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條氏政[북조씨정]
호조 우지마사(1538~1590)
호조가 4대 당주. 우지야스의 적자.
從四位下, 左京大夫. 통칭 新九郞, 截流齋.
우지야스의 장남인 新九郞이 요절했기 때문에
1559년 상속자를 계승하였다.
실권은 아버지 우지야스가 여전히 잡고 있었다.
1564년 제2차 고노다이 전투,
1567년 미후네산 전투등으로 동쪽으로 진출하였다.
신겐의 공격을 받아 도망쳐 온 이마가와 우지자네와
부인인 여동생을 보호하고 다케다가와 싸우게 되어
우에스기가와 동맹을 맺는다.
하지만 우에스기가의 무리한 요구에 화가 치민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다시 다케다가와 동맹을 맺어
1572년 신겐의 상경시에 원군을 보내기도 하였다.
호조가는 우지야스의 대에 관동에서
이미 확고한 기반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우지마사의 대에는 1574년 關宿城(세키야도성)을 공격해
1577년에는 조부 이래의 숙적인 사토미가와 화목을 체결하였다.
1578년 종종 관동으로 출진하여
호조가의 영토를 위협하던 겐신이 사망하였다.
갑작스런 죽음으로 겐신의 누이의 아들인 景勝(가게카쓰)와
우지마사의 동생으로 가게카쓰와 같은 양자인
景虎(가게토라)간의 후계자 싸움인 御館(미다테)의난이 일어났다.
우지마사는 친 아우 가게토라를 돕는 입장으로
우지테루, 우지쿠니에게 군사를 파견하게 하고,
동시에 다케다 가츠요리에게도 원군을 요청하였다.
당초 가츠요리는 가게토라를 지원하여 스스로 출전하지만
그 틈을 타 도쿠가와가로 부터 영토를 공격받은 상태였다.
스루가를 잃어버리면 귀중한 소금의 산지를 놓치고 만다.
또한, 가츠요리는 호조의 혈통을 받은 가게토라가
우에스기가를 이으면 상대적으로 다케다의 지위가 저하해
에치고와 관동의 호조가에 끼워지는 형국이 되는것을 우려하였다.
거기에 군자금 부족에 허덕이는 가츠요리에게
가게카쓰가 황금의 제공을 약속하였다.
결국, 가츠요리는 가게카쓰의 사자를 은밀하게 만나
고즈케국의 대부분을 받는 조건으로 철수하였다.
그 결과 미다테의 난은 가게카쓰의 승리로 끝나고
가게토라는 어린 아들들과 자결하였다.
이것이 우지마사의 분노를 사
제2차 호조, 다케다 동맹은 파기되었다.
1580년 重須(오모스)에서 전투가 일어났지만
서로 승부를 보지는 않았다.
호조가와의 동맹을 잃은 다케다가는 멸망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이 해, 우지마사는 적자 氏直(우지나오)에게 상속자를 양보하였지만
역대의 당주가 그랬던 것처럼 실권은 아직 우지마사가 쥐고 있었다.
이런 중에 石山 本願寺(이시야마 혼간지)를 항복시킨 노부나가는
우지마사와 동맹을 맺고 1582년 마침내 다케다 정벌에 나서게 된다.
호조군은 슨푸, 사가미와
카이, 사가미의 국경 주변에 진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동맹자이지만 전후 관동 지배를 꾀하는 노부나가는
호조가에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호조군은 효과적인 진군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오다가에 불신감을 갖게 되어 후에
神流川(간나강) 전투가 일어난다.
木曾義昌, 穴山梅雪등의 잇따르는 배반으로 다케다 가츠요리는
이미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과 싸울 전력이 아니었다.
1582년 天目山(텐모쿠산) 전투에서
우지마사의 여동생인 아내와 자결하여
카이의 명문 다케다가는 멸망하였다.
다케다가 멸망 후, 노부나가는 적자 노부타다에게
카이, 시나노를 주고 스루가는 도쿠가와가의 영지로 주었다.
그리고 다키가와 가즈마스를
고즈케국 廐橋城(우야마바시성)에 파견하고 관동 관령으로 하여
고즈케 서부와 시나노 일부를 직할지로 하여
관동 전역의 통치를 꾀하였다.
노부나가와 동맹 관계의 호조의 영지는 간섭하지 않고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그 3개월 후에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아케치 미츠히데의 습격으로 죽고만다.
노부나가의 죽음을 안 우지마사는 우지나오와 함게
고즈케 탈취를 도모하여 5만이라 칭하는 대군을
우지나오가 지휘하여 간나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다키가와 가즈마스를 고즈케국에서 추방하였다.
이후, 호조군은 시나노로 출진하여
사나다, 오바타씨등을 수중에 거두고
小諸(고모로)등에 주둔하여 시나노의 과반을 점령하였다.
한편, 카이로 침공한 이에야스는 사나다가에 계략을 걸거나
오가사와라 영지등에 간섭을 하여 호조 원정군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 양자의 대립은 적극적인 전투에는 이르지 않고
우지나오가 이에야스의 딸 督姬와 결혼하는 걸로 화해가 이루어졌다.
영토 문제는 카이, 시나노는 도쿠가와 영지로 하고
고즈케는 호조의 영지로 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호조의 우세였던 시나노 전선을 감안하면
조금은 불리한 강화조건이었다.
그러나, 사나다가가 후에 우에스기가로 배반하고
上田(우에다), 沼田(누마타)에서 항전을 하게 되어
도쿠가와가의 시나노 전역 지배, 호조가의 고즈케 전역 지배는
실현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면 위험의 분산이라는
고도의 정치적인 판단의 가능성도 있다.
거기에 노부나가 사후의 천하인 후보로서 이에야스를 상정하고
거기에 동북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다테 마사무네와 새로운 삼국동맹을 모색하였다.
이렇게 하여 호조가는 240만석에 이르는
대 영지를 구가하는 가문이 되었다.
영토는 사가미, 이즈, 무사시, 시모우사, 가즈사, 고즈케에 이르는
최대세력을 쌓아 올렸다.
우지마사의 당주로서의 기량과
동생들을 시작으로 하는 유능한 가신단의 결속의 결과였다.
그러나,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고 노부나가의 통일사업을 계승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와의 대립에 직면하게 된다.
히데요시는 1588년 우지마사, 우지나오 부자에게
聚樂第(쥬라쿠다이) 행차에 참가를 명했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이것을 기회로 교토에서는 호조 토벌의 풍문이 돌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주선으로
우지마사의 동생 호조 우지노리가 상경하여
호조와 토요토미간의 관계는 일시적으로 안정된다.
거기에 가신 板部岡江雪齋가 상경하여
沼田(누마타)의 영지 문제 해결을 요청했기 때문에,
1589년 2월에 히데요시는 누마타의 재정을 실행해
누마타령의 2/3를 호조측에 환부하고
그에 따라 우지마사가 상경하라는 문서를 받았지만
1589년 10월 우지쿠니의 가신
猪오邦憲(이노마타 쿠니노리)가 직접적으로
名胡桃城을 탈취하는 사건이 일어나
마침내 히데요시는 호조 정벌에 움직였다.
이것은 실로 이노마타의 독단으로
완전하게 우지쿠니의 감독 소홀이 부른 결과였다.
이것은 온건파인 우지노리와 중간파인 우지나오,
주전파인 우지마사, 우지테루, 우지쿠니의 대립이
표면화 된 것이었다.
이것은 우지마사의 실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우지나오가 가신단을 통합시키지 못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이것은 후에 大道寺政繁, 松田憲秀등의 배반으로 이어졌다.
호조 우지마사는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에 대해서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오다와라 평정의 결과로서 채용된 농성책은
과거에 겐신이나 신겐의 공격도 막아냈던 자신과
고대로 부터 관동을 지배해 온
가마쿠라 호조의 유파를 이어받은 명문을 칭하고 있어
농민 출신으로 출세한 히데요시를 업신여기고 있었다.
호조군은 각방면에서 침공해 오는 토요토미군에 맞아 싸웠지만,
호조가의 지성들은 차례차례로 낙성되고
1590년 4월부터 3개월여간에 이르는
오다와라성에서의 농성 끝에 항복하였다.
이 토벌의 책임자로서 우지마사는 우지테루와 함께 자결하여
여기서 영주로서의 오다와라 호조가는 멸망하였다.
히데요시의 군은 양 뿐만 아니라
질에서도 겐신, 신겐이나 호조를 크게 웃돌고 있었다.
병농분리에 의해서 히데요시의 군대는
충분한 훈련을 받고 있는 전문 부대였다.
겐신이나 신겐과 달리 몇개월을 농성하던 간에
오다와라성을 둘러싸고 있는 히데요시의 군에
충분한 식량이 매일 보내져 오는 것이다.
그 사이에 양과 질에서 모두 떨어지는 호조의 지성은
차례로 낙성하여 오다와라성이 거의 고립된 상황에 빠져서는
이길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의 전국은 호조에 의해 시작되어
호조에 의해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우지마사는 우지노리와 함께 이에야스나 마사무네와의 동맹을 통해
기사회생을 모색하고 있었지만
우지나오가 우지테루, 우지쿠니의 주전파에 농락되어
장기간의 농성으로 견고한 가신단의 결속이 허물어져
이에야스, 마사무네도 단념하여 동맹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우지야스가 임종직전에 가문을 부탁한
호조 겐안과 호조 쓰나시게가 이미 사망한 것이 안타까운 일이었다.
우지마사는 가문을 멸망시킨 무장으로서
가츠요리와 함께 일반적으로 평가가 낮다.
그러나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등과 충분히 서로 싸우면서,
영토를 호조가 최대로 만든 재능은
다른 영주들에게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우지마사는 천하 통일의 야망은 없고,
어디까지나 관동과 그 주변을 지배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다테 마사무네등과의 동맹관계로
대 영주의 지위를 영속 시키는 일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호조 소운 이래의 전통으로
역대 당주들은 모두 단 한번도 상경의 의욕을 보이지 않고,
무로마치 장군을 비호할 생각도 없었다.
이것에는 코가 공사 아시카가 요시우지가
일족이라고 하는 것도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우지마사가 독립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우지야스가 사망한 1571년 부터였다.
일본 역사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난세를 주름잡던 명장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모리 모토나리, 시마즈 다카히사, 호조 우지야스, 다케다 신겐등으로
이런 상황속에서 우지마사는 실질적인 관동의 통치자가 되었지만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통일의 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해 가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그 반을 넘어섰고
히데요시가 후계자가 되어 완성시킨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통일 사업에 계승에 머무르지 않고
근세적인 사회로의 완성을 목표로 하였다.
그것을 실천한 것이
刀狩(도수-백성들에게 무기를 몰수하여 병농분리를 단행)와
태합검지였다.
기이하게도 전국 영주 호조가의 재주인 내정의 개혁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치 체제에서 결실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