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둥을 보고 그것이 기둥이라는 생각했다면, 그것은 기둥의 모양을 보고서 기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객관의 기둥은 이미 수백년 전부터 서 있는 사실인 것이고, 그것을 보고 기둥이라고 인식한 이 알음알이의 주관은 그 보다도 수백년이나 뒤늦은 오늘 이 시간, 이 찰나에 비로소 생긴 사건입니다.
그러나 천지와 만물은 생겨난 그 순간부터 그것이 없어질 때까지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쉴 새 없이 변화하면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저 물건이 그렇고 이 마음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시간과 공간을 가릴 것 없이 그것들이 다 천변만화로 변하면서 토막토막 측정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는 연속선인 가상의 환영입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러한 것들이 또한 그렇게 흘러서 가는 이 인생의 눈앞으로 번갯불같이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보았다고 하여야 할 것인가? 그것들은 ‘산’이다, ‘물’이다, ‘너’다, ‘나’다 하고 이름들을 지어 부르고 있습니다.
나는 이름이 무엇인가? 지을 수 있거든 불러보라. 그러므로 그가 인식하고 있는 기둥이나 기둥 모양은 이 우주에 실제로 없는 존재입니다. 만약 무엇을 인식할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다만 그가 그의 인식을 다시 인식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위에서 한 말은 자연계의 사물이 먼저 생겨 있는 것을 사람이 그 후에 그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는 유물관(唯物觀)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과학이 극도로 발달하여 물질, 그 궁극본체가 틀림없이 공무(空無)인 것은 넉넉히 미루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저 진공의 환변이 물질의 기환상이며, 이 가환물질의 환변상이 곧 저 가상의 대자연계인 것을 또한 수월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아무것도 아닌 진공이 변하여 현상계로 나타난 것이므로 현상된 그대로가 진공적인 존재라는 데서 ‘색즉시공’이라는 것입니다. ‘공즉시색’이라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로 저 허공이 현상계로 변하여 보인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냉철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저 아무것도 아닌 무정(無情) 허공이 어찌하여 제 스스로가 변화하며 현상(現象)할 수 있을 것인가? ‘공즉시색’도 또한 그리하여 진공적인 환영상의 무정 현상계가 어찌하여 그 스스로가 진공으로 변하여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는 필연코 커다란 그 무엇인가가 숨어 있어서 저 무한대의 진공포장에다가 ‘색즉공겙平癤贅??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런 영화를 상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 진공과 물질은 다만 자유도 없는 죽음의 무정 환상입니다. 그와 반대로 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런 영화는 반드시 절대자유한 이 삶의 무한생명으로서 조화의 무한 동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