용씨(慕容)와 같이 서진 말기에 서쪽에서 나타난 선비족 탁발씨 (托跋氏)의 침입을 맞아 싸워이긴 상황을 설명했다. 대륙백제의 혈통을 <여러번 연(燕)이란 나라를 세웠던 모용씨>로 기록했다. 전연(前燕)의 초대황제가 된 모용황 (慕容皝,297년- 348년)을 조선공(朝鮮公)으로 봉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모용황 (慕容皝)이 346년에 부여를 흡수한 내력을 다음과 같이설명 했다 :“夫餘居于鹿山,為百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 遂拔夫餘,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皝以玄為鎮軍將軍,妻以女.” <대륙백제가 부여를 친입한 와중에 록산(夫餘居于鹿山, 의무려산?)에 있던 부여왕현(夫餘王玄)을 잡아 그의 딸을 부인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기록은 3세기초 공손도가 부여왕의 딸을 처로 취하여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는 사실과 동일하다.
부여왕현(夫餘王 玄)의 후손이 동위의 발해왕 고환(渤海獻武王歡)이고 그의 큰아들 이 고등(高澄, 521년-549년)이다. 동생 고양이 북제 초대황제(北齊文宣帝 高洋, 526년-559년)가 되여 형을 세종 문양제(世宗 文襄帝)로 추존했다.
부여는 왕이 자살하고 한 분파는 고구려로 도망갔다. 동진(東晉)의 평주 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가 고구려, 선비모용부, 단부(段部)와 우문부(宇文部)의 중간에서 재간을 부리다 실패하여 고구려로 도망 왔다. 5호16국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십육국춘추는 모용수(慕容垂)가 건국한 후연(後燕, 384~407)은 부여왕 의려 (依慮)의 후손 재상 여위(餘蔚)를 부여왕에 책봉했다. 태평광기는 월주(越州)에 부여현 (扶餘縣)과 부여위정안(扶餘尉程顏)이 있었다 .삼국지에는 신구당서에 백제의 서쪽이 월주라고 했다. 중국 양자강 이남지역 즉 오늘의 절강성(浙江省)으로 알려졌다. 부여의 후손들이 방대한 한해(翰海=서한만연안)의 동서연안에 흩어져 살았다는 증거다.
전진(前秦)은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다 395년에는 관중으로 잡혀왔던 모용(慕容)씨에게 다시 옥새를 빼았겼다. 이를 서연(西燕;384~394) 이라고 한다. 서연은 강남으로 도망 갔던 동진(東晉; 317~420)을 괴롭혔다. 서연(西燕)은 같은 선비족 모용수(慕容垂)가 건국한 후연(後燕,384-407)에 옥새를 넘겼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발해만 연안에 있던 비류왕의 후손 고환 (高歡, 496~547)이 나타났다. 모용씨와 같은 고조선의 후예 선비족(鮮卑)이다. 고환의 둘째 아들 고양(高洋, 526~559)이 동위 (東魏, 534~550)로 부터 옥새를 물러 받고 북제(北齊)를 세웠다. 그로 부터 옥새를 빼았은 북주의 역사서(周書)에는 고(高)씨를 제씨(齊氏)로 바꾸어, 제씨가 동하(東夏)를 제멋대로 했다.
건국초에는 고씨와 공신(功臣)들을 전역에 왕으로 봉하여 국력이 왕성하여 하북 전역을 통치하고 옥새를 받은 해를 기준으로 천보력(天保歷)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리고 북제인구의 20%를 동원하여 성 상산까지 장성을 쌓았다.이 옥새를 인수 받고 태극전앞 (太極前殿)에서 동위 무정8년 (550년)을 천보원년(天保元年)이라 했다. 대백제(大百濟)의 일부였던 한해의 동남쪽 섬나라에서는 천보력(天保歷)을 사용했다는 근거가 있다.
북제서(北齊書)는 마지막왕이 어린나이에 피살당한 항(恒)이라고 했다. 통전(通典)과 자치통감에는 북제후주 고위(高緯)라고 했다. 북사(北史)에는 북제서와 같이 황태자는 항(皇子恒)이고, 고연종(高延宗)이 군주로 위장한 고위(僞主高緯)라고했다. 고연종(高延宗)이 안덕왕(延宗為安德王)이다.주서에서는 그를 북제의 가짜 집권자(偽主高緯)라고 했고, 온국공 고위 (誅溫國公高緯)라고도 했다.
북제(北齊)의 시조는 <하륙훈, 고환(高歡, 字賀六渾)이다. 그의 6대조은 (六世祖隱)이 진 현토태수(晉玄菟太守)를 지냈다. 그후 3대가 모용씨를 모셨다. 후연(後燕)의 제2대 황제 모용보(慕容寶, 재위 : 396~398)가 패망하자 후연 전역에 난리가 났다. 새로 등장한 위에 의탁(仕魏) 했다. 그후 발해 연안 (勃海蓚人)에 살던 사람의 후손 고환(高歡, 字賀六渾;?- 496)이 북위(北魏,後魏, 拓跋魏, 元魏) 효문제(北魏 孝文帝, 471- 499)의 승상으로 정권분쟁이 발생하자 어린 손자 원선(元善) 효정제를 옹립하고 534년에 수도를 업(鄴,하북성 한단)으로 옮기고 동위 (東魏;534-550)를 세워 서위(西魏)와 대립 했다.
고환(高歡)이 병사하고 둘째아들 고양(高洋)이 550년에 동위 무정8년에 효정제(東魏 孝靜帝)로 부터 선양받아 천보원년(改武定八年為天保元年)으로 바꾸고, 옛적에 제환공 (齊桓公)이 패자로 군림한 곳이라 하여 국호를 제(齊)라고 바꾸었다.
북제(北齊)의 선조는 부여(夫餘, 扶餘)에서 왔다. 그러나 북제서(北齊書)에는 부여(夫餘, 扶餘)란 이름이 없다. 북제로 부터 옥새를 이어받은 북주(北周, 557~ 581)의 역사서 주서(周書)에 <다른 여러 사서에서와 같이 백제가 부여에서 왔다>하고, 백제를 아래와 같이 설명 했다 :<유구대(有仇台)가 대방에서 나라를 시작 했다. 왕의 성이 부여씨(王姓夫餘氏)다. 고마성에서 다스렸다(治固麻城). 이외에 다섯 방향(其外更有五方)에 성이 있다. 달솔(達率)이 각 방의 수령이다. (남조) 송제 양 (東晉, 宋、齊、梁) 때는 양자강 동쪽(據江左)에 있었다. 후위(後魏)시대에는 중원에 살며 번국으로 사신을 보내 (遣使稱藩)던 (부여)융이 죽고 (부여)창이 왕이 되였다. 577년(建德六年)에 제를 멸망(齊滅) 시켰다. 또 다시 북주(北周) 무제(武帝) 때인 578년 (宣政元年) 에도 사신을 보냈다.>라고. 그러나 망했던 나라가 다음해에 사신을 보낼수는 없다. 한반도 또는 일본열도 아니면, <하북평원에서 북제를 세웠던 같은 혈통이 강남에서 살아 이들을 백제(百濟)라고 했다>고 본다. 그들이 북주가 건국한 해에 사절단을 강북에 보냈다.
수문제가 중국 동남쪽해안을 소유했던 진나라를 589년에 정벌했다. 그때 수나라 전함 한척이 제주도(耽牟羅國)에 표류했다. 이 배를 백제의 국경을 통하여 수나라에 돌려보냈다. 경우국경(經于國界)이란 표현은 복건성 연안에 있던 대륙백제의 잔여 마을이 있던 지역을 통하여 배를 돌려주었다는 뜻이다. 제주도(濟州島)란 이름이 백제 전성기에 해상통로의 중심이라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본다. 주서에 실린 백제오방은 한해 전역에 흐터저 있던 대백제의 통치영역을 뜻했어야 옳다. 그러나 백제의 병력을 설명한 내용을 보면, 최치원의 설명과는 다르다. 백제의 영역과 오방을 한반도 서남쪽으로 국한시켰다.
그 후에 문구는 북제 집권층, 제씨(齊氏) 즉 높다는 위(魏)씨를 훈역한 글자 고씨(高氏)의 연혁이다. 이문장을 풀이하면 대륙백제의 남쪽영역이 나타난다; <중국 남조의 동진,송, 남제(齊,南齊, 蕭齊; 479~502),양 (梁; 502~557)과 이웃하여 강의 동쪽 (據江左)에>, 북쪽으로는 <북조의 후위(北;魏386~534) 시절에는 중원>에 살면서 사신을 보내고 번국으로 인정을 받았다. 고씨(齊氏)가 동하(東夏)를 제멋대로 했다. 멋대로 할 천 (擅, 扌:亶)자는 사직단(亶)에 손을 댔다는 뜻으로 옥새(國璽)가 고씨(齊氏) 수중에 갔다는 뜻을 지닌 글자다.
고씨왕 융(其王隆)이 (전과 같이)사신을 보내 교류가 있었다. 융이 죽고 아들 창(昌)이 뒤를 이어받았다. 577년에 제를 파멸시켰다. 그왕 융(其王隆)이 백제왕 부여융(百濟王餘隆)으로, 아들 창은 부여 창 (百濟王餘昌)으로 풀이 된다. 다음 해인 578년에 창이 (다시) 사신을 보내 토산물(獻方物)을 바쳤다. 창이 사신을 보내 선물을 바쳤다는 백제는 한해의 동쪽에 있던 반도백제가 분명하다.마지막 문구 “又遣使來獻” 또한 북주(北周)가 승자입장에서 조공을 계속바쳤다는 사실을 되풀이 강조하기 위해 남긴 사족(蛇足)이다.
삼한의 후예 중에 “齊氏擅東夏”라고 비하 했던 대륙백제가 중원의 옥새를 27년동안 소유했었다 . 주서에는
북제주의 이름이 창왕 모다루(齊昌王莫多婁)이라고 했다. 충청도 부여에서 발굴된 위덕왕 기원사리함 금석문에는 위덕왕을 창(昌)이라고 했다. 운영자는 문주왕이름 牟多,동성왕 牟大의 牟와 莫이 같은음으로 성이 같은 묘용계의 혈족으로 보았다.(신라와의 결혼동맹이 결정적)
이렇게 대륙백제는 중국사서에서 첫시조부터 최후까지 집권자의 이름을 혼잡스럽게 기록했다. 북제의 기반을 닦은 고환(高歡)이 처음에는 동위(東魏)의 발해왕(渤海王)으로 나온다. 그가 깊히 관여했던 <북위,동위(東魏)의 이름이 이리저리 바뀌고, 그의 아들 10여명이 모두 왕>으로 추존되었다 . 난능왕(蘭陵王) 광녕왕(廣寧王)하는 이름도 있다. 평원왕 양성 (平原王, 諱陽成;재위 : 559~590)을 탕(世子 湯) 이라 했듯이, 고씨(高氏)가 하북평원을 다스리던 시기에 나타났던 여러 왕의 칭호가 와전 되여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타난 왕들의 이름이라고 본다.
수서(隋書)에는 유구(流求國, Okinawa)를 설명 했다 :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왕의 성이 환사씨(歡斯氏),이름은 갈라두(名渴剌兜) 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몇대전에 어디서 왔는지를 아무도 모른다. 그 사람들은 눈이 깊고 코가 길다(人深目長鼻) (동)호와 비슷한 종류(頗類於胡)다. 또한 작고 빠리빠리한 사람(亦有小慧)도 있다. 왜에서 사신이 왔다. 유구국의 물건이라고 했다. 곤륜인이 그들의 말을 약간 이해 할수 있었다(昆侖人頗解其語)>. 수서 유구전 내용을 보면, <남만주에서 한해를 따라 북쪽에서 한반도를 통하여 대한 해협을 건너온 동호인(東胡, 胡, 豪, 倭人)이 남방에서 올라온 키가 작은 사람들(倭人)이 사는 나라>를 통치했다.
백제(百濟)가 한해 (翰海)의 동서 연안과 멀리 유구에 까지 흩어져 있었다는 사료다. 이를 대백제(大百濟) 연맹체라고 부름이 타당 하다. 백제의 멸망 소식을 듣고 일본과 탐라에서 지원군이 왔다. 부흥운동을 주관했던 흑치상치가 백제 서부인(西部人)이다.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해안에 있던 대륙백제가 본향 또는 그곳에 살던 사람이란 뜻이다. 후에 당에 귀하하여 공을 세워 연국공 (燕國公)에 봉해졌다. 백제가 북경지역과 관계가 깊었다는 뜻이다.남만주와 한반도 서해안 일대에는 흑(黑; 흐어/해) 자가 붙은 지명이 많이있다. 흑치(黑齒)는 해씨(解氏)와 같은 뜻이다. 이글자는 <흐어/해라고 하던 여러 사음자의 하나로 해(sun-ray)를 숭상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란 뜻이다.
이처럼 대륙에 기반을 두었던 백제는 같은 고조선의 후손인 고구려와 선비세력에 밀려 갑자기 방대했던 영토를 잃고 대륙에서 밀려났다. 한해의 동남쪽 섬에서는 대왜(大倭)가 동쪽으로 진출하여 일본의 전신이 되는 대화국(大和國, Yamato) 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등장했다. 방대한 영영에서 영향역을 잃은 대백제는 600년대
초기에 이르러서는 설 땅마저 변변치 않게 되었다.
백제 멸망당시에는 일본(日本)이란 나라가 일본열도 동부지역에서 자라고 있었다. 백제가 망하고 3년후에 일본열도 관서지역에 있던 왜(倭,열도백제)가 백강전투(白江戰鬪, 白江口之战; 663년)에 참여 했다.
활발했던 대백제(大百濟)의 해상활동 영역을 해상왕 장보고(張保皐; 787~846)가 이어받았다. 버림받은 그들을 중국과 한국에서는 왜구(倭寇) 라고 비하하여 불렀다. 왜구(倭寇)의 활동영역이 대백제(大百濟)의 해상활동 영역이었다. 수서(隋書)에는 백제와 신라가 섬나라에는 진귀한 물건이 많아 교류를 활합히 하여 왜를 큰나라로 키웠다 (新羅, 百濟皆以倭為大國) 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자료) 이돈성,동북아고대사신론,2018,p348에서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