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으로 유명한 김병연이 주유천하하다 많은 시를 남겼는데 그중 "自知면 早知고 補知면 晩知라 "표현하였다.즉 "스스로 깨달으면 일찍 아는것이고 남이 도와주어 알면 늦게 아는것이다"라는 뜻인데 비속어로 들리게 표현하였다.
고려의 개성은 한반도 개성이 아닌 하북성 대성 인근이고 지명을 알기위해 고려사절요등의 번역본의 지명은 참조하지 말라 하였는데 굳이 고지리학자가 아닌 한문번역가가 번역한 지명들을 보고 고려는 한반도에서 발생하여 500년간 경기도 개성에서 존재했다고 부득부득 우긴다. 우김을 넘어 어떤자들은 삼국도 아닌 고려까지 대륙에 집어넣는 대륙고려론자라고 비하까지 한다. 본인은 고려가 대륙전체에 있었다 주장하는 어느 황당설은 반대하는 입장이다.
다음에 기술하는 글들은 명나라말 당시에 살았던 지리학자 고조우가 지은 [讀史方輿紀要] 를 해석한것이다. 그는 마치 그당시 그 땅에 살았거나 근처에 살지 않았으면 기술하지 못할 그런 설명을 각지명에 해놓았다. 조선후기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 많은 문구가 같은것으로 보아 시기적으로 이 독사방의 지명을 참고한듯하다.조선후기엔 이미 모든 지명과 인식이 한반도로 고착된 이후이다.
특이한 점은 외국지리에 조선을 산동지역에 붙였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있는 조선지명들의 위치가 많이 틀리다. 고려의 수도 개성을 개주라고 한다면 이 개주가 조선 漢城(현서울)서남쪽 200리에 있다고 기록 할 수가 있을까? 즉 개주가 고려왕성이며 조선의 왕성(漢城)에서 서남으로 200리 떨어졌다하고 또한 개성과 다른 위치에 있으며 조선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한성으로 옮겼다고 기록한다. 결국 개주와 개성, 한성과 한양은 서로 다른곳이다.대청광여도에 개주는 두군데 등장한다 하나는 고려왕성이 있었던 대성의 서남쪽 금나라때 개주인 하남 복양에 또 한곳은 요나라 개주로 요녕성 개원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고려와 관련없어보인다.
또한 경기도 광주에 전주에 바다가 있으며 대청도 소청도가 있다한다 또한 한사군 한반도설에 등장하는 탄열성과 점제현이 황해도 아닌 곳에 위치한다. 이땅에 사학자들이 굳게믿는 한사군현중 점제현이 평안남도라면 그곳이 한반도 어느 왕경에서 820리 거리란 말인가?
일제하 80년전 이땅의 역사학을 전공한다는 사람들의 지리해석 수준은 이처럼 저열했다.
遼나라의 開州(위) 金나라의 開州 (아래),이곳이 고려의 開州는 아니다.
讀史方輿紀要 (독사방여기요)
卷三十八 ◎山东九 外国附考 (권38 산동9 외국부고)
◇朝鲜... (중략)... 五代梁龙德二年,高丽人王建者,起兵为海军统帅,袭杀躬裔,自称高丽王。唐清泰末,建引兵击破新罗百济,而并其地,于是东夷诸国皆附之,地益拓,建都松岳,即开州也,谓之东京,而以平壤为西京。又置六府九节度,百二十郡,以理其地。晋开运二年,建卒,子武代立,自后子孙遣使朝贡于宋,亦朝贡于契丹及金。宋嘉定十二年,高丽王暾附于蒙古,既而中绝。绍定五年,蒙古主窝阔台遣兵伐高丽,其王暾复请降,因置京府县达鲁花赤七十二人监其国,端平初,悉为高丽所杀。自是四遣兵攻之,拔其城十有四,大抵旋服旋畔。景定初,忽必烈以高丽世子亻典袭封高丽国王,亻典寻更名植。元至元中,其西京内属,因置东宁路总管府,画慈悲岭为界。大德三年,又置征东等处行中书,寻罢。至治三年复置,命其王为左丞相。至正之季,始二于元。及明洪武二年,高丽王王颛表贺即位,诏封高丽国王。二十五年,其王瑶昏缪众推门下侍郎李成桂主国事,诏从其自为声教,成桂更名旦,徙居汉城,遣使请改国号,诏更号朝鲜,自是王氏始绝,李氏世有其地,称藩岁奉贡献。万历二十年,为日本所侵掠,国几亡,王师入援,久之,国始定,然自是浸弱矣。其国中分为八道,八道中,则忠清、庆尚、全罗三道,地广物繁,州县雄巨,最为富庶。且俗尚诗书,人才之出,比诸道倍多。平安、咸镜二道,北接中國,俗尚弓马,兵卒精强,亦地势使然也。江原、黄梅,居京畿左右,差为狭小。而京畿在诸道之中,襟带山海,称为雄胜。其地东西二千里,南北四千里,八道分统郡凡四十一、府凡三十三、州凡三十八、县凡七十 。
오대 후량용덕2년(922) 고려인 왕건이 해군통수로 병사를 일으켜 궁예를 죽이고 스스로 고려왕이라 칭하다. 후당청태말 군사를 이끌고 신라 백제를 파하고 그땅을 아우르니 동이의 여러나라가 그에 복속하다.개주땅에 도읍 송악을 정하고 동경이라 하였으며 평양을 서경이라 하다. 6부와 9절도사를 두고 120군을 두다.후진개원2년 왕건이 졸하자 아들 무가 이어 이후로 자손들이 송에 조공하였고.역시 거란과 금에도 조공하다.
송가정12년(1218) 고려왕돈이 몽고에 귀부하니 그만 중간에 끊어지다.소정5년(1232) 몽고주 와왈태(오고타이)가 병사를 보내 고려를 정벌하다.왕돈이 항복을 청하니 수도에 달로화적72인을 파견하여 감독하다.단평초 수위(살리타이)가 고려에서 살해당하다. 이로 인해 다시 병사를 보내 공격하니 14개성을 함락하였다.굴복과 반역을 계속하다. 경정초 쿠빌라이가 고려세자 왕전에게 고려국왕을 공민왕에 봉하다.왕전은 이름을 식으로 고치다.지원중 서경이 내속되었고 이로 인해 자비령을 경계로하여 동녕로총관부를 설치하다.대덕3년(1299) 정동등처중서성을 설치하였으나 왕심이 없애다.지치3년 다시 설치하다. 명하여 그 왕을 우승상으로 하다.
홍무2년(1362) 고려공민왕 왕전이 표를 보내 축하하다,고려국왕으로 봉하다.홍무25년(1392) 공양왕 왕요가 목을 매자 문하시랑 이성계로 하여금 국사를 보게하다.이로부터 교지를 내리고 성계는 이단으로 이름을 고치다.한성으로 옮겨 거주하다.국호를 정하길 요청하자 다시 조선이라 하였으며 이때 부터 왕씨는 끊어졌다.이씨는 그땅에서 대를 이어가다.만력20년(1592) 일본이 침략하여 노략하자 나라가 망할지경이매 왕의 장수가 지원하였다.오래 되었다.나라의 시작을 정하고 자연히 스스로 약해졌다.
그나라는 8도로 나뉘엇는데 충청,경상 전라3도는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며 주현이 웅장하고 크다.부자나 서민이나 최고다. 풍속이 시와 책을 숭상하고 인재가 나오는데 다른도 보다 배나 되었다.평안,함경은 북으로 중국과 접했다. 화살과 말타는 풍속을 숭상한다 병사가 정예하고 강하다.역시 지세가 그렇게 만든것이다.강원,황해는 경기 좌우로 있는데 좁고 작음에 차이가 없다.경기가 모든 도중에 가운데 있다. 그 나라는 동서로 2천리 남북으로 4천리이며 8도로 나뉘어 41개군 33개부 38개주 70개현을 통치한다.
京畿道
治王京。朝鲜都也,亦曰汉城。明初,高丽王旦自开州徙此,居七道之中,称为四塞,领郡三,曰杨根、丰德、水城。府三,曰汉城、开城、长湍。州七,曰杨州、广州、润州、骊州、果州、谷州、坡州。县三,曰交河、三登、土山 。
경기도
왕경관할.조선의 도읍이다.한성이라고도 한다.명초 고려왕 이단(이성계)이 개주에서 옮긴곳이 여기다.일곱도의 가운데 요새 네곳을 이르고 세개의 군을 통솔한다.양근,풍덕,수성.3부로는 한성,개성,장단.주로는 양주,광주,윤주,여주,과주,곡주,파주.3현으로는 교하,삼등,토산이다.
○开州城 在王京西南二百里,高丽所置州也,左溪右山,称为险固,亦曰松岳。唐天初,眇僧躬예据此。朱梁贞明五年,入贡于淮南杨隆演。后唐清泰末,王建杀躬예而代之,仍都于此,谓之东京,亦曰开京。宋大中祥符三年,高丽臣康肇弑其主诵,立诵兄询而相之。契丹主隆绪讨高丽,渡鸭渌江,康肇战败,退保钢州,契丹进擒肇等,追亡数十里,钢、霍、贵、宁等州皆降。进攻开京,询弃城走平州,契丹遂焚开京宫室府库,民庐俱尽。兵还,询复葺开京而居之,诸城亦复归高丽,今曰开城府 。
개주성.
왕경에서 서남으로 2백리에 있고 고려가 관할하는 주다.왼쪽에 계우산,험고라 하고 송악이라고도 한다.당 천우초 애꾸승 궁예가 그곳에서 거했다. 주전충의 후량5년(918) 회남에서 양융연이 조공을 했다.후당 청태말(936) 왕건이 궁예를 죽이고 대신하여 일어섰고 이내 도읍을 그곳에다 정했다.동경이라고도 하고 개경이라고도 한다. 송 대중상부3년(1010)고려 강조가 왕송(목종)을 시해하고 왕송의 형 순(현종)을 세우고 스스로 재상이 되었다.거란왕 융서가 압록강을 건너니 강조가 패해 보주,강주로 퇴각했다.거란이 강조를 잡고 도망병을 수십리 추격하여 강주,곽주,귀주 녕주등이 항복했다.개경이 함락되니 현종이 平州로 도망갔다.거란이 따라가 개경궁실,부,창고등을 불지르고 민가와 가구가 없어졌다. 현종이 개경으로 다시 돌아와 거하니 모든 성이 다시 고려에 속하게 되었다. 지금 개성부이다.
(조선왕경의 서남200리에 고려가 설치한 송악인 개주가 있다고 한다 지금의 반도지리에 이 위치가 맞나 확인해 보라!)
丸都城
在王京东北。昔时高句骊依险为城,谓之丸都,旁多大山深谷。陈寿曰:汉建安中,高丽王伊奚模更作新都于丸都山下。魏正始七年,幽州刺史모丘俭以高句骊数侵叛,督诸军出玄菟讨之,高句骊王位宫败走,俭悬车束马以上丸都,屠其城,既而复都于此。晋咸康八年,时高句丽与慕容황接境,황谋击之,高骊以重兵备北道,황潜将劲兵四万趋南道,出其不意,高丽王钊败遁,遂入丸都,毁其城,大掠而还。《唐志》:自鸭渌江口舟行百余里,乃小舫溯流,东北行,凡五百三十里,而至丸都城 。
환도성
왕경 동북쪽에 있다.예날 고구려가 험한곳을 이용하여 성을 쌓았다.환도라 부른다.우뚝한산이 많고 골이 깊다.진수왈; 한 건안중 고구려 이해모가 환도산 아래에 새로운 성을 쌓았다. 위 정시7년(246) 유주자사 모구검이 고구려가 수차례 침입하자 모든 군사를 모아 현토를 토벌했다.고구려왕 위궁이 패해 도망갔는데 말레 수레를 달고 환도성위로 올라가 성을 도륙했다.다시 도읍을 세운곳이 이곳이다.진 함강8년 고구려와 모용황이 국경을 접햇는데 황이 진격할 계략을 썼다.고려는 모든병사가 북도를 막았으나 모용황은 몰래 장수와 병사를 남도로 들어가 불의의 기습을 받자 고려왕 쇠가 도망가니 환도성을 따라와 많은 사람을 납치해갔다. 당지>압록강 하구에서 배로 백여리 가면 작은 배만 갈 수 있는데 동북으로 대강 530리를 가면 환도성에 이른다.
临屯城
在王京西南。汉元封二年,置临屯郡。《茂陵书》:郡治东施县,去长安六千一百三十八里,领十五县,昭帝时郡废。施,音移。《汉志》:东施县属乐浪郡。是也。后汉并废县。又真番城,在王京西北,汉元封二年,置真番郡。《茂陵书》:郡治,去长安六千六百四十里,领十五县。昭帝时,亦并入乐浪郡。县,《汉志》不载。徐广曰:辽东郡有番汗县,疑即真番。○含资城,在王京南境,汉乐浪郡属县也,后汉因之,晋改属带方郡。《汉志》注:县有带水,西至带方入海。隋大业中伐高丽,分军出含资道,盖以汉县为名耳 。
임둔성 ...(중략)..왕경의 서남에 있고.진번성은 왕경에 서북쪽에 있다...하략... ○함자성은 왕경의 남쪽 경계에 있다.현에 帶水가 있다 서쪽으로 대방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
吞列城
在王京东南。汉县,属乐浪郡,后汉省。《汉志》注:列水出分黎山西,至粘蝉入海,行八百二十里。列亦作冽。又有列口城,亦在王京西南,汉县,属乐浪郡,晋复属带方郡。胡氏曰:列口,冽水入海之口也。汉元封二年,杨仆击朝鲜,先至冽口。张晏曰:朝鲜有湿水、列水、汕水,三水合流为冽水,乐浪、朝鲜,疑皆取名于此 。
탄열성
왕경의 동남에 있다.낙랑군에 속하고 후한의 성이었다.한지>열수가 나와 려산 서쪽에서 나뉘어진다.점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니 걸어서 820리를 간다.列 역시 열이다. 열구성이 있는데 왕경 서남에 있는데 한현이고 낙랑군에 속했다.晉에 대방군이 다시 속했다.호씨 왈; 열구,열수는 바다의 입구로 들어간다.원봉2년 양무가 조선을 공격하여 먼저 열구에 도달했다.장안 왈 ;조선에는 열수,습수,산수가 있는데 세수가 합쳐져 열수,낙랑,조선이 된다.
○孟州城,在王京西。《志》云:唐置孟州,领三登一县,椒岛、椴岛、宁德三镇,今州废县存 。
맹주성은 왕경에서 서쪽에 있다.
神嵩山
在开城府北。五代时,王建依此山为都,因名其城为松岳。《志》云:朝鲜有三都,谓平壤、汉城及松岳也。又有平山岭,在开城府西一里,其土色皆赤 。
신숭산 개성부 북쪽에 있다. 오대때 왕건이 이산에 의지해 도읍을 정했는데 그 성을 송악이라했다. 지>에서 전하길 조선에는 3개도읍이 있는데 평양,한성,송악이다.평산령이 있는데 개성부 서쪽 1리에 있고 그 땅 색깔은 전부 붉다.
江华岛
在开城南海中。元时,高丽王植庶族承化侯居此。《图经》:今有江华府,盖以岛名。○紫燕岛,在广州海中,旧有客馆,曰广源亭。又有岛曰和尚岛。又大青屿,亦在广州海中,一名大青岛。元文宗徙其兄子妥欢帖木尔于高丽,使居大青岛,寻徙于广西静江。是也。又有小青屿,亦在广州海中 。
강화도
개성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원나라때 공민왕의 서족 승화후가 이곳에 거했다.도경>강화부가 있다.모두 섬이름이다. ○자연도는 광주바다 가운데 있다.옛날 객관이 있었다. 광원정이라 한다.또 섬이 있는데 和尙島라 한다.또 대청서,역시 광주 해중에 있다.일명 대청도라고 한다. 원 문종이 그형의 아들 수환첩목아를 고려에 보내 대청도에 살게했다.광서정강을 정벌할 때 그곳이다.소청도가 있는데 광주바다 가운데 있다. (계속)
제2편에서도 놀라운 기록이 계속됩니다!!.(조선사방에서 열독하시길)
운영자 심제글.
附考>
조선의 경기도에 개주성,환도성,임둔성,탄열성,맹주성이 있다!
왜의 이동에 관련된 서적을 몇년전에 분석하며 읽어보니 통칭 倭를 일본인들로 알고있는바 역사적 고찰을 간과한 인식이라는것을 알게된다.왜와 왜구는 두가지인데 하나는 일본 큐슈에 본거지를 둔 방장집단과 다른하나는 중국 동해안 절강,강소,산동에 본거지를 둔 방장집단으로 나뉜다.
한국사학자들은 이 왜를 흔이 일본에서 온 키작고 왜소한 해적들로 인식하게 서술하였으나 왜의 대량유입이 고려말 조선초기 세종까지 백여년 넘게 이루어 졌다. 조선초 정부의 명령에 의하여 왜인들을 충청,전라도 지역에 정착시켰는데 무려 30만명이나 되었다. 당시 인구로 보아 어마어마한 숫자이다.
조선정부는 왜인들을 왜 충청도와 전라도에 집중 안착 시켰을까? 고려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이성근박사의 연구글에서 그 해답에 실마리를 얻었다..산동과 그 남부가 고려의 全羅地方이었다는 분석과 일치한다는것을..한반도 주민의 60%는 북방계이고 40%가 남방계라는 사실이 700년전 이 엑소더스의 시대적 결과를 두고 말 함 아닐까?
아무리 해류의 항행에 의해 무심하게 배를 타더라도 인과가 없는 모르는 땅에 민족이 대량으로 유입 될수는 없는것이고 명색이 한민족의 땅에 안착한것은 바로 한족이라 앞세운 홍건적의 대대적 고려인과 몽골인의 핍박이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