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에 태조 왕건의 거짓 조상 이야기를 짓고, 왕건의 주군 궁예(弓裔) 그리고 왕건보다 연장자이며 숙적 견훤(甄萱)과 그의 아들 신검3형제를 등장시켜 역사적 사실 보다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버린 고려와 조선사가들...史官이라면 이런 거짓 사실을 꾸밀 수 없었을 것이다.
고려를 창건하기까지의 역사적 인물의 본모습은 아래와 같이 추정된다. 아래 내용은 전부 【구오대사】를 세밀히 찾아보면 추적할 수 있음을 밝힌다.
1)왕건 - 王建立(본명 王建), 요주 楡社人 (현 산서성 유사), 산서성 유사는 고구려 玄莵地,鹽鐵官理使,
증조부 王秋, 조부 王嘉, 부 王弁. 晩年 불교귀의, 飯僧, 창건佛寺.
2)궁예 - 李克用 (본명 朱邪赤心 856-908) ,롱우 金城人, 애꾸눈, 15세때 부터전쟁참여, 騎射에 능함.
황실수비대장,당말 방훈의 난에 전공. 唐 賜姓. 후당 태조.
3)견훤 - 李茂貞(본명 宋文通 856-924), 深州 博野人, 당 궁궐 침입 황족살해. 후당 장종에게 924년
臣下로 칭하고 귀부함.
아들3명 장남 李從嚴,차남 李從昶, 동생 李從照. 唐 賜姓. 鳳祥節度使
그래도 못믿겠다는 분들을 위해.... 원문 그대로
더 연구를 해보아야 하겠으나 唐에서 주전충의 後梁이후 後唐이 창업될 때 까지 鳳祥 이무정과 이극용이 가장 큰 세력으로 최후까지 남게 된다.
天復三年(903),茂贞山南诸州尽为王建所陷,泾、原、秦、陇、邠、鄜、延、夏皆降于汴。茂贞独据孤城,内外援绝,乃请车驾还京,求和于汴,即斩韩全诲等二十人首级送于梁祖。
무정의 산남 여러주가 왕건에게 함락당하니 경,원,진,롱,분,린, 연,하주 모두가 변량(개봉)에 항복하였다. 무정이 홀로 성을 지키니 안밖의 원조가 끊겼다 이내 차가를 청하여 도읍으로 돌아와 변량(개봉)에 화친을 구하였다. 즉시 한전해 등 20인의 머리를 베어서 량조(주전충)에게 보냈다.
여기까지는 믿지 못하는 분들도 잘아는 사천 성도의 전촉왕 王建과 茂貞과의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다음 내용을 보자 .
及梁祖建号,茂贞与王建会兵于太原,志图兴复,竟无成功.
후량태조(硃全忠 852-912) 칭호를 세우는 일로 궁지에 몰린 무정과 사천왕건이 태원에서 병력을 결집시켜 다시 일어서는 뜻을 모았으나 이루지 못했다.
이무정의 본명은 송문통으로 봉상절도사를 역임하고 당왕조를 옹위하던 이극용과 최후의 경쟁자로 남지만 후당 장종때 귀부한다.
泗川에 있다는 前蜀王 왕건이 代州자사 왕건립즉 왕건이 활동한 北狄 소굴이라고 하던 산서성 太原으로 군사를 데리고 왔을까?
더구나 전촉 왕건은 918년에 죽는다. 그리고 그의 아들 딸 40명은 모두 936년 후당 장종에게 모두 죽임을 당한다. 왜? 그리고 어디로 갔을까?
본인의 저서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2017년 간행 편에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심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