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천문학자 박창범 교수가 삼국사기 일식기록으로 전기신라가 대륙에 있었다고 밝혔다. 고대3국 대륙론을 신봉하던 재야에서는 마치 바이블을 얻은냥 금과옥조로 삼고 그 이유는 모른채 이 데이터를 들이대고 한국고대사를 고치라고 강조한다.
박창범 교수는 분명히 말했다. 과학적 사실중에서도 의심가는 부분을 빼고 확실한 사실만 밝혔다고 했고, 그렇게 나온 이유에 대한 기록의 근거는 사학자들이 몫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적어도 필자는 아직 이렇게 나온 이유를 밝힌 사학계의 글을 보지못했다. 그래서 본인은 저서에서 신라왕계의 변화 즉 박씨-석씨-모씨-김씨로 바뀐 왕계의 변화에 있을것으로 보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은유적으로 기술된 정치적사건 그리고 <북사>등에 기록된 문무왕의 이름이 모진이었다는 기록을 그 근거로 들었다.
백제에서도 개로왕이 장수왕군대에게 참살 당한후 다음 왕통인 문주왕의 이름이 夫餘씨가 아닌 牟都였고 삼근왕과 동성왕은 이름이 牟大였다고 밝혔다.
이시기 신라 <삼국사기> 소지왕22년 기록을 보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신라를 괴롭히던 왜가 500년 이후 기록에서 사라진다. 백제와 가야로 불리던 남부 왜의 관계가 정리되었다는 뜻이다.
<新羅本紀> 炤知麻立干22年(500)
夏四月, 暴風拔木. 龍見金城井. 京都黄霧四塞.
여름4월 폭풍이 불어 나무를 뽑고 금성 우물에서 용이 나타났다. 도읍의 4성문에 누런 안개가 끼었다.
전통적 신라왕계가 이로서 뽑히고 새로운 왕계가 신라에 나타났다는 뜻이다. 계림으로 대표되는 신라 기존왕계가 뽑히고 그해 용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왕계가 왕이 되었는데 소지왕(479~500)은 그해 제거되었다. 다음왕이 지증왕으로 <삼국유사>에는 지철로왕 그리고 성기가 매우 큰 왕으로 묘사했다. 무슨 뜻일까?
소위 말하면 기존 신라왕들과 다른 위세가 당당한 별종의 인물 그런 뜻으로 읽힌다. 지증왕이 소지왕과 6촌 관계라고 하는데 왕통계보 조작 일 수도 있다. 그런데 지증왕이 왕이 되면서 은나라의 유습이자 부여의 오래된 유습인 순장을 금하고 주군을 새로 정하고 기존의 신라6촌의 후신인 6부를 옮기는 과감하고 선진적인 행정을 단행한다.
그러나 실세는 늙은 바지왕인 지증왕(500~514)을 먼저 앉힌 법흥왕으로 <양서>에서는 신라가 양무제 보통2년에 백제사신을 따라 처음으로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무제에게 자신의 왕 이름이 모진(慕秦)이라고 밝힌다. 또 다른 기록으로는 백제인이 왕이 되었다고도 했다. 이를 연구한 역사학자 김성호에 따르면 산동성 <등주부지>권3에 산동반도 동쪽 끝 막야도(幕耶島)에는 모씨(慕氏)가 많이 살고 있다했고 옛 용성국이라고 했다. 이곳이 석탈해가 신라로 출발한 곳이다.
즉 중국사서에 기록된 백제인이 신라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나게 되고 백제 영유지였던 이곳에서 백제와 관계가 있는 법흥왕 慕氏가 신라에 선진 행정기법을 가지고 와서 신라를 율령, 국방, 복식제도, 김해김씨 가야가와의 통혼, 불교공인을 통해 백제와 고구려보다 늦었으나 신라를 기반부터 개혁했던 것으로 보인다.
법흥왕 이전의 신라와 이후의 신라는 국가의 행정체계와 관습 등이 전혀 다르게 변모하게 된다. 중앙집권적 정부로 선진적이 된다는 의미로서 이를 바탕으로 500년간 신라를 골치 아프게 했던 가야와 왜를 562년 드디어 없애 버린다.
신라문무왕 비문의 상부가 경주 일반가옥에서 빨래판돌로 쓰이다가 발견된 내용중 그 상단부에는 문무왕의 15대조를 ‘성한왕(星漢王)’이라고 밝히고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했다(傳七葉)”는 내용이 있고 이는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즉, 이 말은 문무왕의 7대조가 법흥왕이며 모씨계열의 왕이 7대를 전했다는 의미이며 학계나 일반인들이 그 의미를 모르는 성한왕은 문무왕의 15대 외가조상인 김수로왕이라고 해석될 수밖에 없다.
삼국유사에서 김수로왕 출계와 관련된 기록을 보자.
<三國遺事> 紀異第二 駕洛國記
洎新羅第三十王法敏龍朔元年辛酉三月日有制曰. “朕是伽耶國元君九代孫仇衝王降于當國也, 所率來子世宗之子率友公之子庻云匝干之女文明皇后寔生我者. 兹故元君於㓜冲人乃爲十五代始祖也. 所御國者已曽敗, 所葬廟者今尚存, 合于宗祧續乃祀事.” 仍遣使於黍離之趾,近廟上上田三十頃爲供營之資號称王位田付屬夲土. 王之十七代孫賡世級干祗禀朝㫖, 主掌厥田每歳時釀醪醴設以餅·飯·茶·菓庻羞等奠年年不墜. 其祭日不失居登王之所定年内五日也. 芬苾孝祀於是乎在於我. 自居登王即位己卯年置便房, 降及仇衝朝未三百三十載之中, 享廟禮曲永無違者, 其乃仇衝失位去國, 逮龍朔元年辛酉六十年之間, 享是廟禮或闕如也. 美矣㦲, 文武王 法敏王謚也.先奉尊祖, 孝乎惟孝. 継泯絶之祀復行之也.
신라 제30대 왕 법민왕은 용삭원년 신유 3월에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 시조의 9대손 구형왕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이끌고 온 아들 세종의 아들인 솔우공의 아들 서운 잡간의 딸 문명황후가 나를 낳았다. 따라서 시조 수로왕은 나에게 곧 15대 시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멸망당했으나 그를 장사지낸 묘는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해서 계속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겠다.” 인하여 그 옛 궁터에 사자를 보내서 묘에 가까운 상전 30경 공영의 비용으로 하여 왕위전이라 부르고 본토에 소속시켰다. 수로왕의 17대손 갱세 급간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 주관하여 매해 때마다 술과 단술을 빚고 떡·밥·차·과실 등 여러 맛있는 음식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내어 해마다 끊이지 않게 하였다. 그 제삿날은 거등왕이 정한 연중 5일을 바꾸지 않았다. 이에 비로소 그 향기로운 효사가 우리에게 맡겨졌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에 편방을 설치한 뒤로부터 구형왕 말년에 이르는 330년 동안에 묘에 지내는 제사는 길이 변함이 없었으나 그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부터 용삭 원년 신유(661)에 이르는 60년 사이에 이 묘에 지내는 제사지내는 예를 가끔 빠뜨리기도 하였다. 아름답도다, 문무왕 법민왕)의 시호이다. 먼저 조상을 받드니 효성스럽고 또 효성스럽다.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향하였다.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 족보인「김해김씨세보金海金氏世譜」에 의하면 거등왕 원년 기묘년(199)에 왕자 선仙이 세상이 쇠하는 것을 보고 구름을 타고 떠나 버렸다(乘雲離去)고 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족보의 반포를 금지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사학자 천관우 선생은 김해지역 주민이 일본에 건너간 사실은 한국측 자료에서는 찾기 어렵지만 「김해김씨준원보략璿源譜略」에 수로왕과 왕비 허씨許氏 사이에 열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자는 태자(居登王)요, 둘째아들은 왕후의 성을 따라 허씨가 되고 일곱째 아들은 세상에 염증을 내고 염세상계(厭世上界)하고…. 거등왕의 아들 선은 세상이 쇠함을 보고 신녀(神女=巫女)와 함께 구름을 타고 떠나갔다(乘雲離去)는 내용은 큰 시사를 준다고 지적했다. 떠나간 곳이 일본 열도이다. 이사실은 대부분의 일본사학계에서 인정하는 바이다.
금관가야국(가락국)의 마지막왕 구형왕(재위:521~532)이 실제 김해김씨의 시조로서 이는 가락국을 없애버린 경주김씨의 성을 따르지 않은 것은 신라에 대한 반발로 보인다. 실제 그가 김해김씨의 시조다.
본론으로 돌아가 신라문무왕의 비문에서 그가 시조로 내세운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 신나라의 왕망(王莽) 정권(8~24)을 일으키는데 보좌하다가 이에 반대하는 후한 광무제를 지지하는 유씨 집단의 쿠데타로 망하게 되자, 중원에서 탈출하여 성을 바꾸어 산동에 머물다가 백제와 반목하게 된 고구려에게 지속적으로 공격당하는 신라의 위기에 한반도로 넘어왔을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다.
비문을 근거로 7세기중반 인물 문무왕의 15대조인 성한왕을 김일제로 가정할 때 역년을 계산하면 그는 기원후2세기 인물이 되어야하며 기원전2세기 인물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문무왕의 15대조상에 부합하는 인물은 2세기 초중반에 생존했던 외조부 김수로왕이 보다 더 합리적이다.
즉 전통적으로 내려온 신라왕가에 뿌리가 없던 모씨 법흥왕 또는 그 일가가 산동반도에서 넘어와 중국에서 경험한 선진적 국가경영 방법을 동성왕때 결혼동맹을 이룬 백제왕가의 힘을 빌어 신라왕가에 정착하고 왕위를 차지하게 됨으로서 국정을 펼치게 되었다고 볼 수 있고,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시킬 방법으로 한무제 집사였던 휴도왕의 자손 김일제의 이름을 빌어 권력에 투사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문무왕 비석에 나타나는 투후 김일제는 산동지방에 모여살던 모씨가 김씨로 성을 바꾸기 위한 ‘환부역조’적 표현일 수밖에 없다.
이때 전후의 기록이 신라사에 기록되어 유지되다가 고려 인종때 김부식에 의해 신라본기에 반영되면서 지금까지 전해져 왔고 이 기록중 일부 일식기록이 신라가 중국내륙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데이터를 만들었을 것이다.
재야에서 확신적으로 추정하는 한반도 신라가 대륙에 진출해서 남겨놓았다고 주장하는 대륙신라의 근거자료인 절강성, 복건성에 남아있는 신라지명은 결코 신라가 건국된 이후에 만들어진 지명이 아니라는 것이 이지역을 발로 답사하면서 지방지, 지방역사가, 행정관청에서 확인한 김성호 박사가 말한다.
문고리의 저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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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sorgai 작성시간 19.11.13 성한, 세한의 표현은 한나라의 미칭으로 각종 중국 사서와 문헌에 많이 등장하며,
「傳七葉」은 족보의 7대가 아닌 한나라 황제 7대에 걸쳐 김씨 가문이 융성했다는 표현으로 중국문헌에서 설명합니다.
이는 우리 학계가 제대로 역사를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환부역조」의 족보라는건 자신의 한계를 드러낸 소설에 불과합니다.
신라인은 매우 정확한 선조인식을 가졌으며, 신라 초기에는 한나라를 기준으로 자기를 설명하고 있음으로 반증됩니다.
더구나 행주산성 초대형 기와의 「天主」라는 표현은 투후의 祭天主를 여전히 계승하고 있으며, 신도(神道)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작성자유곡가인 작성시간 19.10.24 해석이 다양합니다.
아무튼 공부 잘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