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잊어버렸습니당
그럼 다케다 쇼가쿠가 한국식 이름인 원정의(原正義)를 그의 이름 곁에 나란히 붙인 것에 대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저는 일본에서 거주했던 적이 없지만 가까운 분이 일본에서 5년여를 수학하셔서 어느정도 일본풍물에 대해서 익숙한고로 이와 같은 내용을 자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식이름 뒤에 다시 석자의 한문식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물론 원정의 라는 이름이 아호였다면 저의 주장이 우스운 망발이 되겠으나 생전에 그가 그런 아호를 쓰지 않았고 공교롭게도 청화원씨의 "원"자를 그대로 사용하고 또한 "정의" 라는 이름을 붙였으므로 아호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점에는 수긍이 갈 줄로 압니다. 원정의는 원씨가문의 한국식 이름표기입니다
또한 청화원씨가 신라족이냐 라는 반문에는 두가지 시각에서 접근해야 하는데
첫째, 일본에서 고유하게 일어난 씨족이라는 관점이 있고
둘째, 일본이주 씨족이라는 관점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급격히 늘어난 지배세력의 갈등상황에서 생긴 ) 8세기 전후에는 일본 인구의 대부분이 한반도에서 이주한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이같은 사실은 생활습관, 의복 , 문화등등의 부분이 고대 사료와 유적등, 고분발굴 등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아직 8세기까지만해도 일본열도에서는 이렇다할 국가적 움직임이 적었습니다. 이것은 외세적 침략의 빌미가 없이 외딴 열도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시점에서 강력한 무사집단의 출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공료롭게도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유입된 상황과 일치하기 때문에 후자쪽에 더 가능성을 높게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그것을 뒷받침이라도하듯 "신라"라는 명칭의 사용, 다케다 쇼가쿠의 생전증언인 "이것은 본시 조선무술이다"(최용술 선생님의 증언 외에도 역시 다케다 문하에서 수업한 장인목선생의 증언에서 알 수 있슴)라는 전언, 신라의 신사인 원성사에 원의광의 묘가 있는점, 청화원씨의 씨신인 팔번신에 대하여는 일본의 대학교수들도 일본토착신이 아닌 바다를 건너온 외래신이라고 밝힌다. 청화원씨가 숭배한 신앙은 외떨어진 굴에서 오곡을 단식하며 수행하는 수행법이 있는데 이역시 다케다쇼가쿠가 최용술 선생과 같이 수련한 방법이었고 이것은 일견 신라의 화랑도들이 수련한 수련법과 유사하다. 다케다가 생전에 조선무술이라고 언급한 것은 사심없이 보아야 합니다. 외에도 낱낱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많은 자료들이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청화원씨가 일본의 본토씨족이 아니라는 증거들이 더 많습니다.
님께서 오해하시는 내용들은 일본사람들이 주장한 내용들이기 보다는 근래에 한국의 아이키도인들중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말도 않되는 내용을 조합한 것들이 많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일본의 아이기도나 대동류에서는 그같은 주장을 힘주어 말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합기도를 흔들어 버리면 한국의 아이기도는 당연히 위상이 오르기 때문에 그런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예전에 최용술 선생님이 살아계신 시절에 일본의 아이기도가 어떤 입장을 취해왔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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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현 : 미나모토에대해 궁금합니다 ┼
┼ 한문을 설명할때 일본식으로 다케다 소가꾸로 하다가 아래는 한국식으로 원정의라고 하였는데 원씨 성은 미나모토가 아닌가요? 그렇게들 읽는 것 같던데. 그럼 일본 고대에 막부시대를 열었던 미나모토가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얘기인가요? ┼
------ 참고하세요 ----------
미나모토 가문은 한자로 源氏가문입니다.
다케다소카쿠의 가문은 한자로 武田가문입니다.
미나모토가문은 여럿입니다.
그리고 다케다가문은 미나모토가문입니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金씨를 예로 듭시다.
우리나라 金씨 성은 하나이지만 김해 김, 경주김,.. 등등 본에 따라서
여러가지 김씨로 나누지요. 이와 마찬가지이지요.
미나모토 가문은 세이와(淸和)미나모토 무라까미(村上)미나모토.. 등등 많습니다.
그리고
이 미나모토가 즉 원씨에서 다른 성으로도 뻗어 나갑니다.
사이고라는 西鄕가문과 武田가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내용과 역사의 줄기는 일본의 무감이라는 무사의 계보도에 보면
일본막부의 각가문들의 역사가 세밀히 기록되어있습니다.
물론 그 도표의 기점은 일본 초대막부의 주인공인
세이와 미나모토가에 의해 시작되고 있고
대동류합기유술의 시조인 新羅三郞源義光도 초기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신라삼랑원의광은 세이와 미나모토가문인 '源賴義' 아들 입니다
그리고 신라삼랑원의광은 武田家의 시조이기도합니다.
즉 원의광은 원씨-미나모토가문이면서도 무전가-다케다가문의 시조입니다.
그러므로 다케다가문은 다케다가문이면서도 원씨가문인것입니다.
일본역사에서는 다케다가문을 다른 말로 -- 갑비(甲斐)지역에 사는 원씨라고해서
갑비원씨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무전총각(다케다쇼가쿠)생이 무전총각원정의 라고 표기한것은
다케다가의 자신이 본래 미나모토의 후손이라는
무전가가 미나모토가에서 나왔다는 역사와 유래를 잘드러낸 것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 이상의 내용은 이미 대동류역사에 관해 관심있는 분들 한테는
상식입니다.
그리고 하나 재미(?)있는 것은
무전가문이 갑비지역(지금의 야마나시현 후지산쪽) 들어가 형성된것은
신라삼랑원의광의 사후이며 그시기는 12세기말엽인데..
거기에는 이미 서기 820년대경에 세운 미나모토의 청화원씨가 세운
씨사(씨신을 모시는 우지데라) 가 무전팔번(八幡)신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당시에는 다케다가문이 역사적으로 없는 시기입니다.
앞서말한대로 1200년대가 되어야 가문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다케다가문이 갑비지역에서 가문을 형성하기 약 400년전에
다케다가문의 조상인 청화원씨의 신사가 이미 진출해있엇다는 것은
청화원씨가 그만큼 갑비(야마나시인근)지역에 관심과 눈독을 들인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그당시 미나모토의 신사가 처음 진출한 시기는
미나모토가문이 처음 등장한 차아천황(嵯峨天皇) 때입니다.
즉 미나모토가문이 등장하면서 후지산 북부 산악지역인 갑비에 팔번신의 첫깃발을 꼽은것은
미나모토가문의 특성의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즉 그 미나모토 가문은 고유의 종교적인 신앙과 수행을 존귀하게 여겼고
그로써 세력의 영역을 표시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후 11세기를 전후로해
신라삼랑원의광과 형인 원의가와... 그 형제들의 아버지인 원뇌의가....
관동지역에서 전쟁을 치루고 세운 무사가문의 우지데라(氏寺)로 카마쿠라에 세운 신사 또한
그 유명한 쓰루오카하치만구 입니다.
이에대해 간단한 설명은 이렇습니다.
<가마쿠라...>
1192년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賴朝 원뢰조)가 카마쿠라막부(鎌倉幕府)를 개설한 이래,
약140년간 일본 무가 정치의 중심이 되었던 역사적인 도시. 미나모토씨(源氏-겐지)의 수호신을
제사지내는 쓰루오카하치만구(鶴岡八幡宮)을 비롯하여, 신사, 사찰등의 유적지가 본존되어 있다.
일본역사에서
원씨들은 -- 미나모토 들은 무사계급으로 분류됩니다.
또 그들은 일관된 가문의 神을 모십니다.
또 그 신은 불교신도 아니고 ... 일본에서 신들의 교통정리(신계보도)가 되는 7세기무렵만해도
나타나지 않던 신들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서 천조대신과 맞먹는 전국적인 분포를 이룹니다.
(브리태니커에는 일본등록신사의 약 50%가 하치만신에게 바쳐진것으로 쓰고있습니다)
를 이룹니다.- 이는 이미 원씨의 신이 아니라 무사일반의 보편성을 지닌 신으로 발전한것이지요.
^^; 하다못해 야쿠자의 영화를 보면 뒤에 팔번대보살..이라고 쓴것을 보게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야쿠자들도 그들이 폼을 잡으면서 무사의 신을 세우고픈것이겟지요.
한편, 팔번신(하치만신)이 팔번대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교식 호칭입니다.
불교에서 보살이란 호칭은 높은존칭이며 팔번신은 최초로 신도계에서 보살호칭을 얻은
최초의 신격인데 그 이유는 동대사의 대불을 축조할때에 팔번신이 수호햇기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그들은 별나게 무력과 전투에 능한 가문입니다.
세이와(청화) 원씨는 전 가문이 전투에 능했으며 출현한지 약 300여년만에
일본의 무사계급의 실권을 장악합니다.
누대에 걸쳐서 무력이 출중하게 전승될수 있는 배후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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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와라가 나온 일본의 지방에 가니 한국풍습이 많더라 등은,그 곳 외
에도 한국과 유사한 풍습을 가진 지방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고 넘어
갈 문제입니다.(추천서적:동아일보사 출판,일본열도에 흐르는 한국혼)
그리고,그 야와라(대동류 합기유술)는 일본의 九洲지방을 발상지로
봐야할지,北國-雪國지방을 발상지로 봐야할지 자신있게 답할 사람은
제가 보기에 없습니다.일본에서조차 武田계열은 雪國(홋카이도오)에
종가가 있고,西鄕계열은 九洲쪽입니다.서로 자기쪽이 진짜고 상대가
배워나간 것이라 주장하므로 진위가 불분명합니다.어디를 보고 와서
닮았다고 한 말인지 밝혀져 있지 않아서 의문이 갑니다.
============== 관련자료 ========================
출처 : 이 자료는 제가 만든것입니다.
자료.1 <신라삼랑원의광>은?
일본 청화원(淸華源, 미나모토家)씨 계보에 따른 신라삼랑원의광(新羅三郞源義光)'이란 인물이 나옵니다.
'현해탄의 가교(소서추웅)'의 기록에 따르면 스스로 신라의 후손이라고 하고 다녔다고 하며 일본의 일반적인 기록에는 어린시절 원성사내 신라신사에 원복하여 신라삼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일본속의 조선문화 7권(22권중) : 117p
* 신라삼랑원의광(1045 ~1127)
義光은 新羅三郞, 館의 三郞等이라 불렸다. 新羅明神의 神前에서 元服하였기 때문에 新羅三郞이라 이름붙혀졌다고 하며 弓馬術에 능했고 음률에 능해 笙의 달인이였다고 한다. (일본측 사료)
'훈'이라는(현재의 생황)이라는 악기의 명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또 뛰어난 무인으로서 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었고 무전(武田)씨의 시조입니다.
자료.2 <신라명신> - 일본자료
* 日本文化院에 소장된 '大津市 新羅明神',
『平安時代の後期, 源賴義の子義光(1045-1127)は, 園城寺山內
新羅明神前で元服をし, 新羅三郞と名乘った.
新羅明神は 新羅(朝鮮)の 國神.』
자료.3 <청화원씨의 조상신>
하치만신은 미나모토가의 조상신이라고 받아 드려지고 있습니다. 청화원씨의 씨신인 하치만신(八幡神)은 일본내에서의 지방신에서 중앙신으로 성장하면서 신격이 변질되었다고 합니다.
일본 九州大學의 田村교수는 팔번신이 어느단계에서 일본 응신왕 신앙과 결합돼었다고 밝혔다. 팔번신은 본래 일본토착신이 아니며 바다를 건너온 외래신이다. 또한 팔번신의 신격은 三神으로 숭배된다. 아울러 다무라엔초교수는 '古代日本과 日本佛敎.1985'에서 일본 팔번신의 오래된 고대기록인 '宇佐託宣集'을 인용하면서 아래와 같은 내용을 밝혔다.
"하치만신(팔번신)의 출현을 이끈것은 오가히기(大神比義)라는
수행자였다. 오가히기는 산의 동굴에 살면서 오곡을 단식하면서
神仙이 되기를 수행했다. 宇佐의 땅에는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사람들이 정주해 살면서 그들의 토착신앙을 숭배했다. 宇佐 하치만신은 고대 한국의 신이다." 라고언급.
八幡神은 현재일본에 3만개 분포된 신사로 일본 건국신인 천조대신 다음으로 많고 일본역사에서 이 팔번신은 분명히 청화원씨
의 氏族神으로 명기되어있소. 이 팔번신을 평생연구한 일본 구주대의 中野교수는 이 신격에 대해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신격으로 결론짓고 있음. 그런데 이 팔번신은 일본 신들의 계보가 처음 정리된 천무 천황시기 즉 7세기에는 등장하지 않음 즉 8세기 이후에 일본의 중앙에 등장한 신격이고 이는 일본에서 청화원씨가 8세기이후에 중앙에 등장 하면서 세력이 강화된 추세와 동일함
월간조선 98년 1월호부터 한양대 홍윤기교수가 연재한 '일본천황가'의 논문에서 그는 일본 八幡神을 新羅神으로 확고히 규정짓고 있으며 현재 일본의 스모의 유래가 다름아닌 八幡神에 대한 신격의식에서 시작된것으로도 밝히고 있음
자료.4 <무전(武田)가의 이동경로>
'사가현'----'산리(야마나시)'-- 아이즈번--------- 북해도
<12세기> <16세기초까지> <16세기 초부터>
자료.5 <청화원씨의 시조> - 일본기록
54대 세이화 천황--청화천황(淸和天皇)
그 청화천황의 6번째 아들인 Teiljun(貞純親王)으로 부터 청화원씨가 시작됨
자료.6 <일본의 貞純親王 관련내용 왜곡>
일본 '旺文社'에서 펴낸 '일본의 역사' 라는 자료에는
Teiljun(貞純親王)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淸和天皇
ㅣ
( ) (?)
源經基
源滿仲
源賴信
源賴義
源義光 源義家
*(어느일본인의 답변)淸和源氏의 기원에 대해서는 12세기의 역사서「大鏡」란것에 기록도 있고 族譜도 잇습니다. 원래는 淸和天皇의 손자 經基王인데 新羅人이 아니예요.
자료 7. <원씨와 백제와의 관계>
道家 合氣術(하야시마 마사오)백제 왕인이 서기 3세기경 일본에 평법학을 전했는바 이를 궁중의 源씨들이 연구했고 평법학중 무술은 청화원씨가 계승했고 촌상 원씨는 도인법을 이엇다고 기록되어있고 국내에서 출간된 한일고대사서적(제목이 생각안나네요)에도 백제도래인이라고 소개되어있음
자료 8. < 원씨사성은 자식에게만 주었는가>
아울러 미나모토가인 源씨의 사성은 청화원씨가 처음이 아니고
52대 천황인 嵯峨때인 서기 814년에 최초로 50명의 源씨를 사성합니다. 일본고대사 연구가들의 일부에서는 이런 사성을 實子가 아닌 功臣의 賜姓으로도 봅니다.
자료 9. < 청화원씨가 한국도래인이라는 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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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서 소화59년에 나온 '神道理論大系'라는 서적에서
"日本神道の正體は「新羅」の土着宗敎だつた" (해당내용의 필자는 '中山法元'이라는 일본인)
'日本神道の正體は「新羅」の土着宗敎だつた'에서
新羅は 源氏以來, 征夷大將軍として實權をにぎつた. 佛敎の百濟王家が天皇となり, 神道の新羅花郞が武家政治を行うため.] 라고 적고 있다.
이것을 연역추론하면
일본에서 武力으로 관동을 제패하고 막부정권을 잡은 淸和源氏는 新羅勢力 이라는 것이며 패권을 차치한 源氏무사단은 고대한국에서 건너간 新羅의 花郞道라는 것, 아울러 新羅花郞이 武家막부를 장악했으므로 막부를 거머쥔 淸和源氏 무사단의 武術은 花郞道와 연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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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10. < 신라선신당>
* 다음은 신라명신을 모신 신라신사에대한 설명입니다.
(일본측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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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선신당(원성사,미쓰이 사)
시가현 오오쯔 시원성사정246
교통 안내
게이한 이시야마 사카모토선 벳쇼 역 서쪽에 5분 ,홍문 천황 능횡
>제신 : 신라명신(五十猛命)
大屋毘古神·五十猛神은 선의 신·수목의 신이다.
또 인도의 신,군신의 두령신이기도 한다.
>유서
홍문 천황능의 북서측에 있는 원성사진수사의 1개입니다 .
원성사 園城寺開祖인 智證大師 엔친(円珍)이 당으로부터 귀국의 때,배에 나타났던 신라의 국신을 모셨다고 말한다.
당내에는 지증 대사가 당으로부터 귀국의 때,수호한 신라(신라)뛰어난 신의 좌상을 안치하고 있습니다.
후에 原賴義가 신라명신에 기원함으로써 原씨와 원성사가 깊은 관계가 가능했다.賴義가 동북의 안배뢰시를 공격할때에 신라명신에 참배하고 전승을 기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아들 義光도 신라명신의 앞에서 종사하고,신라 사부로 의광이라고 칭했다
( 의광의 묘는 이당의 남서의 언덕에 있으며 그의 무덤 신라식 봉분의 형태를 띄고있습니다.--> 개인의견)
신라 사부로 의광은 후에 관동에 내려가고,카이 원씨의 선조로 되고,다케다에게 연결된다.
또한 궁중에 모시지고 있던 원신한신의 원신의 1자가 이 원성사의 이름과 묶이어진다. 라는 설이 있다.통설으로는 원신은 거물 주신으로 되어 있다.
> 모습
> 원성사의 경내 신사이지만 현재는 연결되고 있지 않다. 죠간2(806년 )년에 만들여 졌다고 한다.이곳에 보관된 신라명신 좌상은 국보이다.
자료 11. <조선왕조실록과 원성사 관련기록>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원의(源義)로 시작되는 청화원씨 족보의 인물들이많이 보입니다.
● 성종 140 13/04/09(정미) / 일본 국왕과 이천도왕 하차가 사신을 보내 《대장경》과 재화를 보내주길 요청하다.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영홍 수좌(榮弘首座) 등을 보내어서 내빙(來聘)하고, 이천도왕(夷千島王) 하차(遐叉)가 궁내경(宮內卿) 등을 보내 와서 토산물(土産物)을 바쳤다. 일본국(日本國)의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일본 국왕 원의정(源義政)은 조선 국왕 전하(朝鮮國王殿下)께 삼가 회답을 올립니다. 두 나라가 천 리(里)를 사이에 두고 대대로 인호(?好)를 닦아 온 것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압니다. 사람이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근년(近年)에는 우리 나라가 혼란(混亂)하여서, 온갖 일을 잠시 폐(廢)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오랫동안 음신(音信)이 막혔으니, 그 동안에 적조(積阻)한 죄(罪)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이 앞서 갑오년에 우리 사자(使者)가 귀국(歸國)할 때에, <상국(上國)에서> 상아(象牙)를 쪼개어 만든 부신(符信) 10개를 주시어 왕래(往來)하는 데 신표(信標)로 삼게 하셨으니, 하사품(下賜品)으로 무엇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겠습니까? 금후(今後)로 빙문(聘問)이 있을 때마다 차례로 주어서, 의심(疑心)이 없는 부험(符驗)을 삼겠습니다.
우리 나라 화주(和州)에 교사(敎寺)가 있는데, 원성사(圓城寺)라고 합니다. 중 명선(明禪)이라는 자가 미타불(彌陀佛) 불상을 봉안(奉安)한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옛날 당(唐)나라에 묘지 거사(妙智居士)라는 자가 미타(彌陀)를 염송(念誦)하여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저녁에 꿈을 꾸니, 신인(神人)이 말하기를, ‘참 부처[眞佛]를 배알(拜謁)하고자 하거든 모름지기 일본국의 원성사(圓城寺)에 가거라.’ 하였습니다. 꿈을 깨고 나자, 상서로운 꿈대로 찾아 우리 나라에 와서, 저 절에 이르러 친히 진용(眞容)을 배알하고 처음의 소원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영험(靈驗)을 온 나라가 모두 우러러보던 터였는데, 병술년에 병화(兵火)로 인하여 불각(佛閣)과 승사(僧舍)가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다만 다행하게도 본존(本尊)의 불상 1구(一軀)만이 남아 있으나, 여기에 향화(香火)를 바칠 곳이 없습니다. 절의 일을 주간(主幹)하는 자가 말하기를, ‘진실로 상국(上國)에 도움을 구(求)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금벽(金碧)으로 단장한 옛 절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겠느냐?’고 하기에, 중[釋氏] 영홍 수좌(榮弘首座)를 차정(差定)하여 첫번째의 상아 부신(象牙符信)을 주어서, <상국에> 가서 그 뜻을 말씀드리게 하고, 또 《대장경(大藏經)》을 구하여 절 안에 안치(安置)하여서 일국(一國)의 복(福)을 증식(增殖)하는 땅을 삼고자 하니, 바라건대 법보(法寶)를 나누어 주시어 변방의 백성들에게 이(利)가 되게 하시고, 자재(資財)를 시여(施與)하시어 불법(佛法)의 이(利)를 일으키게 하시면, 상국(上國)의 덕화(德化)가 지극하지 않은 바가 없겠습니다. 변변치 못한 방물(方物)을 별폭(別幅)에 갖추 기록하였으니, 엎드려 채납(采納)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 실록에서 원씨네 집안과 대장경부분만 살펴보았습니다.
자료 12. <원성사의 정치적 배경> - 일본자료
원성사는 일본의 야마부시(山伏:단 수련자)를 통졸하는 기관였읍니다.야마부시(후의忍者)는 전국의 정보를 수집하는 구실을 맡고 있었고 그 당시의 통치자에게는 아주 중요한 조직였읍니다.
(韓國의 丹과 日本의 山伏는 공통점이 많습니다)이들 단수련자들은 마늘만 먹고 산중수련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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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류의 合氣는 청화원씨의 비전이다. 이를 신라삼랑원의광이 大成시켰다"
이 글은 합기도의 과학에도 인용된바 있는 다케다 소카쿠의 전기
'도깨비의 관 15쪽'과 일본 Takahashi에서 간행한 '格鬪技' 중
대동류합기유술편 114쪽을 보시요. 위와같이 나왔있소.
대동류 백제기원설은 일본 청화원씨가 아닌 촌상원씨(무라까미 원씨)
의 후대인 하야시마 마사오가 주장과 관련있으며 일서 道家 合氣術
에 나왔있소. 거기서는 백제 왕인이 서기 3세기경 일본에 평법학을
전했는바 이를 궁중의 원씨들이 연구했고 평법학중 무술은 청화원씨
가 계승했고 촌상 원씨는 도인법을 이엇다고 기록되어있소.
여하튼 여기서도 청화원씨가 대동류의 계승자임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고 또 신라삼랑원의광이 크게 발전시켰다고 나와있소.
이주장을 국내에서 펴는 분은 명지대 사회체육학과의 허일웅 교수임
이오. 그외도 여러 이설이 있으나 대동류가 청화원씨와 연관된점은
분명하오. 그러나 본인은 백제기원설에 동의하지 아니하오.
청화원씨가 신라씨족이라는 연구주장에 대해 여기서는 한가지의 예만
말하오. '新羅三郞源義光'의 형은 '八幡太郞源義家'이오.
원의광이 신라명신 앞에서 원복을 했기에 '신라삼랑'이오
원의가가 팔번신 앞에서 원복을 했기에 '팔번태랑'이오
원복이란 가문의 아이가 크면 씨족 조상신앞에서 치루는 성인식이오.
新羅明神은 현 일본 각현 향토사료에 의하면 '朝鮮(新羅)신이라고
나와있소. 八幡神은 현재일본에 3만개 분포된 신사로 일본 건국신인
천조대신 다음으로 많소. 일본역사에서 이 팔번신은 분명히 청화원씨
의 氏族神으로 명기되어있소. 이 팔번신을 평생연구한 일본 구주대의
中野교수는 이 신격에 대해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신격으로 결론
짓고 있소. 그런데 이 팔번신은 일본 신들의 계보가 처음 정리된 천무
천황시기 즉 7세기에는 등장하지 않소. 즉 8세기 이후에 일본의 중앙에
등장한 신격이오. 이는 일본에서 청화원씨가 8세기이후에 중앙에 등장
하면서 세력이 강화된 추세와 동일하오.
월간조선 98년 1월호부터 한양대 홍윤기교수가 연재한 '일본천황가'의
논문에서 그는 일본 八幡神을 新羅神으로 확고히 규정짓고 있으며 현재
일본의 스모의 유래가 다름아닌 八幡神에 대한 신격의식에서 시작된것
으로도 밝히고 있오.
청화원씨 源뇌의의 아들형제인 源義家와 源義家가 둘다 新羅神格에게
성인신고식을 하고 원복한 이유는 무엇이겟소. 당시는 어느때보다도
가문의 씨족 무사단이 왕성하였고 무장파당이 쟁쟁하였을때요.
청화원씨가 신라씨족이 아니라면 新羅明神과 八幡神이라는
新羅神 앞에서 元服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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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케다 쇼가쿠가 한국식 이름인 원정의(原正義)를 그의 이름 곁에 나란히 붙인 것에 대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저는 일본에서 거주했던 적이 없지만 가까운 분이 일본에서 5년여를 수학하셔서 어느정도 일본풍물에 대해서 익숙한고로 이와 같은 내용을 자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식이름 뒤에 다시 석자의 한문식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물론 원정의 라는 이름이 아호였다면 저의 주장이 우스운 망발이 되겠으나 생전에 그가 그런 아호를 쓰지 않았고 공교롭게도 청화원씨의 "원"자를 그대로 사용하고 또한 "정의" 라는 이름을 붙였으므로 아호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점에는 수긍이 갈 줄로 압니다. 원정의는 원씨가문의 한국식 이름표기입니다
또한 청화원씨가 신라족이냐 라는 반문에는 두가지 시각에서 접근해야 하는데
첫째, 일본에서 고유하게 일어난 씨족이라는 관점이 있고
둘째, 일본이주 씨족이라는 관점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급격히 늘어난 지배세력의 갈등상황에서 생긴 ) 8세기 전후에는 일본 인구의 대부분이 한반도에서 이주한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이같은 사실은 생활습관, 의복 , 문화등등의 부분이 고대 사료와 유적등, 고분발굴 등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아직 8세기까지만해도 일본열도에서는 이렇다할 국가적 움직임이 적었습니다. 이것은 외세적 침략의 빌미가 없이 외딴 열도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시점에서 강력한 무사집단의 출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공료롭게도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유입된 상황과 일치하기 때문에 후자쪽에 더 가능성을 높게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그것을 뒷받침이라도하듯 "신라"라는 명칭의 사용, 다케다 쇼가쿠의 생전증언인 "이것은 본시 조선무술이다"(최용술 선생님의 증언 외에도 역시 다케다 문하에서 수업한 장인목선생의 증언에서 알 수 있슴)라는 전언, 신라의 신사인 원성사에 원의광의 묘가 있는점, 청화원씨의 씨신인 팔번신에 대하여는 일본의 대학교수들도 일본토착신이 아닌 바다를 건너온 외래신이라고 밝힌다. 청화원씨가 숭배한 신앙은 외떨어진 굴에서 오곡을 단식하며 수행하는 수행법이 있는데 이역시 다케다쇼가쿠가 최용술 선생과 같이 수련한 방법이었고 이것은 일견 신라의 화랑도들이 수련한 수련법과 유사하다. 다케다가 생전에 조선무술이라고 언급한 것은 사심없이 보아야 합니다. 외에도 낱낱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많은 자료들이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청화원씨가 일본의 본토씨족이 아니라는 증거들이 더 많습니다.
님께서 오해하시는 내용들은 일본사람들이 주장한 내용들이기 보다는 근래에 한국의 아이키도인들중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말도 않되는 내용을 조합한 것들이 많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일본의 아이기도나 대동류에서는 그같은 주장을 힘주어 말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합기도를 흔들어 버리면 한국의 아이기도는 당연히 위상이 오르기 때문에 그런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예전에 최용술 선생님이 살아계신 시절에 일본의 아이기도가 어떤 입장을 취해왔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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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현 : 미나모토에대해 궁금합니다 ┼
┼ 한문을 설명할때 일본식으로 다케다 소가꾸로 하다가 아래는 한국식으로 원정의라고 하였는데 원씨 성은 미나모토가 아닌가요? 그렇게들 읽는 것 같던데. 그럼 일본 고대에 막부시대를 열었던 미나모토가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얘기인가요? ┼
------ 참고하세요 ----------
미나모토 가문은 한자로 源氏가문입니다.
다케다소카쿠의 가문은 한자로 武田가문입니다.
미나모토가문은 여럿입니다.
그리고 다케다가문은 미나모토가문입니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金씨를 예로 듭시다.
우리나라 金씨 성은 하나이지만 김해 김, 경주김,.. 등등 본에 따라서
여러가지 김씨로 나누지요. 이와 마찬가지이지요.
미나모토 가문은 세이와(淸和)미나모토 무라까미(村上)미나모토.. 등등 많습니다.
그리고
이 미나모토가 즉 원씨에서 다른 성으로도 뻗어 나갑니다.
사이고라는 西鄕가문과 武田가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내용과 역사의 줄기는 일본의 무감이라는 무사의 계보도에 보면
일본막부의 각가문들의 역사가 세밀히 기록되어있습니다.
물론 그 도표의 기점은 일본 초대막부의 주인공인
세이와 미나모토가에 의해 시작되고 있고
대동류합기유술의 시조인 新羅三郞源義光도 초기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신라삼랑원의광은 세이와 미나모토가문인 '源賴義' 아들 입니다
그리고 신라삼랑원의광은 武田家의 시조이기도합니다.
즉 원의광은 원씨-미나모토가문이면서도 무전가-다케다가문의 시조입니다.
그러므로 다케다가문은 다케다가문이면서도 원씨가문인것입니다.
일본역사에서는 다케다가문을 다른 말로 -- 갑비(甲斐)지역에 사는 원씨라고해서
갑비원씨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무전총각(다케다쇼가쿠)생이 무전총각원정의 라고 표기한것은
다케다가의 자신이 본래 미나모토의 후손이라는
무전가가 미나모토가에서 나왔다는 역사와 유래를 잘드러낸 것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 이상의 내용은 이미 대동류역사에 관해 관심있는 분들 한테는
상식입니다.
그리고 하나 재미(?)있는 것은
무전가문이 갑비지역(지금의 야마나시현 후지산쪽) 들어가 형성된것은
신라삼랑원의광의 사후이며 그시기는 12세기말엽인데..
거기에는 이미 서기 820년대경에 세운 미나모토의 청화원씨가 세운
씨사(씨신을 모시는 우지데라) 가 무전팔번(八幡)신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당시에는 다케다가문이 역사적으로 없는 시기입니다.
앞서말한대로 1200년대가 되어야 가문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다케다가문이 갑비지역에서 가문을 형성하기 약 400년전에
다케다가문의 조상인 청화원씨의 신사가 이미 진출해있엇다는 것은
청화원씨가 그만큼 갑비(야마나시인근)지역에 관심과 눈독을 들인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그당시 미나모토의 신사가 처음 진출한 시기는
미나모토가문이 처음 등장한 차아천황(嵯峨天皇) 때입니다.
즉 미나모토가문이 등장하면서 후지산 북부 산악지역인 갑비에 팔번신의 첫깃발을 꼽은것은
미나모토가문의 특성의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즉 그 미나모토 가문은 고유의 종교적인 신앙과 수행을 존귀하게 여겼고
그로써 세력의 영역을 표시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후 11세기를 전후로해
신라삼랑원의광과 형인 원의가와... 그 형제들의 아버지인 원뇌의가....
관동지역에서 전쟁을 치루고 세운 무사가문의 우지데라(氏寺)로 카마쿠라에 세운 신사 또한
그 유명한 쓰루오카하치만구 입니다.
이에대해 간단한 설명은 이렇습니다.
<가마쿠라...>
1192년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賴朝 원뢰조)가 카마쿠라막부(鎌倉幕府)를 개설한 이래,
약140년간 일본 무가 정치의 중심이 되었던 역사적인 도시. 미나모토씨(源氏-겐지)의 수호신을
제사지내는 쓰루오카하치만구(鶴岡八幡宮)을 비롯하여, 신사, 사찰등의 유적지가 본존되어 있다.
일본역사에서
원씨들은 -- 미나모토 들은 무사계급으로 분류됩니다.
또 그들은 일관된 가문의 神을 모십니다.
또 그 신은 불교신도 아니고 ... 일본에서 신들의 교통정리(신계보도)가 되는 7세기무렵만해도
나타나지 않던 신들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서 천조대신과 맞먹는 전국적인 분포를 이룹니다.
(브리태니커에는 일본등록신사의 약 50%가 하치만신에게 바쳐진것으로 쓰고있습니다)
를 이룹니다.- 이는 이미 원씨의 신이 아니라 무사일반의 보편성을 지닌 신으로 발전한것이지요.
^^; 하다못해 야쿠자의 영화를 보면 뒤에 팔번대보살..이라고 쓴것을 보게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야쿠자들도 그들이 폼을 잡으면서 무사의 신을 세우고픈것이겟지요.
한편, 팔번신(하치만신)이 팔번대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교식 호칭입니다.
불교에서 보살이란 호칭은 높은존칭이며 팔번신은 최초로 신도계에서 보살호칭을 얻은
최초의 신격인데 그 이유는 동대사의 대불을 축조할때에 팔번신이 수호햇기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그들은 별나게 무력과 전투에 능한 가문입니다.
세이와(청화) 원씨는 전 가문이 전투에 능했으며 출현한지 약 300여년만에
일본의 무사계급의 실권을 장악합니다.
누대에 걸쳐서 무력이 출중하게 전승될수 있는 배후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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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와라가 나온 일본의 지방에 가니 한국풍습이 많더라 등은,그 곳 외
에도 한국과 유사한 풍습을 가진 지방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고 넘어
갈 문제입니다.(추천서적:동아일보사 출판,일본열도에 흐르는 한국혼)
그리고,그 야와라(대동류 합기유술)는 일본의 九洲지방을 발상지로
봐야할지,北國-雪國지방을 발상지로 봐야할지 자신있게 답할 사람은
제가 보기에 없습니다.일본에서조차 武田계열은 雪國(홋카이도오)에
종가가 있고,西鄕계열은 九洲쪽입니다.서로 자기쪽이 진짜고 상대가
배워나간 것이라 주장하므로 진위가 불분명합니다.어디를 보고 와서
닮았다고 한 말인지 밝혀져 있지 않아서 의문이 갑니다.
============== 관련자료 ========================
출처 : 이 자료는 제가 만든것입니다.
자료.1 <신라삼랑원의광>은?
일본 청화원(淸華源, 미나모토家)씨 계보에 따른 신라삼랑원의광(新羅三郞源義光)'이란 인물이 나옵니다.
'현해탄의 가교(소서추웅)'의 기록에 따르면 스스로 신라의 후손이라고 하고 다녔다고 하며 일본의 일반적인 기록에는 어린시절 원성사내 신라신사에 원복하여 신라삼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일본속의 조선문화 7권(22권중) : 117p
* 신라삼랑원의광(1045 ~1127)
義光은 新羅三郞, 館의 三郞等이라 불렸다. 新羅明神의 神前에서 元服하였기 때문에 新羅三郞이라 이름붙혀졌다고 하며 弓馬術에 능했고 음률에 능해 笙의 달인이였다고 한다. (일본측 사료)
'훈'이라는(현재의 생황)이라는 악기의 명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또 뛰어난 무인으로서 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었고 무전(武田)씨의 시조입니다.
자료.2 <신라명신> - 일본자료
* 日本文化院에 소장된 '大津市 新羅明神',
『平安時代の後期, 源賴義の子義光(1045-1127)は, 園城寺山內
新羅明神前で元服をし, 新羅三郞と名乘った.
新羅明神は 新羅(朝鮮)の 國神.』
자료.3 <청화원씨의 조상신>
하치만신은 미나모토가의 조상신이라고 받아 드려지고 있습니다. 청화원씨의 씨신인 하치만신(八幡神)은 일본내에서의 지방신에서 중앙신으로 성장하면서 신격이 변질되었다고 합니다.
일본 九州大學의 田村교수는 팔번신이 어느단계에서 일본 응신왕 신앙과 결합돼었다고 밝혔다. 팔번신은 본래 일본토착신이 아니며 바다를 건너온 외래신이다. 또한 팔번신의 신격은 三神으로 숭배된다. 아울러 다무라엔초교수는 '古代日本과 日本佛敎.1985'에서 일본 팔번신의 오래된 고대기록인 '宇佐託宣集'을 인용하면서 아래와 같은 내용을 밝혔다.
"하치만신(팔번신)의 출현을 이끈것은 오가히기(大神比義)라는
수행자였다. 오가히기는 산의 동굴에 살면서 오곡을 단식하면서
神仙이 되기를 수행했다. 宇佐의 땅에는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사람들이 정주해 살면서 그들의 토착신앙을 숭배했다. 宇佐 하치만신은 고대 한국의 신이다." 라고언급.
八幡神은 현재일본에 3만개 분포된 신사로 일본 건국신인 천조대신 다음으로 많고 일본역사에서 이 팔번신은 분명히 청화원씨
의 氏族神으로 명기되어있소. 이 팔번신을 평생연구한 일본 구주대의 中野교수는 이 신격에 대해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신격으로 결론짓고 있음. 그런데 이 팔번신은 일본 신들의 계보가 처음 정리된 천무 천황시기 즉 7세기에는 등장하지 않음 즉 8세기 이후에 일본의 중앙에 등장한 신격이고 이는 일본에서 청화원씨가 8세기이후에 중앙에 등장 하면서 세력이 강화된 추세와 동일함
월간조선 98년 1월호부터 한양대 홍윤기교수가 연재한 '일본천황가'의 논문에서 그는 일본 八幡神을 新羅神으로 확고히 규정짓고 있으며 현재 일본의 스모의 유래가 다름아닌 八幡神에 대한 신격의식에서 시작된것으로도 밝히고 있음
자료.4 <무전(武田)가의 이동경로>
'사가현'----'산리(야마나시)'-- 아이즈번--------- 북해도
<12세기> <16세기초까지> <16세기 초부터>
자료.5 <청화원씨의 시조> - 일본기록
54대 세이화 천황--청화천황(淸和天皇)
그 청화천황의 6번째 아들인 Teiljun(貞純親王)으로 부터 청화원씨가 시작됨
자료.6 <일본의 貞純親王 관련내용 왜곡>
일본 '旺文社'에서 펴낸 '일본의 역사' 라는 자료에는
Teiljun(貞純親王)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淸和天皇
ㅣ
( ) (?)
源經基
源滿仲
源賴信
源賴義
源義光 源義家
*(어느일본인의 답변)淸和源氏의 기원에 대해서는 12세기의 역사서「大鏡」란것에 기록도 있고 族譜도 잇습니다. 원래는 淸和天皇의 손자 經基王인데 新羅人이 아니예요.
자료 7. <원씨와 백제와의 관계>
道家 合氣術(하야시마 마사오)백제 왕인이 서기 3세기경 일본에 평법학을 전했는바 이를 궁중의 源씨들이 연구했고 평법학중 무술은 청화원씨가 계승했고 촌상 원씨는 도인법을 이엇다고 기록되어있고 국내에서 출간된 한일고대사서적(제목이 생각안나네요)에도 백제도래인이라고 소개되어있음
자료 8. < 원씨사성은 자식에게만 주었는가>
아울러 미나모토가인 源씨의 사성은 청화원씨가 처음이 아니고
52대 천황인 嵯峨때인 서기 814년에 최초로 50명의 源씨를 사성합니다. 일본고대사 연구가들의 일부에서는 이런 사성을 實子가 아닌 功臣의 賜姓으로도 봅니다.
자료 9. < 청화원씨가 한국도래인이라는 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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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서 소화59년에 나온 '神道理論大系'라는 서적에서
"日本神道の正體は「新羅」の土着宗敎だつた" (해당내용의 필자는 '中山法元'이라는 일본인)
'日本神道の正體は「新羅」の土着宗敎だつた'에서
新羅は 源氏以來, 征夷大將軍として實權をにぎつた. 佛敎の百濟王家が天皇となり, 神道の新羅花郞が武家政治を行うため.] 라고 적고 있다.
이것을 연역추론하면
일본에서 武力으로 관동을 제패하고 막부정권을 잡은 淸和源氏는 新羅勢力 이라는 것이며 패권을 차치한 源氏무사단은 고대한국에서 건너간 新羅의 花郞道라는 것, 아울러 新羅花郞이 武家막부를 장악했으므로 막부를 거머쥔 淸和源氏 무사단의 武術은 花郞道와 연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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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10. < 신라선신당>
* 다음은 신라명신을 모신 신라신사에대한 설명입니다.
(일본측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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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선신당(원성사,미쓰이 사)
시가현 오오쯔 시원성사정246
교통 안내
게이한 이시야마 사카모토선 벳쇼 역 서쪽에 5분 ,홍문 천황 능횡
>제신 : 신라명신(五十猛命)
大屋毘古神·五十猛神은 선의 신·수목의 신이다.
또 인도의 신,군신의 두령신이기도 한다.
>유서
홍문 천황능의 북서측에 있는 원성사진수사의 1개입니다 .
원성사 園城寺開祖인 智證大師 엔친(円珍)이 당으로부터 귀국의 때,배에 나타났던 신라의 국신을 모셨다고 말한다.
당내에는 지증 대사가 당으로부터 귀국의 때,수호한 신라(신라)뛰어난 신의 좌상을 안치하고 있습니다.
후에 原賴義가 신라명신에 기원함으로써 原씨와 원성사가 깊은 관계가 가능했다.賴義가 동북의 안배뢰시를 공격할때에 신라명신에 참배하고 전승을 기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아들 義光도 신라명신의 앞에서 종사하고,신라 사부로 의광이라고 칭했다
( 의광의 묘는 이당의 남서의 언덕에 있으며 그의 무덤 신라식 봉분의 형태를 띄고있습니다.--> 개인의견)
신라 사부로 의광은 후에 관동에 내려가고,카이 원씨의 선조로 되고,다케다에게 연결된다.
또한 궁중에 모시지고 있던 원신한신의 원신의 1자가 이 원성사의 이름과 묶이어진다. 라는 설이 있다.통설으로는 원신은 거물 주신으로 되어 있다.
> 모습
> 원성사의 경내 신사이지만 현재는 연결되고 있지 않다. 죠간2(806년 )년에 만들여 졌다고 한다.이곳에 보관된 신라명신 좌상은 국보이다.
자료 11. <조선왕조실록과 원성사 관련기록>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원의(源義)로 시작되는 청화원씨 족보의 인물들이많이 보입니다.
● 성종 140 13/04/09(정미) / 일본 국왕과 이천도왕 하차가 사신을 보내 《대장경》과 재화를 보내주길 요청하다.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영홍 수좌(榮弘首座) 등을 보내어서 내빙(來聘)하고, 이천도왕(夷千島王) 하차(遐叉)가 궁내경(宮內卿) 등을 보내 와서 토산물(土産物)을 바쳤다. 일본국(日本國)의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일본 국왕 원의정(源義政)은 조선 국왕 전하(朝鮮國王殿下)께 삼가 회답을 올립니다. 두 나라가 천 리(里)를 사이에 두고 대대로 인호(?好)를 닦아 온 것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압니다. 사람이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근년(近年)에는 우리 나라가 혼란(混亂)하여서, 온갖 일을 잠시 폐(廢)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오랫동안 음신(音信)이 막혔으니, 그 동안에 적조(積阻)한 죄(罪)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이 앞서 갑오년에 우리 사자(使者)가 귀국(歸國)할 때에, <상국(上國)에서> 상아(象牙)를 쪼개어 만든 부신(符信) 10개를 주시어 왕래(往來)하는 데 신표(信標)로 삼게 하셨으니, 하사품(下賜品)으로 무엇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겠습니까? 금후(今後)로 빙문(聘問)이 있을 때마다 차례로 주어서, 의심(疑心)이 없는 부험(符驗)을 삼겠습니다.
우리 나라 화주(和州)에 교사(敎寺)가 있는데, 원성사(圓城寺)라고 합니다. 중 명선(明禪)이라는 자가 미타불(彌陀佛) 불상을 봉안(奉安)한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옛날 당(唐)나라에 묘지 거사(妙智居士)라는 자가 미타(彌陀)를 염송(念誦)하여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저녁에 꿈을 꾸니, 신인(神人)이 말하기를, ‘참 부처[眞佛]를 배알(拜謁)하고자 하거든 모름지기 일본국의 원성사(圓城寺)에 가거라.’ 하였습니다. 꿈을 깨고 나자, 상서로운 꿈대로 찾아 우리 나라에 와서, 저 절에 이르러 친히 진용(眞容)을 배알하고 처음의 소원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영험(靈驗)을 온 나라가 모두 우러러보던 터였는데, 병술년에 병화(兵火)로 인하여 불각(佛閣)과 승사(僧舍)가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다만 다행하게도 본존(本尊)의 불상 1구(一軀)만이 남아 있으나, 여기에 향화(香火)를 바칠 곳이 없습니다. 절의 일을 주간(主幹)하는 자가 말하기를, ‘진실로 상국(上國)에 도움을 구(求)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금벽(金碧)으로 단장한 옛 절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겠느냐?’고 하기에, 중[釋氏] 영홍 수좌(榮弘首座)를 차정(差定)하여 첫번째의 상아 부신(象牙符信)을 주어서, <상국에> 가서 그 뜻을 말씀드리게 하고, 또 《대장경(大藏經)》을 구하여 절 안에 안치(安置)하여서 일국(一國)의 복(福)을 증식(增殖)하는 땅을 삼고자 하니, 바라건대 법보(法寶)를 나누어 주시어 변방의 백성들에게 이(利)가 되게 하시고, 자재(資財)를 시여(施與)하시어 불법(佛法)의 이(利)를 일으키게 하시면, 상국(上國)의 덕화(德化)가 지극하지 않은 바가 없겠습니다. 변변치 못한 방물(方物)을 별폭(別幅)에 갖추 기록하였으니, 엎드려 채납(采納)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 실록에서 원씨네 집안과 대장경부분만 살펴보았습니다.
자료 12. <원성사의 정치적 배경> - 일본자료
원성사는 일본의 야마부시(山伏:단 수련자)를 통졸하는 기관였읍니다.야마부시(후의忍者)는 전국의 정보를 수집하는 구실을 맡고 있었고 그 당시의 통치자에게는 아주 중요한 조직였읍니다.
(韓國의 丹과 日本의 山伏는 공통점이 많습니다)이들 단수련자들은 마늘만 먹고 산중수련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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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류의 合氣는 청화원씨의 비전이다. 이를 신라삼랑원의광이 大成시켰다"
이 글은 합기도의 과학에도 인용된바 있는 다케다 소카쿠의 전기
'도깨비의 관 15쪽'과 일본 Takahashi에서 간행한 '格鬪技' 중
대동류합기유술편 114쪽을 보시요. 위와같이 나왔있소.
대동류 백제기원설은 일본 청화원씨가 아닌 촌상원씨(무라까미 원씨)
의 후대인 하야시마 마사오가 주장과 관련있으며 일서 道家 合氣術
에 나왔있소. 거기서는 백제 왕인이 서기 3세기경 일본에 평법학을
전했는바 이를 궁중의 원씨들이 연구했고 평법학중 무술은 청화원씨
가 계승했고 촌상 원씨는 도인법을 이엇다고 기록되어있소.
여하튼 여기서도 청화원씨가 대동류의 계승자임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고 또 신라삼랑원의광이 크게 발전시켰다고 나와있소.
이주장을 국내에서 펴는 분은 명지대 사회체육학과의 허일웅 교수임
이오. 그외도 여러 이설이 있으나 대동류가 청화원씨와 연관된점은
분명하오. 그러나 본인은 백제기원설에 동의하지 아니하오.
청화원씨가 신라씨족이라는 연구주장에 대해 여기서는 한가지의 예만
말하오. '新羅三郞源義光'의 형은 '八幡太郞源義家'이오.
원의광이 신라명신 앞에서 원복을 했기에 '신라삼랑'이오
원의가가 팔번신 앞에서 원복을 했기에 '팔번태랑'이오
원복이란 가문의 아이가 크면 씨족 조상신앞에서 치루는 성인식이오.
新羅明神은 현 일본 각현 향토사료에 의하면 '朝鮮(新羅)신이라고
나와있소. 八幡神은 현재일본에 3만개 분포된 신사로 일본 건국신인
천조대신 다음으로 많소. 일본역사에서 이 팔번신은 분명히 청화원씨
의 氏族神으로 명기되어있소. 이 팔번신을 평생연구한 일본 구주대의
中野교수는 이 신격에 대해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신격으로 결론
짓고 있소. 그런데 이 팔번신은 일본 신들의 계보가 처음 정리된 천무
천황시기 즉 7세기에는 등장하지 않소. 즉 8세기 이후에 일본의 중앙에
등장한 신격이오. 이는 일본에서 청화원씨가 8세기이후에 중앙에 등장
하면서 세력이 강화된 추세와 동일하오.
월간조선 98년 1월호부터 한양대 홍윤기교수가 연재한 '일본천황가'의
논문에서 그는 일본 八幡神을 新羅神으로 확고히 규정짓고 있으며 현재
일본의 스모의 유래가 다름아닌 八幡神에 대한 신격의식에서 시작된것
으로도 밝히고 있오.
청화원씨 源뇌의의 아들형제인 源義家와 源義家가 둘다 新羅神格에게
성인신고식을 하고 원복한 이유는 무엇이겟소. 당시는 어느때보다도
가문의 씨족 무사단이 왕성하였고 무장파당이 쟁쟁하였을때요.
청화원씨가 신라씨족이 아니라면 新羅明神과 八幡神이라는
新羅神 앞에서 元服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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