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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수-칼럼

무신난의 포고령

작성자한 눌|작성시간25.03.26|조회수120 목록 댓글 0

모든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胥吏)일지라도

씨를 남기지 말게 하라." (고려사절요 제11권 경인 24)

1170년 고려 무신난의 포고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50여 명의 문신들이 몰살당했다.

그중 삼국사기 편수자들 또한 피화를 면치 못했고,

문중 족보에서도 사라졌다.

 

855년이 흘렀고 어렵사리 찾은 문중들도 기록이 없다.

김부식 가계도 손자 김군수(金君綏) 대에서 계대가 멈췄다.

경향 각지, 경기 남부지역으로 피신한 후대들은

타 계파에 흩어진 것으로 알려져 그 흔적을 알 수 없다.

족보에 등재할 경우 다가올 멸족의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이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정습명(鄭襲明)은 무신정변 발발 이전인 1151년 자진(自盡),

피화를 면했다. 연일 정씨의 시조로 유일하게 족보에 남아있다.

김부식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출처: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baseball_new11&no=10542605

 

 

1백년 무신들의 이 서린 처참한 기록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해당 문중들은 멸족의 화를 피하기 위해 기록을 멈춘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이 기록한 고려 정사요, 관찬사서는 1403년 절대 권력자들에 의해

또 한 번의 수난을 겪었다.

 

1403년 조선은 삼국사기에 수정을 가하여 속된 것과

번잡스러운 것을 삭제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정하지 못해 더럽고 거짓말 투성이며, 뒤숭숭하고 복잡하다하다는

의미를 담았다. 오늘 우리는 믿을 수 없는,

거짓 삼국사기를 보고 있음이다.

 

삼국사기냐, 삼국사냐의 호칭도 논란이다.

1174년 고려 무신정권은 삼국사기 판본을 송나라에 보냈다.

송나라 학자 왕응린은 옥해(玉海)라는 사전에 실었다.

이 때의 표기가 해동삼국사기이다.

1403년 조선이 조작할 때의 책명도 삼국사기이다.

1512년 정덕본, 1573년 옥산서원본은 앞서 조작된 삼국사기가 모본이다.

 

삼국사라는 표기는

고려 인종 23년인 1145년 김부식이 삼국사를 지어 바쳤다

(十二月 壬戌 金富軾進所撰三國史)라 하여

삼국사라는 호칭이 처음 보인다.

이는  세종이 고려사를 개찬하면서 개존 책명인  '삼국사기'를

의도적으로  '삼국사'로 수정, 삽입한것으로 보인다.

앞선 년대의  '삼국사기' 기록 년대의 표기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한편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동국이상국집에서

구삼국사(舊三國史)라 언급한 주장 (동국이상국집 전집

3, 고율시동명왕편 서문)을 인용하고 있으나,

*三國史記/ 三國史

 

삼국사기와 이름부터가 다르므로 굳이 구()를 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고려사는 1392년 편찬을 시작, 62년만인 1454(단종 2) 간행됐다.

편찬과정을 살펴보자.

1392년 착수, 1414년 개수, 이후 141992차 개수, 1423년 제3차 개수, 14384차 개수하여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이라 했다. 그러나 1446년 세종은 지나치게 고려왕조를 깎아내렸다 하여 5차로 개찬했다.

 

세종은 고려사 편찬자들에게 고려 역사를 왜곡하지 말라 지시하는 반면

고려왕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위선을 자행했다.

고려사가 근래 국가지정 보물이 된다하여 이를

세종의 숨은 통찰과 고뇌가 담긴 것이란

일부의 평가가 안타까운 것은 왜일까?.

시대적 배경에 편승해 세종을 성군화하려는

일말의 부화뇌동이 아닌가 싶다.

 

조선은 고려실록과 고려말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 정가신(鄭可臣)의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 민지(閔漬)의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를 고려사 편찬의 주요 참고자료로 삼았다. (국조보감 제5)

이제현의 사략(史略), 이색과 이인복의 금경록(金鏡錄) 또한 포함되었다.

 

그러나 편찬 자료는 현존하지 않는다.

이는 분서로 사라지고, 왜곡되고 폄훼되었다는 증빙이다.

고려사가 예사(穢史)라 불리는 이유이다. ()는 더러울 예자다.

삼국사라는 책명도 이 때 삽입되었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 밖에 없다.

 

고려사는 1454(단종 2) 검상(檢詳) 이극감(李克堪)이 당상(堂上)에서 고려전사(高麗全史)가 출간(出刊)되면 사람들이 모두 시비(是非)를 알까 두려워하여 다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만을 인간(印刊)하여 반사(頒賜)하고, 고려전사는 조금 인간하여 다만 내부(內府)에만 간직하였습니다”(단종실록 1013)라는 황당한 이 보고서를 보면, 고려사 내용이 얼마나 왜곡되었는가를 보여준 극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삼국사기라는 이름이 굳어졌다는

주장이 비등해 지고 있음이 안타깝다.

지엽적인 논란으로 역사를 오도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는가.

 

2025년 기준 삼국사기 편찬 880돌이다.

참담하고 비통한 편찬 동참자들,

이들을 기리기 위한 제례가 뜻있는 역사가들이 모여

2025, 2. 4일 우리역사교육원에서 진행되었다.

 

편수자들의 면모를 보면 다음과 같다.

편수(編修) /김부식(金富軾), 관구(管句) /정습명(鄭襲明) 김충효(金忠孝),

참고(叅考) /김영온(金永溫) 최우보(崔祐甫) 이황중(李黃中) 박동계(朴東桂)

서안정(徐安貞) 허홍재(許洪材) 이온문(李溫文) 최산보(崔山甫) 11명이다.

 

한문수/ 수필가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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