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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님 따님(최복선 여사)의 인터뷰 내용

작성자합기사랑|작성시간03.03.19|조회수2,468 목록 댓글 0
[등록일] 1998년 04월 05일 15:01 Page : 1 / 11
[등록자] KEMGA [조 회] 210 건
[제 목] "북해도에서 본 다께다 소오가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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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해도에서 본 '다께다 소오가꾸'

이 글은 지난해 가을 대구에서 최용술옹의 큰 따님, 최복선여사
를 찾아뵙고 말씀들은 몇가지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현재 60대
후반이신 최복선여사는 1946년 1월, 부친 최용술옹과 함께 일본
북해도에서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했다. 최복선여사는 현재 국내
에서 최용술옹의 일본생활을 증언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당시 그는 여학생이었으며 나이는 16세였다. 또한 최복선여사는
당시 북해도 최용술옹집에서 몇개월씩 살곤했던 다께다소오가
꾸구를 직접 봤던 분이다. 따라서 그는 한국 합기무술과 최용술
옹의 역사를 쓰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증언과 사료를 갖고있는
분이다.
그러나 최복선여사는 인터뷰를 완곡하고도 단호하게 사양했다.
이유는 지난 수십년간 한국합기도계에서 이런저런 사유로 찾아
왔지만 모두가 찾아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장에 유리한 목적과
선전에 이용할 뿐, 진정으로 아버님(최용술옹)을 위해 진실과 사
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준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필자는 최복선여사를 뵙기위해 세차례의 연락을 거듭했고 잠시
만나뵐 수 있었으나 역시 단호하게 사양하셨다.
따라서 이 글은 정식 인터뷰 글이 아니며 최복선여사와 잠시 나
눈 대화를 글로 정리한 내용일 뿐이다. 최복선여사의 입장에서는
허락하지 않은 글을 필자가 게재하는 것이므로 몹시 송구하고 죄
죄송스럽다. 그러나 한국의 젊은 합기무술세대가 궁금해하는 최용
술옹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짧은 내용이나마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판단되어 올린다.
단시간내에 대화했던 제한적인 몇가지 질문에 대한 말씀을 기
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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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필자, 최)는 최복선여사


/검: 최복선여사님의 입장을 납득하겠습니다. 몇가지만 여쭙겠습
니다. 한국합기도계 일각에서는 최용술옹이 다께다 소오가꾸
의 진짜 제자였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는 시각이 있
습니다. 아버님(최용술옹)이 다께다 소오가꾸의 제자였던 것
은 사실입니까.

최) 기가막힌 일입니다.
아버님이 다께다 소오가꾸 선생의 제자였던 것을 의심하다
니….
나도 아버님에게 술기를 배운 제자요(최복선여사는 합기술 유
단자이다. 초기합기도 원로들에게는, 최복선 여사가 20세 안팍
나이에 전국에서 이름높았던 대구 계성중고교 유도사범(5단)
권선생과 술기를 겨뤄 제압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다께다 소오가꾸는 내가 아버님과 북해도에 살 때 우리집에
온 것을 직접보고 만났던 사람이요.


/검; 당시 다께다 소오가꾸가 최용술선생님 댁에 들르신 이유는
무엇이었는지요.

최) 당시는 내가 10대의 나이였는데 내 기억으로는 어렸을 때부
터 다께다 소오가꾸가 우리집에 와서 2-3개월씩 혹은 수개월
씩 정기적으로 머물며 살다가곤 했습니다.
어떤 특별한 일이 있었다기 보다는 제자의 집에 얼마간씩
생활하다 거처를 옮기고는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검: 당시 최용술 선생님께서는 다께다 소오가꾸 선생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최) 그 때, 어린 나이에는 다께다 소오가꾸 선생이 미워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만 집에오면, 마치 대감 모시듯 안방에다 모
셔놓고 아버님(최용술옹)과 어머님이 안절부절 못하고 정성
을 다해 시중을 들었으니까요.
당시 아버님은 북해도에서 누구도 함부로 못하는 이름이 높
았던 분이예요.
경찰서장이 문안을 들일 정도로 명망도 있었고, 또 아버님
의 성정이 대단하여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거나 자세를 낮
추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다께다 선생만 오면 아버님이 어쩔줄 몰라하고 극진
히 모시는데, 그것을 본 어린 저의 마음으론 우리집에 와서
부모님을 불편하게 하는 다께다 선생이 미웠던 게지요.

/검: 그때 본 다게다 소오가꾸의 인상이 기억에 나십니까.

최) 그럼요.
키가 아주작고, 아버님보다 작았어요. 한 150Cm 될까.
몸도 작고 머리도 작았습니다. 그런데 눈빛은 얼마나 무서
웠는지 모릅니다.
안방에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는데 눈이 '바싹바싹' 빛나는게
섬ㅉ할 정도 였어요.
아버님 눈도 보통이 아니었는데 그 양반의 눈은 더 무섭더
라고요.


/검: 다께다 소오가꾸와 아버님(최용술옹)의 술기장면을 보신 적
이 있습니까.

최) 아닙니다.
아버님은 절대로 사람이 보는 곳에서 술기를 하시지 않습니
다. 당시 북해도에서 아버님의 가장 친한 친구 한분이 아버
님에게 꼭 한 번 보여달라고 했었는데, 결코 보여주지 않더
군요.
두분만이 비밀리에 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검: 다께다 소오가꾸가 1943년에 사망했는데 당시 아셨습니까.

최) 그럼요, 그 부고장은 내가 받아보고 아버님께 알려드렸는데,
그 당시 읽었던 기억으로는 객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께 알려드리자 곧 장지로 가셨습니다.


/검: 다께다 소오가꾸가 사망하기 얼마전에 최용술선생님댁에
다녀가셨습니까.

최) 우리집에서 떠나신지 약 2달만에 내가 부고장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다께다 선생이 떠나기전에 우리집에 몇달을 계
시다가 갔고 그 때 북해도의 겨울이 매우 추워서 아버님(최
용술옹)과 어머님이 솜으로 된 옷을 직접 입혀드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검: 일본에서 해방후 어떠한 경로로 한국에 귀국하셨습니까.

최)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에 북해도 오타루에서 좀떨어진 시골
에 가있었는데 폭격공습을 피해서 였지요.
해방된후 바로 귀국하려고 했는데 주위의 아버님 친구분들
이 왠일인지, 말렸어요. 가지 말라고요. 정히 가려면 3년정
도 있다가 가라고 말입니다. 1946년 1월에 귀국했습니다.
원래는 북해도에서 바로 건너오려고 했는데 당시 동해에는
2차대전중 떠나니던 어뢰 때문에 배가 침몰할 우려가 있어
서 뜨질 못했습니다.
결국 홋카이도에서 혼슈로 내려와 센스치항에서 부산으로
귀국했지요.


/검: 귀국직후 최용술옹께서 중요한 가방을 잃으셨다고 하는데

최) 네. 그건 사실입니다.
그 자리에 내가 있었으니까요. 당시 부산항에 도착해보니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각 지역별로 사람들을 모아 옮기
고 있었는데 우리의 짊은 모두 22개 박스였지요.
그런데 짊을 옮기던중 한 청년이 도와주겠다고 하데요.
그래서 고마워 같이 짊을 날랐는데 나중에보니 22개 박스중
1개 박스를 도난 당하고 말았습니다. 푸른 색깔의 그 박스
에는 아버님의 서류와 중요한 물건, 돈, 집기 등이 있었는데
거기서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검: 귀국 후 바로 대구로 가셨습니까.

최) 아닙니다. 아버님 고향인 황간에 갔다가, 어머님 외가댁에
들렀지요. 그 후 다시 어떻게 나오던중 대구에 정착하게 되
었습니다.


/검: 최용술선생님께서 다께다 소오가꾸의 직전제자라면 술기
측면에서 현재 일본에서 대동류합기유술의 극의라고 하는
합기기법을 체득 하셨어야 입증이 된다고 보는 시각이 있
습니다. 특히 유술적 합기나 몸의 합기로 술기를 걸지 않
고도 상대와의 접촉없이 제압할 수 있는 최고수준의 술기
인 '기의 합기'라는 기술이 있다고 합니다.
혹시 아버님께서 이런 술기 장면을 연무하는 장면을 본적
있으십니까.

최)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아버님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손 안대고, 처리하는 기술이 있다고요.'
그런데 아버님(최용술옹)이 말씀은 하셨지만 그것은 마지막
술기라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술기에 관한한은 가족이나 제자에게라도 절대로 빈틈을 보
이신 적이 없으셨던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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