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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

안남국에서 귀화 왕족<정선이씨>이양혼

작성자심제|작성시간10.07.18|조회수376 목록 댓글 0

고려의 고종시기에 안남국의 리왕족 이용상이 고려로 피신하여 고려국에 살았고 그후손이 한국에 살고있음을 KBS의 역사프로그램에서 밝혔다.하지만 실제로 고려에 귀화한 첫 안남국 왕족은 리양혼으로 그의 문중기록과 화산이씨 족보를 연구한 하노이대 역사학과의 결론이다.그들 족보에 따르면 리양혼은 그의 왕조를 봉한 나라 송에 머물다 최후로 고려 인종시 귀화하여 경주(현 대륙 하간현)에 머물게 되어 그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이로서 여러 문헌에서 고려의  대륙존재설을 입증하고  잇으며 요사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고려의 경주는 개주로서 현 하남성 하간현 근방이다. 중요한 사실중에 하나는 정선이씨의 6대후손에 이의민이 있으며  이의방(초대 무신 권력자)은 고려사와 반역열전에는 기록이 있는데 조선실록과 용비어천가는 이를 숨기고 있다, 이의방은 이성계의 6代祖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 선조의 폐해는 은폐했다,따라서 이의민을 천민출신이라 한것은 이의민에 대한 정보를 후대 문신 사가들이 방기한것이라고 의심하고있다.  

 

양혼 (李陽焜/元明) 安南國 南平王(제4대 인종) 諱,乾德 第3子 慶州 因以爲籍 配 扶屈 陣氏 父 宋朝 文下侍郞 墓 祔 墓 旌善 婆羅洞 亥坐 宋封 開府義同三司中書 門下平章事

 

*安南國~중국 송나라가 封한 Ly왕조의 명칭

*大越國~ Ly왕조가 공표한 명칭

*베트남~현재의 명칭.

 

올해(2007년)로 931 년전 1076년 大越國 5 대왕(신종) 옹립 과정에서 리량꼰[이양혼] 제3 왕자는 혼란을 피해 잠시 북송에 머물렀으나 결국 고려의 경주로 피신하게 된다.

 

~정선 이씨시조 양혼의 모국(母國)---현 베트남의 최초 장기 집권 Ly왕조 대월국(안남국)A.D 1009-1225,

 

1,이양혼(李陽焜)은 안남국 제4대왕 (諱,건덕)인종이 후사가 없어 양자를 세웠는데 그 중의 한사람이라는 설과

 

2,인종의 왕자중 5대임금 신종 (이양환(李陽煥))과 둘째 양완에 이은 셋째 왕자(양혼)라는 설,등이 있다

 

3.시조의부인 부굴진씨의 부친이 송조의 문하시랑 벼슬이 북송의 일시 피신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

 

4,시두(2世 諱 蘭/君郁)가 고려인종(재위,1122년~1146년)시 예의판서(족보)에 오른것은 이양혼의 경주귀착 연대를 가늠케 한다.

 

3世 諱 무정/경부~인종 시관지 국정대부 추밀원부사.

4世 諱 계운/포명~의종 추밀원 부사

5世 諱 番/만옥~~추봉 수태사 ,문하시중

諱 善/~~~~~추봉 수태사,문하시중

 

6世 5世 番의子 諱,희민(羲旼/太明 ) 明宗 門下侍中

5世 善의子 諱,의민(義旼/義方)-高麗 武臣 (毅宗,明宗) 明宗 壁上功臣

 

이의민/의방 6代祖가 최충헌에게 패하여 당신과 그의 아들 삼형제(7세~지순,지영,지광)등,일가친척은 우해간임(족보)을 당하며 가문의 화를 면키 어려웠으나 문중의 형 희민(羲(숨을희)旼)의 며느리(7세,諱 이성순의配)가 처가로 피신 (8세 諱,연/자군 은 청평산에서 은거 독서중 9세 우원 을 남기고 卒) 현재의 정선이씨를 유지할수 있지 않았을까?

 

역사의 실록에서 정선이씨의 정신적 지주인 이의민을 천민으로 기록된것은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부분이며 또한 이의민의 손자로 잘못 알려진 우원 (9世)은 이희민의 후손임을 족보는 기록하고 있다.무인시대, 실록등에서 폄훼된 이들의 명예는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이렇게 정선이씨는 최대 부흥후 멸족의 위기를 면하여 오늘에 이른것이다

 

-9 世 諱,우원(遇元/太初)--*公 移居干 旌善 因以爲籍*國子生員 尙書 佐僕耶 墓 慰珍所 佳山 押坐 配 善山金氏

1,본족의 위기를 극복하여 시조의묘를 정선으로 모시고 이때부터 본관을 정선이씨로 세(世)을 이어 왔으므로

2,國子生員 尙書 佐僕耶 의 벼슬에 오른 遇元/太初 9代祖를 *公 移居干 旌善 因以爲籍*으로써 후손들은 모시고 있다

 

-12 世 諱,초(初/一元)-麗末 殉抗靖 3 節臣 彛,初(윤이(파평군),이초(중량장))의獄事의주인공, 配 朔寧 崔氏 開城 杜門洞 72賢 書院 圃隱 鄭先生 列亨干殉絶祠

 

공양왕 2년(1390년) 순안군 이방과 동지밀직사 이반등의 밀고로 옥사를 치른다.옥사중 홍수와 태풍으로 관아와 옥사가 침수되는 일이 벌어지자 형집행이 중지되고. 후에 무고임이 밝혀지자 明나라 율수현(강소성 소재)으로 유배당하고 그곳에서 불사이군을 밝히고 순절한다, 이것이 고려말 彛,初의 獄事다.

 

이초의 충절을 개성두문동 圃隱 정선생(정몽주) 列亨干에 모신 遺臣들은 그를 기리며 애도했다. 그중 전(?)오륜은 동지 6명과 함께 그를 기리며 정선 거운산 칠현동으로 숨어 들어가 불사이군을 천명하며 은신하였다.고려의 순절사들이 려말 개성 두문동에 은거한 후 두문불출이란 속담까지 창조하며 충절의 정도를 짐작케 한다.또,아리랑의 기원설도 그시절 정선의 원로들은 아리랑이 아니라 "알리 알리"라 강조한다

 

정선이씨 12代祖 이초님의 무고를 전(?)오륜등이"누가 이억울함을 알리, 알리"가 아리리,아라리 로 민중에게 구전되면서 정선 아리랑의 모태로 변형 되었다는 설이 그 어떤 가설보다 우선한다,고 일부 역사가들은 이야기 한다.

 

-14 世 諱,자생(自生/天猝)-麗末 海西 按廉使 配 順興 安氏 載嶺 艾井(쑥 샘물)碑文 (后孫 正奎)황해도 재령등은 려말 自生 14代祖 때 부터 정선이씨의 諸族이 모여 살던 곳이다.

 

1,자생이 海西(황해도)按廉使 재직중 北軍이 가뭄에 시달리고 있을 때 안릉군(재령) 순찰시 그곳의 쑥을 뽑으라 명하자 군졸들이 쑥을 뽑자 맑고 시원한 물이 용솟음 첬다한다.

 

2,이곳을 쑥샘물이란 뜻으로 艾井(애정)이라 칭하고 주위에 담을 쌓고 비로소 정선이씨들이 함께 모여 살게 됐으며 후손들과 백성들이 공덕비를 세워 그를 공경했다고 한다.

 

여기까지 ,이양혼이 안남국의 왕자로서 고려의 경주에 도래후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황해도 재령 애정부근에 안착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정선이씨의 기록을 보았다.

 

(정선이씨 족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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