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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

태조왕건,후당-후진에서 940년까지 활약했다.

작성자心濟|작성시간15.10.23|조회수1,081 목록 댓글 4

고려사 志 卷第十  地理 一 

惟我海東, 三面阻海, 一隅連陸, 輻員之廣, 幾於萬里. 高麗太祖, 興於高句麗之地, 降羅滅濟, 定都開京, 三韓之地, 歸于一統. 然東方初定, 未遑經理, 至二十三年, 始改諸州府郡縣名.
成宗, 又改州府郡縣及關驛江浦之號, 遂分境內爲十道, 就十二州, 各置節度使. 其十道, 一曰關內, 二曰中原, 三曰河南, 四曰江南, 五曰嶺南, 六曰嶺東, 七曰山南, 八曰海陽, 九曰朔方, 十曰浿西. 其所管州郡, 共五百八十餘, 東國地理之盛, 極於此矣.

918년 삼한을 통일하고도 돌볼 경황이 없어 23년동안(~940) 주부군현 이름을 짓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고려태조 왕건이 918년 고려를 개국하고도 23년간 고려영토의 주부군현의 이름을 확정짓지 못한 까닭은 바로 후당,후진에서 매우 중요한 직위를 유지하며 활동했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신라,백제의 땅의 일부를 五代에서 차지하고 있었고 오대가 망할때에 왕건은 이미 큰 대족이 되어 後唐(이존욱) 이나 後晉(석경당)에서 건드리지 못할 존재가 되어 고려에서 그 땅을 돌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기록이 송사 권487에 기술된 것으로 보인다.

後唐同光,天成中其主高氏累奉職貢.長興中權知國事王建承高氏之位,遣使朝貢,以建為玄菟州都督充大義軍使封高麗國王.

후당(922~925)천성 중 그 나라 군주 고씨가 누대로 조공하였는데 930년 이후 권지국사 왕건이 고씨의 지위를 이어 받아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이로서 왕건이 현토주도독충대의군사로 고려국왕에 봉해졌다.

 

 오대사에서 고려왕건과 왕건급 그리고 왕건립을 다른사람으로 묘사해 놓았으나 결국 동일 인물, 그의 마지막 작위는 韓王이다.

 

 韓王은 동이 조선 계열, 지역의 왕에게 불리어졌던 君王의 명칭이다. 결국 태조 왕건이 韓人이라는 뜻이다. 南史등에는 당시 한반도를 한국으로 불렀다.

 

 중국에서 그를 다른 사람으로 위장하여 신상을 돌려 놓았지만 결국 왕건은 고구려의 후예로 산서성 요주(遼州) 유사(楡社) 사람이다. 또한 유사는 고구려의 시원지로  연남생의 사후 봉작 또한 현토주도독으로 신라는 태조가 터를 잡은 곳을 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라고 한 것이다. (몇몇이들에게서 태조왕건이 사천성 출신으로 그곳을 한주라해서 왕건은 곧 전촉왕으로 주장하기도 하지만 두사실과의 관계에서 연결고리가 없다)

 

필자가 오대사 왕건립을 고려왕건으로 확정해 주장하는데에는 결정적 단서가 오대사와 고려사간의 비교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

 

오대사에서 왕건(왕건립)의 가계는 아래와 같다.

遼州榆社人.,祖嘉,父弁,累贈保.

요주 유사사람으로 증보부는 왕추, 조부는 왕가,부친은 왕변으로 태보에 봉해졌다.

 

후당(後唐)에서 주요 작위

 鎭州유후(926)王建立-진주절도사동평장사(927)- 潞州절도사 및 시중(930)태부치사(931) - 사직-검교태위 겸 시중 運州절도사(934)  

 

후진(後晋)에서 주요 작위

運州절도사(934)- 平虜軍절도사 사공문하시랑,평정서, 문관대학사마도겸 제도 염철전운등사(937) - 평로군절도사 검교태위 겸 중서령 임치왕- 東平王(937) – 靑州 절도사 - 韓王(940)  


아래 표로 정리해본다.



왕건립이 수봉했던 작위의 위치 

  

  왕건이 신라, 후당,후진에서 절도사로 역임했던 지역 (근거- 구,신오대사)

 

 구오대사에서 원래 그의 이름은 개작되고  숨겨져 王建及-王建立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디에서 말하는 사천성 까오리 왕건은 더더구나 아니다. 왜냐하면 동시대의 까오리 왕건과 청주자사 왕건립과 연결기록이 없기때문이다. 

<오대사>에서는 왕건을 다른사람 왕건립으로 고수하였지만 <책부원구>는 왕건이라고 하였다.  


『舊五代史』

 後晋天福5(940)庚子 2月丁酉朔丁巳, 靑州節度使東平王王建立來朝. 3月丁卯朔癸酉, 靑州節度使王建立授昭義軍節度使, 進封韓王, 仍割遼, 沁二州以昭義屬郡, 以建立本遼州人.


책부원구 《129

晋高祖天福二年(939)五月制天雄节度秦国公范延光可封临清王,又制凤翔节度使西平王李从严封岐王,是月封平卢节度王建为临淄王,二年封东平王,五年入觐进封韩王


918년 왕건은 그의 주세력지인 하북 淸州(당시 치소는 산동)에서 개국을 선언하고 이중 직함으로 활동하였던것으로 보여진다. 결국 이존욱과 석경당은 실세인 절도사 왕건의 허수아비 이었을 수 도 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에서 『고려사』를 십수차례 교정하면서 철저히 숨기고 싶었을것이다.  

따라서 사학계에서도 이 행간의 사실을 철저히 연구해야 역사의 진실이 드러난다. (운영자의 저서에 자세히 서술하였다.)

 

심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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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광화세계 | 작성시간 15.10.24 훌륭합니다. 그 당시 청주는 현 하남성 개봉시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근거는 북위가 남하할 때, 남제를 공격하기 위한 전초기지가 현 하남성 개봉시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 당시 지명이 청주라는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 작성자한 눌 | 작성시간 15.10.26 아픈 역사, 아픈 마음으로 정리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섯 번이나 고친 고려사, 78년의 세월의 끝에
    이극감이, 양성지가 외친 소리 또한 점검해야 하리라 봅니다.
    더러운 역사책(穢史)에 항상 청사(淸史)를 기대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史穿 | 작성시간 15.10.26 예...李朝人들이 더렵혀놓은 우리 옛 역사를 淸史로 光復해야 우리의 정기 즉 얼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남방 섬들(일본)과 서토(중공 등)의 역사왜곡은 애초 李朝가 빌미를 만들어준 것이니...
    아직도 금기시하고 있는 이것부터 우선하여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 작성자榮成 | 작성시간 15.10.26 當然(당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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