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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

강소성 양주(楊州)에 고려왕성

작성자文古里|작성시간13.05.23|조회수932 목록 댓글 0

 

운영자는 고려의 남쪽경계가 여러 사서의 기록을 근거로하여 현 절강성 영파로 비정하였다 그런데 고려사를 읽어보면 고려의 남경이 楊州라고 기록되어 있다.이 양주가 현재 한반도 경기도의 양주군이라고 한다면 분명히 적어도 현 경기도 양주군 관내나 서울 近方에 1000여년된 고려의 왕궁 유적이 있어야 할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부정적이다. 行宮과 王宮은 전혀 다른 성격인 것이다.

 

고려의 수도였던 南京은 고려의 또 다른 수도이름 江都였던 것이며 楊州라는 지명인 고려의 남쪽 수도 지명을 한반도로 移置한 것을 알 수 있다.  

 

 

청나라 지도에서 고려왕성 위치를 정확하게 나타내주었다.

 

1919년 민국군사지도에는 삼궁전이라 표기되어있다.

 

 

현재에도 려성진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아있다.

 

양주에 대한 지명변천을 살펴보면,

 

이미 당나라 이전부터 양주라는 지명은 현위치에 존재했으며 五代시기에도 양주라는 지명이 그대로 이어져 존재했음을 알수있다.

 

舊唐書  志第二十 地理三

淮南道

揚州大都督府 隋江都郡。武德三年,杜伏威歸國,於潤州江寧縣置揚州,以隋江都郡為兗州,置東南道行台。七年,改兗州為邗州。九年,省江寧縣之揚州,改邗州為揚州。置大都督,督揚、和、滁、楚、舒、廬、壽七州。貞觀十年,改大都督為都督,督揚、滁、常、潤、和、宣、歙七州。龍朔二年,升為大都督府。天寶元年,改為廣陵郡,依舊大都督府。乾元元年,復為揚州。自後置淮南節度使,親王為都督,領使;長史為節度副大使,知節度事。恆以此為治所。舊領縣四:江都、六合、海陵、高郵、戶二萬三千一百九十九,口九萬四千三百四十七。天寶領縣七,戶七萬七千一百五,口四十六萬七千八百五十七。在京師東南二千七百五十三里,至東都一千七百四十九里。

 

江都 漢縣,屬廣陵國。隋為江都郡。武德三年,改為兗州,七年改為邗州,九年改為揚州都督府,皆以江都為治所

 

원사卷059 志第十一 地理二.

揚州路,上。

唐初改南兗州,又改邗州,又改廣陵郡,又復為揚州。宋為淮南東路。元至元十三年,初建大都督府,置江淮等處行中書省。十四年,改為揚州路總管府。十五年,置淮東道宣慰司,本路屬焉。十九年,省宣慰司,以本路總管府直隸行省。二十一年,行省移杭州,復立淮東道宣慰司,止統本路屬淮安二郡,而本路領高郵府及真、滁、通、泰、崇明五州。二十二年,行省復遷,宣慰司遂廢,所屬如故。後改立河南江北等處行中書省,移治汴梁路,復立淮東道宣慰司,割出高郵府為散府,直隸宣慰司。戶二十四萬九千四百六十六,口一百四十七萬一千一百九十四。領司一、縣二、州五。州領九縣。

錄事司。

縣二

江都,上。倚郭。

泰興。上。

州五

真州,中。

五代以前地屬揚州,宋以迎鑾鎮置建安軍,又升為真州。元至元十三年,初立真州安撫司。十四年,改真州路總管府。二十一年,復為州,隸揚州路。領二縣:

 

○ 明史  卷040 志第十六 地理一.

揚州府元揚州路,

屬淮東道宣慰司。太祖丁酉年十月曰淮海府。辛丑年十二月曰維揚府。丙午年正月曰揚州府。領州三,縣七。西距南京二百二十里。洪武二十六年編戶一十二萬三千九十七,口七十三萬六千一百六十五。弘治四年,戶一十萬四千一百四,口六十五萬六千五百四十七。萬歷六年,戶一十四萬七千二百一十六,口八十一萬七千八百五十六。

 

江都倚.

元末廢。太祖辛丑年復置。西有蜀岡。東有官河,即古邗溝,今運河也。南濱大江。東北有艾陵湖。北有邵伯湖,有邵伯鎮巡檢司。又東有萬壽鎮、西北有上官橋、南有瓜洲鎮三巡檢司。又東有歸仁鎮巡檢司,後遷便益河口。

 

▶ 고려사절요 南京 기록.

 

요 咸雍 3(1067) : 文宗 21
양주(楊州)를 고쳐서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하고, 이웃 군()의 백성을 이주시켜 채웠다.

 

22년 송 신종(神宗) 희령(熙寧) 원년, 요 함옹 4(문종 22. 1068)
○남경(南京)에 새 궁전을 창건(創建)했다

 

숙종 명효대왕 肅宗明孝大王 원년 紹聖 3, 壽昌 2(1096. 肅宗 원년)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김위제(金謂) 글을 올려서 남경(南京)으로 도읍을 옮기기를 청했는데, 대략은, 도선기(道詵記) 이르기를고려국에 곳의 서울이 있으니, 송악(松岳) 중경이 되고 목멱양(木覓壤) 남경이 되고 평양(平壤) 서경이 되는데, 1112 2월은 중경에 머물고 3456월은 남경에 머물며, 78910월은 서경에 머물면 36국이 와서 조회한다.’ 했고, , 이르기를개국(開國) 60여년에는 목멱양에 도읍한다.’ 했사온데, () 지금이 바로 서울에 순주(巡駐) 시기라는 것입니다 지금 국가의 중경과 서경은 있사오나 남경이 없사오니 삼각산(三角山) 남쪽, 목멱산 북쪽 평지에다 도성을 건설하고 시시로 순주(巡駐)하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하니 이에 일자(日者) 문상(文象) 말에 따라서 부동(附同)했다. ○9월에 우복야 참지정사 박인량(朴寅亮) 졸했다. 인량은 문장이 아담하고 화려했다. 송나라 희령(熙寧) 연간에 김근(金覲) 함께 사신으로 갔는데, 그가 저술(著述) 척독(尺牘)()() 시를 송나라 사람이 칭찬하여 사람의 시와 문을 간행(刊行)까지 하여 「소화집」(小華集)이라고 불렀다. 일찍이 요에서 압록강을 지아와서 경계(境界) 삼으려고 하므로 인량이 진정표(陳情表) 지었는데, ” 하늘 아래가 왕의 , 와의 신민(臣民) 아님이 없사온데, 척지(尺地) 나머지를 하필 경계니 관할이니 것입니까하고, , ”문양(汶陽) 토지를 돌려 주어서 소국(小國) 돌보아 주시면, 장사(長沙) () 소매를 돌려서 태평 시대에 춤추오)리다하니, 요의 황제가 보고 의논을 중지했다. 시호를 문열(文烈)이라고 했다. ○탐라 성주(星主) 사람을 보내 와서 왕의 즉위(卽位) 축하했다.  

 

4년 송 元符 2, 요 壽昌 5(숙종 4 1099)
9월에 재신과 일관(日官)에게 양주(楊州)에 남경(南京)을 건설할 것을 의논했다.  

 

6년 송 휘종(徽宗) 건중정국(建中靖國) 원년, 요 천조제(天祚帝) 건통(乾統) 원년(숙종 6, 1101)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鑑)을 설치하고 문하시랑 평장사 최사추(崔思諏)어사대부(御史大夫) 임의(任懿)지주사(知奏事)윤관(尹瓘)등 에게 명하여 도우게 했다

7년 송 숭녕(崇寧) 원년, 요 乾統 2(숙종 7 1102)
○중서문하성에서 아뢰기를, ”새로 남경을 만들려면 반드시 땅을 넓게 차지하게 되어 백성의 토지를 많이 빼앗게 될 터이니 경위령(京緯令)의 말에 따라 산을 따라서 지세(地勢)대로 하시든지 혹은 물을 한계(限界)로 하여 지형(地形)을 정하여 먼저 안으로는 산수의 형세를 좇아서 동()으로는 대봉(大峰)까지, 남으로는 사리(沙里)까지, 서로는 기봉(岐峰)까지, 북으로는 면악(面嶽)까지를 경계로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좇았다.  

 

9년 송 崇寧 3년 요 乾統 4(1104 숙종 9)
○남경 (南京 서울)의 궁궐이 이룩되었다.  

동년 가을 7월에 좌복야정당문학 유신이 졸()했다. 신은 몸과 얼굴이 보통 사람을 넘지 못했으나 담()과 양()이 있었다. 젊어서 급제하고 청렴 근신(謹愼)으로 명성이 있었다. 일찌기 청주목사를 지냈는데, 백성들이 신같이 공경했다. 나라에서 도읍을 남경으로 옭기려 하자 재상 및 모든 관리가 다 가하다고 했으나, 신은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유녹숭과 홀로 그 불가함을 말했다. 무릇 국가의 일을 논함에 모두 충의를 위주하니, 당시의 의론이 중하게 여겼다. ○이오를 중서시랑평장사, 윤관을 참지정사로 삼았다 

동년
○무술일(戊戌日)에 남경에 거둥했다. 신축일(辛丑日)에 어가(御駕)봉성현(峯城縣)에 행차했다. 관전(官錢)을 내어 군신(群臣)군사(軍士)에게 차등 있게 하사했다. 때에 천화(泉貨 화폐)가 시행된 지 3년이나, 백성이 가난하여 통용할 수 없었다. 이에 주()()에 명해 미곡을 내어서 주식점(酒食店)을 열어 백성에게 매매를 허가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돈의 이용을 알게 했다. 8월 신해일에 왕은 남경에 이르러 대사(臺謝)와 원유( )를 유람했다. 모든 일은 다 일관(日官)이 아뢴 바에 따랐기 때문에 예법에 맞지 않았으나, 유사(有司)로서는 말하는 자가 없었다. ○송의 도강(都綱) 주송(周頌)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연흥전(延興殿)에서 군신(群臣)에게 잔치를 베풀고 폐백[]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원년(송 崇寧 5년 요 乾統 6) 1105 숙종 10
○나인(內人) 정극공(鄭克恭)에게 명하여, 사쳔소감(司天少監) 최자현(崔資顯)태사령 음덕전(陰德全)오지로(吳知老)주부동정(注簿同正) 김위제(金謂제) 등과 서경으로 가서 용언(龍堰)의 옛 터를 보게 했다. 처음에 술사가 참언으로 왕에게 서경의 용언에다 따로 궁궐을 창건해서 때때로 순행하여 거처할 것을 권했다. 왕은 양부 및 장령전의 수교(讎校 글을 교정(校正)하는 것)하는 유신에게 명하여 모여서 으논하기로 한 바 모두 가하다고 하는데, 지추밀원사 오연총 혼자만이 아뢰기를, “근자에 남경의 역사가 비로서 끝나 백성을 지쳤고 재물은 죄다 없어졌으니, 지친 백성을 부리어 새 궁궐을 세움은 옳지 않으며, 만약 순어(巡御)하려 할진댄 구궁(舊宮)만 못합니다” 하니, 응하지 않았다 

 

3(송 大觀 2, 요 乾統 8. 예종 3 1108), 봄정월(9)

○갑술일에 남경에 거둥했다. 

○윤 8월에 계묘일에 왕은 태후를 모시고 남경에 거둥했다가, 드디어 삼각산 장의사(蔣義寺) 및 승가굴(僧伽窟)에 거둥했다 

 

12년 송나라 政和 7, 요나라 천보(天輔) 원년 1117 예종 12
○가을 8월에 남경(南京)에 거둥했다 

○동년 왕이 남경에 이르렀는데 글안에서 투화(投化)하여 남경 근처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글안의 가무(歌舞)와 잡종 유희를 연출하여 해차를 맞이한, 수레를 멈추고 구경했다. ○연흥전(延興殿)에 나가 조하(朝賀)를 받고, 시를 지어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다. ○여러 앙족과 양부와 시신(侍臣)들을 모아 행궁(行宮)에서 잔치했다. ○승가굴(僧伽굴)과 장의사(藏議寺)에 거둥했다. 9월에 중양연(重陽宴)을 연흥전에서 베풀었는데, 왕이 매우 즐거 워서 시를 지어 좌우에게 보였다

 

15년 송나라 宣和 2, 요나라 天慶 10, 금나라 天輔 4(1120. 예종15)
2월에 남경에 거둥했다. ○여름 4월에 남경에서 돌아왔다.  

 

4년 송 흠종(欽宗) 정강(靖康) 원년, 금 천회(天會) 4(인종 4, 1126)
(10) ○남경(서울)에 행차했다.  

 

6년 송 건염(建炎) 2년 금 천회(天會) 6 1128 인종 6
O 2월에 남경 궁궐에 불이 났다.  

 

경오 4[송 紹興 20년 금 天德 2] 1150 의종 4
○가을 9월에 남경(南京)에 행차했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하늘에 뻐쳤다. ○남경으로부터 돌아와서 사()를 내렸다. 

 

정해 21(송 乾道 3, 금 大定 7. 1167 의종21)
8월에 남경에 행차했다. 행차가 가돈원(加頓院)에 이르니, 광주(廣州)에서 의위(儀衛)와 악부(樂部)를 갖추어 맞이하고, 말과 견여(견與)와 양산(陽傘)을 바쳤다

 

갑오 21년 송 端平 원년, 금 天興 3(1234 고종 21)
가을 7월에 내시(內侍) 이백전(李百全)을 보내어 왕의 옷을 남경(南京)의 가궐(假闕)에 봉안(奉安)했다. 어떤 중이 도참(圖讖)에 의거하여 말하기를, “부소산(扶蘇山)에서부터 나뉘어 좌소(左蘇)되어서 그것을 아사달(阿思達)이라 했으니 옛날의 양주(楊州) 땅입니다. 만약 이 땅에 궁궐을 짓고 거처하면 국조(國祚) 8백 년까지 연장될 것입니다” 하므로, 이 명이 있었다

 

을미 22년 송 端平 2, 몽고 태종 7. 1235 고종22 
봄 정월에 원자(元子) ()의 관계를 올리고, 책봉하여 태자를 삼았다. 2월에 태조 신어(神御)를 받들어 남경 새 대궐에 이안(移安)했다. ○조()하여 3월에서 5월까지는 왕의 옷을 남경 대궐에, 7월에서 10월까지는 옛서울의 강안전(康安殿)에 이안하고, 11월에서 명년 2월까지는 또 남경에 이안하기를 돌려가며 했다.  

 

11(원 至元 22) 1362 공민왕 11
9월 갑신일에 왕이 공주와 함께 남경(남경)에 거둥했다.  

 

신축 27년 원 大德 5(1301 忠烈王 27)
(11) 경신일에 왕이 남경(南京)에서 사냥했다.  

 

17년 원 지순(至順) 원년(1330 충숙왕 17)
12월에 한종유(韓宗愈)를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임명했다. ○상호군 주주를 원나라에 보내어 신년을 축하하게 했다. 왕이 견주(見州)에 가서 덕비(德妃)를 뵙고, 남경(南京)을 순시하고 돌아왔다.  

 

▶ 명나라 보응현 기록 (강소성 보응현)

 

"송나라 치평 년간에 고려왕이 성을 축성했다."하여 고려 숙종때 축성한것으로 확인된다.

 

 

  

이후 원나라 섭정시기에 지명이 이동된것으로 보인다. 

 

9년 원 至正 20(1360 공민왕 9)
○가을 7월에 왕이 백악(白岳)에 거둥하여 도읍을 옮길 자리를 보았는데, 백악은 임진현(臨津縣) 북쪽 5()에 있다. 이보다 먼저 남경(南京)으로 도읍을 옮기고자 하여, 전 한양윤(漢陽尹) 이안(李安)을 보내서 성과 대궐을 수리하게 하니, 백성들이 몹시 괴로와했다. 이에 태묘(太廟)에서 점을 쳤더니 불길하므로 도읍을 옮기지 않았는데, 이 때 또 백악에 역사를 시작하니, 당시 사람들이 신경(新京)이라 했다. 재상들이 남경(南京)의 궁실(宮室)을 헐고 백악으로 옮기려 하니,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 김일치(金一致)가 떠나면서 아뢰기를, “지금 남경(南京)의 궁실을 헐고 보면, 백성들이 실망할까 하나이다”하니, 왕이 놀라 이르기를, “나는 실상 알지 못하는 일인데, 재상들이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하고, 곧 헐지 못하게 명했다.

 

 주원장에게 패한 명승사,방국진,장사성등의 반란군이 어찌하여 고려로 도망왔는지 이해가 가능하고 고려가 망한후 200년후 발생한 임진왜란시 조선에 대한 지원군과 왜군 침입에 맞선 명군의 집결지가 양주였는지 알 수있게 한다. 그리고 조선중기의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詩 <哭子>에 어찌하여 廣陵이 나오는지에 대한 연유를 알 수 있게 하기도한다.

 

심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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