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경은 필경 삼국시대에도 있었고 고려 초기에는 송에서 고려로 전해지고 당시 고려의 세계최고 제지기술과 합쳐져 이를 발전시켜 거란에게 전한것으로 보인다. 고려고종 28년(1241)간에 원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서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는 기사는 정사인 고려사(고려사절요 포함)에 보이지 않는다. 연구해야할 대상이다.
11세기초에 고려도경을 지은 서긍의 기록에는 이미 고려수도 개경에 송나라에서 전수받은 장경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 이전에 고려태조가 신라승으로 부터 대장경을 후당 민부(현 복건성)에서 배로 싣고와 내륙수로를 통해 예성강(하북 창주 인근)에서 개경(하북 대성)으로 들여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기록을 훓어보면 대장경에 대해 고려의 조정에서는 소위 합천 해인사에 모셔진 대장경의 내용을 알고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발생한다.고려가 한반도라면 왜 같은 고려국의 국토내에서 그 이전 왕조인 신라에서 만들어진 판각을 알지못햇을까 하는 의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고려가 신라승으로 하여금 후당이나 송에서 대장경을 가지고 들어왔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림은 구글에서 발췌.
신라의 중 홍경(洪慶)이 후당(後唐)의 민부(閩府)에서 대장경(大藏經)을 배에 싣고 예성강(禮成江)에 이르니 왕이 친히 이를 맞이하여 제석원(帝釋院)에 두었다.
운영자 주) 후당의 민부는 현 복건성 지역을 말한다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신묘 10년(991), 송 순화 2년ㆍ거란 통화 9년
여름 4월에 한언공(韓彦恭)이 송에서 돌아와 대장경(大藏經)을 바치니, 왕이 이를 내전에 맞아들이고, 교하여 사면령을 내렸다. 예전에 언공이 송 나라에 들어가서 대장경을 청하니, 황제가 명하여 이를 내려 주고 인하여 검교병부상서 겸 어사대부(檢校兵部尙書兼御史大夫)를 임명하였다
한림학사(翰林學士) 백사유(白思柔)를 송에 보내어, 대장경을 내려 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文宗仁孝大王
계묘十七年 宋 嘉祐八年,契丹 淸寧九年
三月,契丹,選大藏經,王,備法駕,迎于西郊.
3월 거란에서 대장경을 선택하니 왕이 불교용 법가를 준비하여 교외 서쪽에서 맞이하다.
睿宗文孝大王
丁亥二年 宋 大觀元年,遼 乾統七年
春正月,遼,遣高存壽,來賀生辰,仍賜大藏經。
춘정월 요에서 고존수를 보내어 왕의 생신을 축하하다 왕이 친히 대장경을 하사하다.
忠烈王[三]
己丑十五年 元 至元二十六年
金字大藏經成,王,與公主,親幸觀之,又親設慶讚會
금자로 된 대장경을 완성하다. 왕이 공주와 함께 친행하여 보고 경찬회를 열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7권
사우(祠宇)-왕성내외제사(王城內外諸寺)
흥왕사(興王寺)는 국성(國城) 동남쪽 한구석에 있다. 장패문(長覇門)을 나가 2리 가량을 가면 앞으로 시냇물에 닿는데 그 규모가 극히 크다. 그 가운데에 원풍(元豐 1078∼1085) 연간에 내린 협저불상(夾紵佛像)과 원부(元符 1098∼1100) 연간에 내린 장경(藏經 대장경)이 있고, 양쪽 벽에는 그림이 있는데, 왕옹(王顒고려 숙종)이 숭녕(崇寧 1102∼1106) 때의 사자(使者) 유규(劉逵) 등에게, ‘이것은 문왕(文王)- 고려 문종을 말함 - 께서 사신을 보내어 신종 황제(神宗皇帝)께 고해 상국사(相國寺)를 모방해 만든 것으로, 본국인들이 우러러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러러 황은에 감사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것입니다.’ 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조금 서쪽으로 가면 곧 홍원사(洪圓寺)이고, 장패문으로 들어가 시내의 북쪽은 숭화사(崇化寺)이며 남쪽은 용화사(龍華寺)이다. 뒤로 작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미타(彌陀)ㆍ자씨(慈氏) 두 절이 있다. 그러나 그리 완전하게 수리되어 있지는 않았다. 숭교원(崇敎院)은 회빈문(會賓門) 안에 있고, 보제(普濟)ㆍ도일(道日)ㆍ금선(金善) 세 절은 태안문(太安門) 안에 있는데 솥발처럼 솟아 있다.(하략)
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 임신(1392,홍무 25)
도당(都堂)에서 大藏都監을 폐지하기를 청하였다.
靑莊館全書卷之六十- 이덕무(조선)
盎葉記[七] 大覺國師
高麗史宗室傳。文宗第四子大覺國師煦字義天
海印寺藏經版。古志以爲新羅哀莊王丁卯雕造云。而哀莊王在位十年。元無丁卯歲。盖高麗宣宗四年丁卯。義天雕造經版。而譌傳爲哀莊丁卯歟。義天退居海印寺。則藏版于寺中。亦未爲不可。余遊海印寺。試拈世祖朝所印經二冊。下方一刻癸卯歲。大藏都監奉勅雕造。一刻甲辰歲。又寺僧別有所記曰。戊申年。高麗國大藏都監奉勑雕造。義天刊行爲五千餘卷。今藏元數。爲六千五百二十九卷。厥數不同者。癸卯以來。連歲補刻。義天所未刻一千五百餘卷歟。但未知癸卯等歲。的指爲何朝。若使余盡閱經版。則可知其緣起。而不可得也
해인사에 있는 장경판에 대하여 옛 기록에는, 신라 애장왕 정묘년에 판각(판각)하였다 하지만, 애장왕은 왕위에 있은 기간이 10년으로 정묘년이 없으니, 아마 고려 선종 4년(1087)에 의천의 장경판을 판각한 사적이 애장왕 정묘년으로 와전된 것인지 모르겠다. 하기야 의천이 해인사로 물러나와 기거하였으니, 장경판을 해인사에 저장해 놓았다는 것도 있을 법한 일이다. 내가 해인사에서 놀 적에 세조때 간행된 불경 두 책을 한 번 뽑아 보았더니, 한 책의 맨 마지막에는 계묘년에 대장도감에서 칙명을 받아 판각했다 하였고, 다른 한 책 마지막에는 갑진년에 판각했다 하였고, 사승이 별도로 기록해 놓은 것에는, 무신년에 고려국 대장도감에서 칙명을 맏아 판각했다 하였다. 대저 의천이 간행한 불경이 5천여 권이 된다는데, 지금 저장된 것은 6천 5백 29권이나 되어 그 숫자가 서로 맞지 않은 것은, 의천이 미처 판각하지 못하였던 1천 5백여 권을 계묘년 이후로 해마다 보각(보각)한 때문인 것 같다.
운영자 심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