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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

西京을 두번이상 옮긴 기록

작성자心濟|작성시간14.02.19|조회수544 목록 댓글 4

 

고려사기록에 의하면 태조 왕건은 고구려 마지막 평양을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조는 왕위에 즉위 하자마자 평양성을 중시하고 자주 들렀다. 고려초 평양과 서경을 다른 곳으로 볼 것인지 혹은 같은 곳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 설왕설래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평양과 서경에서의 사업이 겨우 1-2년 차이를 두고 일어나고 있고 두 군데의 일을 서로 다르게 처리한다는 것은 힘든 일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려사 太祖 元年 (918)

丙申 諭群臣曰, “平壤古都, 荒廢雖久, 基址尙存. 而荊棘滋茂, 蕃人遊獵於其間, 因而侵掠邊邑, 爲害大矣. 宜徙民實之, 以固藩屛, 爲百世之利.” 遂爲大都護, 遣堂弟式廉, 廣評侍郞 列評守之.

신하들에게 유시하길 평양 옛 도읍은 황폐한지가 오래되었으나 그 기반은 아직 까지 남아있어 가시덤불이 무성하고 번인들이 그곳에서 사냥을 하고 그 읍의 주변에서 노략질을 하여 그 폐해가 크니 사람을 옮기어 살게 해서 변병을 보호하게하면 그 이득이 백세를 갈 것이다 하고 왕식렴으로 하여금 토벌하고 지키게 하였다.

 

918년에서 919년 기록의 평양성 축성 기록은 같은 지역으로 볼 수 있을까?.

 

太祖 元年 9(918)

冬十月 城平壤.

평양에 성을 쌓다.

 

고려사 卷一 世家 卷第一 太祖 210(919)

冬十月 城平壤.

太祖二年 城龍岡縣一千八百七閒, 門六, 水口一. 城平壤

평양에 1807, 문이 6개 수구가 1곳 크기 성을 쌓다

 

우리는 이 기록에서 성을 쌓은지 1년 만에 건물까지 전부 완성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918년 ,919년에 평양성을 쌓았다.평양 (서경?)성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데 기록대로 1807칸이면 고려 문종 때 20년 만에 완성된 고려 최대의 왕사 흥왕사 2800칸보다 작고 현재의 1600칸짜리 경복궁보다도 큰 건축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태조는 평양성이 축성 된지 2년 후에 서경으로 가서 성안에 백성을 이주시켜 채우기 시작한다. 정황상으로 성을 먼저 쌓고 사람을 채우는 것이 옳다면 919년의 평양성과 921년의 서경은 같은 곳으로 볼 수 도 있겠다.

 

고려사 太祖 4(921)

壬申 幸西京.

왕이 서경에 가다.

 

고려사 太祖 5(922)

是歲, 徙大丞 質榮·行波等父兄子弟, 及諸郡縣良家子弟, 以實西京. 幸西京, 新置官府員吏, 始築在城. 親定牙善城民居.

그해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하여 영과 행파등 부자와 여러 군현의 양가집 자제들을 서경을 옮겨 채우고 서경으로 가서 관부관원들을 새로 배치하고 성을 쌓기 시작하다. 태조가 친히 아선성 백성을 그곳에 살도록 정하였다.

 

고려사 太祖 8(925)

(乙酉) 八年 春三月 幸西京.

왕이 서경으로 행차하다.

 

고려사 太祖 9(926)

冬十二月 癸未 幸西京, 親行齋祭, 巡歷州鎭. 是歲, 遣張彬如唐.

왕이 서경으로 행차하여 친히 제를 지내고 주 진을 순찰하다. 그해 장빈려를 후당에 보냈다.

 

고려사 太祖 12(929)

(己丑) 十二年 夏四月 乙巳 幸西京, 歷巡州鎭.

서경으로 가서 주 진을 순방하다.

 

고려사 太祖 13(930)

夏五月 壬辰 幸西京. 六月 庚子 至自西京 (8)

서경으로 가서 8일 만에 돌아오다.

 

931년부터 935년까지의 기록은 제외하고라도 938년 외성인 나성을 쌓는다.

고려사 太祖 21(938)

築西京羅城.

서경에 나성을 쌓다.

 

고려사 定宗 2월미상 (947)

(丁未) 二年 春 築西京王城.

서경에 왕성을 쌓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 이상한 사실을 보는데 태조2919년 평양에 1807칸의 성을 쌓고 또 왕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어딘가 미심쩍은 기록으로 또 다른 서경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고려사 光宗 11(960)

(庚申) 十一年 春三月 甲寅 賜崔光範等及第. 定百官公服. 改開京爲皇都, 西京爲西都.

 

그런데 개경을 황도라고 했는데 아래 기록으로 본다면 그 이전시기 황도의 규격을 가지지 못한 나성(외성)이 없던 개경을 황도라고 불렀을까 하는 생각이다.

 

고려사 현종 218(1029)

契丹聖宗, 侵入開京, 焚燒宮闕. 顯宗收復開京, 築羅城, 是月, 開京羅城成, 凡二十一年而功畢

거란성종이 개경에 침입하여 궁을 불태우자 현종이 개경을 수복하고 나성을 쌓았다. 개경의 나성이 완성되었는데 무릇 21년 공력이 들었다.

( 이전 邯贊以京都無城郭, 請築羅城, 王從之, 令王可道築之. 강감찬이 개성은 성이 없어 피해를 입었으니 나성을 쌓기를 주청하니 따랐다)

 

서경과 개경의 거리를 알 수 있는 사료로 중요한 것은 태조가 개경을 출발하여 서경으로 가서 6~8일 만에 다시 개경왕성으로 돌아오는 기록인데 지리적 상황으로는 車駕를 이용하여 편도로 이틀 정도의 거리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의 킬로수로 본다면 100km이내의 거리로 보인다. 고려의 초기수도라고 잘못 알고 있는 개성과 현 평양과의 거리는 205km이므로 위 사서기록으로 본다면 초기 평양이 현재의 개성과 평양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아래 고려사 기록에는 명백하게 고구려는 요산이 있는 곳이 구려의 중심지이며 평양이 있는 곳이라 적시하고 있다.

 

고려사 仁宗 (1126)

癸酉 遣衛尉卿 金子鏐, 刑部郞中 柳德文, 如金謝宣諭, 表曰, “高伯淑至, 密傳聖旨, ‘保州城地許屬高麗, 更不收復.’ 切以勾麗本地, 主彼遼山, 平壤舊墟, 限於鴨綠, 累經遷變. (중략) 惟此東濱之寸土, 本爲下國之邊陲, 雖嘗見奪於契丹, 謂已拜恩於先代, 特推異渥, 仍屬弊封, 豈僥倖而致玆? 盖遭遇之異甚. 深仁大義, 不可名言. 緜力薄材, 若爲報效, 惟當備春秋之事, 守藝極之常, 擧邦國而樂輸 傳子孫而永誓. 高明在上, 悃愊無他.”

(상략) 가만히 생각하건데, 구려(勾麗)의 원래의 영토는 저 요산(遼山)을 중심으로 하였고, 평양의 옛 땅은 압록강으로 한계를 지었었는데, 여러 번 변천을 겪어서 (중략) 이 동쪽의 자그마한 땅은 본시 우리나라의 변경 지역인데, 비록 일찌기 글안(契丹)에게 침탈당했으나, 이미 선대에서 은혜를 받던 터에, 특히 이례적(異例的)인 혜택을 베풀어 우리나라에 예속시키니, 어찌 요행으로 이렇게 된 것 이겠습니까.

 

윗 내용은 고려와 금 사이에 벌어진 정치적 타협으로 요나라와 금나라가 차지한 保州에 대해 고려는 보주가 원래 고려영토로서 돌려주기를 요청하는바 후에 금나라는 고려에게 보주를 반환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옛 고구려의 중심지 즉 평양성의 위치가 산서성 소재 遼山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당시 고려는 한반도를 고려의 동쪽 변경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또한 서쪽에서 이동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개경과 서경과의 거리는 가까운 거리인 반면 초기 평양은 위 기록에서 보듯이 산서성 遼山으로 비정되는바 이는 필자가 추정하는 초기 개경은 산서성 요산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 하거나 서경은 평양성과 다른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성종은 초기 태조의 행정지명과 다르게 행정구역을 변경하여 반포하였다. 1012주를 정하여 고려의 행정지명으로 한 것이며 이후 거란과의 전쟁이후 현종 때 5도 양계로 개편한 기록이다.

 

成宗 9(990)

己卯 敎曰, “我太祖應期降世, 敷德臨人, 百郡來庭, 三韓安堵. 尊居南面, 創置西京, 差宗室之親, 守咽喉之地, 分司職務, 各掌權機. 每當春秋, 親修齋祭, 欲防戎虜, 以固藩籬, 憑玆平壤之雄都, 固我祖宗之霸業.(하략)

우리 태조께서 서경(西京)을 처음 설치하고 종실(宗室)의 지친(至親)을 보내어 요해(要害)의 땅을 지키게 하며 , 매양 봄과 가을에는 친히 가서 재제(齋祭)를 올리고, 오랑캐戎虜를 막아 번리(藩籬)를 튼튼하게 하고자 하였다. 웅장한 평양의 도읍에 의거하여 우리 조종의 패업을 공고하게 하였다... (하략)

 

고려사 成宗 1210(993)

閏月 丁亥 幸西京, 進次安北府, 聞契丹蕭遜寧攻破蓬山郡, 不得進乃還. 遣徐熙請和, 遜寧罷兵.

서경과 안북부에 거둥하여 거란의 소손녕이 봉산군을 격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더 나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서희를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현종에 이르면 거란의 공격으로 서경에 황성을 쌓았다 기록하고 있으며 개경에서 서경으로 이동하는 시간은 930년 태조 기록 보다 4일 단축된 왕복 4일로 단축되게 된다. 즉 개경과 서경이 가까운 거리내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려사 顯宗 28(1011)

是月, 增修松嶽城, 築西京皇城.

송악성을 증축하여 보수하고 서경에 황성을 쌓다.

 

고려사 顯宗 63(1015)

三月 癸未 幸西京.(3/25) 是月, 王至自西京. (3/29)

서경에 거둥하여 왕도로 돌아오는데 4일이 걸리다.

 

고려사 현종 218(1029)

契丹聖宗, 侵入開京, 焚燒宮闕. 顯宗收復開京, 築羅城, 是月, 開京羅城成, 凡二十一年而功畢

거란성종이 개경에 침입하여 궁을 불태우자 현종이 개경을 수복하고 나성을 쌓았다. 개경의 나성이 완성되었는데 무릇 21년 공력이 들었다.

 

윗 기록에서 개경은 현종때 거란군이 개경을 분탕하고 전부 불태운 것으로 기록하였던바 1011년 송악성을 보수하고 1029년 개경에 21년간 나성을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면 개경은 1009년 이전에 이미 수리에 들어갔다고 보면 현종때가 아니라 성종때 거란의 침입에 의한 손실로 인해 짓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송악과 개경은 같은 지역이 아니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이후 또 다른 기록으로 대몽항쟁이 시작된 시기인 몽골의 쿠빌라이와 고종간의 전쟁기록으로 고려의 서경이 두 군데였다는 것 즉 13세기 서경과 그 이전 시기의 서경으로 존재했다는 기록이다.

 

고려사 高宗 462(1259)

庚子 李凝還自西京曰, “王萬戶云, ‘汝國王不愛百姓耶? 何聽尹椿·松山之言, 不出降乎? 降則秋毫不犯.” , 王萬戶率軍十領, 修築西京古城, 又造戰艦, 開屯田, 爲久留計.

이응이 서경에서 돌아와서 전하길 " 왕만호가 당신들의 왕은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가? 어째서 섬에서 나와 항복하지 않는가?"라 했다하다. 그때 왕만호가 군의 십령을 이끌고 서경 옛 성을 수리하고 전함과 둔전을 만드니 오래 버틸 계획이었다.

 

만약 현재의 평양이 13세기 고종 때의 서경이었다고 가정한다면 서경은 평양의 북쪽 혹은 다른 지역 어딘가에 위치하였을 것이고 인종 기록 중 고려가 累經遷變(누경천변)하여 지금의 땅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고구려가 망한 후 약250년간 여러 번 그 근거지가 변경되었다는 뜻으로 본다. 그렇다면 고려태조 시기의 평양과 후대의 서경은 다른 곳에 위치하였어야 한다.

 

구오대사에는 고려 왕건과 다른 인물인 듯 한 왕건립을 세워 후대에 인물에 대해 햇갈리게 작성해 놓았는데 왕건립이 왕건이라고 <책부원귀>에서 가르쳐주고 있으며 오대사도 고려사도 모두 後周에 볼모로 있던 왕인적을 소환하는 건에는 등장하는 왕건이 바로 고려국왕이라 밝히고 있다.

 

그런데 중국 사료에는 왕건의 출생지를 楡社로 기록하고 있으며 고려사에는 漢州로 쓰고 있으나 그의 출생지인 산서 또는 하북 북부와 활동지인 靑州와 동평 그리고 고려의 창업지로 추정되는 하간 지역 등은 고려사에서 적시한 평양이 있는 요산 즉 산서성 좌권과 지역이 서로 멀지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왕건이 고구려의 적통성 계승을 위해 국호를 고려로 정한 것은 나름대로의 연원적 이유가 있으며 거란과의 적통성 싸움은 서희와 거란과의 담판에서도 여실히 드러남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첫째, 고려사에서는 평양과 서경을 혼동되게 기록였지만 시간의 순서로 볼 때 평양과 서경이 다르지 않은 곳으로 볼 수도 있으나 초기 기록을 볼 때 평양과 개성(개경)이 업무 일수 포함 왕복 6일내의 이동거리에 있음을 알 수 있고 초기 평양이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遼山이라면 개경 또한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여야 함을 알 수 있다.

 

둘째로 평양에 1807칸의 매우 거대한 성을 쌓은 이후 937년에 라성을 쌓고 947년 성종이 왕성을 쌓았다 기록하고 1011년 현종 때 다시 황성을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일반적 상식으로 나성(외성)안에 내성이 있고 그 안에 황성(왕성)이 있는 구조라고 할 때 태조가 세운 거대한 평양성의 구조는 성종이나 현종의 서경과 다른 지역이라고 추정하기에 충분하다.

 

셋째로 1259년 고종의 항몽시기의 기록으로 보아 강화도에 들어가 저항하던 고종의 출륙을 요청하는 몽고의 기록에서 고서경과 신서경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서경이 태조 왕건이 다시 세운 옛 고구려 평양인지는 확인 할 수 없지만 과거의 인식과는 전혀 다른 고려에는 서경이 두 곳 이상에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심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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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청송 | 작성시간 14.02.19 城이나 築이 동사로 쓰인 경우, 쌓기를 시작한 것을 기록한 것이지
    완료된 것까지를 항상 내포하지는 않음을 유념하실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 작성자청송 | 작성시간 14.02.21 위에 西京으로 언급된 곳은 海口 땅 海城지역의 平壤이란 옛朝鮮과 大夫余 및 北夫余 그리고 高勾麗의 平壤은 아닌 것으로 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心濟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2.21 918년과 919년에 城平壤 기록은 오기로 보이고 918년이 맞을것입니다. 즉위 바로 그해 평양성에 갔다는 기록이있습니다. 919년에 두군데 평양성은 옛 평양과 용강현 평양성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답댓글 작성자청송 | 작성시간 14.02.21 고구리 평양성 인근에 龍江이 있었다고 하는데...
    영정하 북쪽 인근에 龍江이 있고...하여, 랑팡이 평양대성 내부의 東黃城 쯤이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하던 차에...
    근일간에 심제 선생님이 올리시는 글들에 머엉~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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