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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역사

[[인물]]德川家康[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너구리영감//

작성자dokidoku|작성시간06.06.01|조회수802 목록 댓글 1

 

德川家康[덕천가강]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

 

에도 막부 초대 장군. 통칭 次郞三郞, 大御所, 狸, 東照大權現.

별칭 竹千代, 元信, 元康.
전국시대 미카와 소영주로 태어나 인질로서 인종의 나날을 보내다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동지로서 세력을 확장하고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횡사하자

그 혼란을 틈타 海道(카이도)를 완전 장악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와의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를 거쳐

토요토미가 오대로의 필두가 되지만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정이대장군에 올라 에도 막부를 열었다.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10만의 히데요시군을 상대로

호각으로 싸우거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뒷 공작을 벌이는등

모략에서도 뛰어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들을 통해 이에야스를 狸爺(너구리 영감)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은 그가 모략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히데요시의 사후이며,
그전에는 책모를 보이지 않고, 요시모토, 노부나가, 히데요시에게
바보같이 정직할 만큼 의리가 두터운 자로

연기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도 막부를 열어 에도시대는 264년 간이나 지속되어

전란이 없는 태평의 세상을 가져왔다.
이에야스는 그 시조로 지금도 日光東照宮을 시작으로
전국에 東照大權現(도오쇼 다이곤겐)으로 모셔져 있다.

 

이에야스는 미카와의 마츠다이라가 8대인

松平廣忠(마츠다이라 히로타다)의 아들로
1542년 岡崎城(오카자키성)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竹千代(다케치요)였다.
2세 때, 외할아버지인 水野忠政(미즈노 타다마사)가 죽고,
적자 水野信元(미즈노 노부모토)가 오다가로 돌아서면서
이마가와가의 비호를 받고 있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헤어지게 되어 이에야스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생이별 하게 되었다.
5세 때, 아버지 히로타다가

오와리의 織田信秀(오다 노부히데)에 대항하기 위해
스루가의 今川義元(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 귀속하여
다케치요를 인질로 스루가의 駿府(슨푸)로 보내지만
그 도중에 田原(타하라) 성주 戶田康光(토다 야스미츠)가
다케치요를 오다가로 데리고 가버렸다.
오와리에서 2년을 보내게 되고 여기서 노부나가와 만나게 된다.
그 사이에 아버지는 가신에게 살해당해

오카자키는 요시모토가 파견한 대리인에 의해 지배된다.
다케치요는 이마가와군이 붙잡은

노부히데의 서장자 織田信廣(오다 노부히로)와의
인질교환에 의해서 슨푸성으로 돌아온다.
슨푸성에서 원복하여 요시모토의 [元]자를 따서

次郞三郞元信(모토노부)로 칭하고
요시모토의 질녀인 關口親永(세키구치 지카나가)의 딸인
築山殿(츠키야마도노)와 혼인하지만

오카자키로 돌아가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름은 다시 조부 松平淸康(마츠다이라 기요야스)의 이름을 따

藏人佐元康(모토야스)라 칭했다.
인종의 시절의 슨푸 시대였지만,

당시 슨푸는 매우 선진적인 문화 도시로
여기서 도시형의 교양을 몸에 익힌것이

후에 전국 제패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슨푸에는 할머니 源應尼가 거주하고 있어

실제로는 이곳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더욱이 요시모토도 자신의 질녀를 이에야스에게 시집가게 하는등
그에 대해 심하게 대한 것은 아니고

새로운 친족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후에 이에야스가 은거지를 슨푸로 정한 것을 봐도
유년기가 세간 말하는 나쁜 생활이 아니었던것 같다.
다만 이애야스는 1581년 다케다가의

高天神城(다카텐진성)을 낙성 시켰을때
포로를 모두 살려 주었지만, 인질 시대에 이에야스를

심하게 다룬 孕石元泰에 대해서만은 자결을 명령하였다.
원래, 이에야스는 원한을 갚거나 하는 않는 성질로

흔하지 않는 처분이었다.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전사하자
전선인 大高城(오타카성)에 있던 모토야스는 이마가와군이 버리고 간
오카자키성으로 들어가 이마가와가로 부터 독립하였다.
1562년 요시모토의 뒤를 이은 우지자네와 단교하고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어
다음 해 [元]자를 버리고 家康(이에야스)라고 칭하였다.
그 다음 이마가와가와 싸워 미카와 동부로 진출해

1566년 미카와를 통일하였다.
이해, 조정으로 부터 從五位下 三河守로 임명되어
松平씨를 淸和源氏 新田氏支流의 德川씨로 개명하였다.
1568년 今川氏眞(이마가와 우지자네)를 추방한

武田信玄(다케다 신겐)과 손잡고 이마가와령인 도토미의

대부분을 취하고 掛川城(가케가와성)에서 우지자네를 몰아냈다.
1570년 거성을 오카자키로 부터

도토미의 曳馬(히쿠마)로 이동하여 浜松城(하마마츠성)을 쌓았다.

노부나가가 松永久秀(마쓰나가 히사히데)등에 의해서 암살된

무로마치 막부 13대 장군 軍足利義輝(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동생

足利義昭(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받들고
상경길에 오르자 이에야스도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파견하였다.
그 후, 천하의 실권을 둘러싸고

요시아키와 노부나가 사이에 대립이 깊어져
요시아키가 노부나가 포위망을 형성하면서

이에야스에게도 협력을 요청하지만
이에야스는 이를 거부하고 姉川(아네가와) 전투등에

참전하여 노부나가를 계속도왔다.
1572년 상경을 목표로 한 신겐이 도토미, 미카와로 침공하였다.
이에야스는 이를 요격하였지만 三方ヶ原(미카다카하라) 전투에서

대패당해 하마마츠성까지 혼자서 도망갈 지경이었지만

신겐의 급사로 인해 위기를 벗어났다.
이때 이에야스의 고노로 가득찬 표정을 그린 초상화가 남아 있어
자신의 훈계를 위해 그리게 했다고 여겨진다.
또, 하마마츠성에서의 농성전때 [공성의계]를 사용하여
이것을 수상히 여긴 신겐이 진군하지 않고 퇴각했다고 한다.
1575년 5월 신겐의 사후 다케다가를 상속한 가츠요리를
노부나가의 원군과 長篠(나가시노)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1579년에는 노부나가에 의해 다케다가에 내통의 혐의를 받은
정실 츠키야마도노와 장남 信康(노부야스)를

동맹관계 유지를 위해서 살해하였다.
노부야스는 뛰어난 무장으로 이에야스는 후의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노부야스가 있었으면]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1582년 노부나가의 다케다 공격에서는

스루가로 부터의 공격을 담당해
다케다가 멸망 후 스루가를 영토로서 획득하였다.
1582년 스루가 배령에 대한 예를 위해서

노부나가의 거성 安土(아즈치)성을 방문하였다.
그 후, 사카이를 유람 하던 중에 本能寺(혼노지)의 변이 일어났다.
이때, 이에야스의 주변에는 시동 몇명등의

소수 인원으로 극히 위험한 상태였다.
이에야스는 즉시, 伊賀(이가)를 지나,

伊勢(이세)국에서 바다로 미카와로 돌아왔다.
이에야스는 도착 즉시,

아케치 토벌을 준비하였지만 결국 늦고 말았다.
한편, 노부나가의 영토였던

구 다케다령의 甲斐(카이), 信濃(시나노)는 동요하고 있었다.
카이, 시나노는 노부나가의 대관인

河尻秀隆(가와지리 히데타카)가 다스리고 있었지만
히데타카는 다케다가의 세법이나 관습을 인정하지 않고,
거기에 대규모 다케다가 잔당 토벌을 시작해

백성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다.
그래서 노부나가 사후, 잇키가 발생하여

히데타카를 공격해 죽여버렸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本多忠俊(혼다 타다토시),
岡部正綱(오카베 마사쓰나),

다케다가의 가신이었던 依田信蕃(요다 노부시게)를 선봉으로

카이로 파견하고 스스로도 8천의 군사를 인솔하여

카이로 쳐들어갔다.
한편, 카이, 시나노의 혼란에 관동의 호조가도 마찬가지로
北條氏規(호조 우지노리), 北條氏照(호조 우지테루)등

5만 5천의 군세가 우스이 고개를 넘어 시나노로 침공하였다.
호조군은 越後(에치고)로 부터 침공해 온

上杉景勝(우에스기 가게카쓰)군과
川中島(카와나카지마)에서 대치한 후
시나노 북부 4군을

우에스기가에 할양하는 조건으로 화목하고 남하하였다.
카이로 침공중이었던 도쿠가와군과

카이 新府城(신푸성), 若神子(와카미코)에서 대진하였다.
여기서 도쿠가와와 호조의 전면 대결의 양상이 나타났지만
도쿠가와군 요다 노부시게나

노부시게의 권유로 이에야스군에 가담한

眞田昌幸(사나다 마사유키)등의 집요한 게릴라 전법에
전의를 상실한 호조군과의 화목의 제시를 받는다.
카이, 시나노 남부를 도쿠가와가가 차지하고

도쿠가와가는 관동에 침공하지 않는다고 하는
놀랄만한 호조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8천의 군사로 5만의 대군을 떠나게 하여
통합 5개국을 영유하는 대 영주로 성장하였다.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다케가의 옛 신하들을 적극적으로 고용해
가신단을 강화하는 동시에 본거지를 슨푸로 옮겼다.
이렇게 하여 이에야스는 東海(도카이) 제일의 세력이 되었다.

노부나가 사후, 淸洲會議(기요스 회의),

시즈가타케 전투등으로 시바타 가쓰이에를 물리친

하시바 히데요시가 대두하고 있었다.
1584년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차남 信雄(노부카츠)를 보호하고
小牧(고마키), 長久手(나가쿠테) 전투에서

히데요시와 대치하여 전투적인 면에서는 우위를 점했지만

노부카츠가 히데요시에게 회유되어 군사를 물려 버리자
그 후 화목하여 히데요시의 여동생

朝日姬(아사히히메)를 후처로 맞이하고
이에야스의 차남 秀康(히데야스)를 히데요시의 양자로 보냈다.
히데요시의 신종요구를 거절하였지만

1586년 히데요시가 자신의 생모인 大政所(오만도코로)를

인질로 보내자 상경하여 히데요시에게 신종하였다.
1590년 히데요시가 호조가를 멸망시키자

지금까지의 도카이 5개국 대신에
관동의 武藏(무사시), 上野(고즈케), 下總(시모우사),

上總(가즈사), 相模(사가미), 伊豆(이즈)의 6개국으로 이봉되어

본거지를 江戶(에도)로 옮겼다.
이것에 의해 이에야스는 히데요시를 웃도는

255만석을 영유하여 五大老(오대로)의 필두로

관직도 內大臣이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肥前(히젠) 名護屋(나고야)성에 출진하였지만

국내에만 머물렀다.
히데요시 사후, 유언으로 정해져 있던 합의제를 무시하고
금지되어 있는 영주끼리의 결혼식등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정권 운영을 둘러싸고 다른 대로나
五奉行(오봉행)의 石田三成(이시다 미쓰나리)등과 대립하였다.
또, 이때 미쓰나리와 대립하고 있던 福島正則(후쿠시마 마사노리),
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등을 아군으로 하였다.
오대로 前田利家(마에다 토시이에) 사후

이시다 미쓰나리를 추방하고

前田利長(마에다 토시나가)를 굴복시켜

伏見城(후시미성)과 大坂城(오사카성) 서쪽 마루를 점령하였다.
1600년 이에야스가 會津(아이즈)의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토벌하기 위해 畿內(기나이)를 떠나자

그 틈에 미쓰나리가 오대로의 毛利輝元(모리 데루모토)를

옹립하고 군사를 일으켰으나

關ヶ原(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를 격파하고 패권을 확립하였다.
전투 이후 이에야스는 서군의 격파를

秀賴(히데요리)와 淀殿(요도도노)에게 보고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를 미쓰나리의 야심에 의한 봉기로 규정하고
이에야스가 토요토미군으로 이것을 진압한 것으로 처리가 되었다.
그 결과, 반란군으로 서군에 가담한 세력들은

개역되거나 영지가 삭감되고
동군에 가담한 무장들에게는 토요토미가의 영지가 은상으로 주어져
토요토미가의 영지는 200만석에서 攝津(셋츠), 河內(가와치),
和泉(이즈미)의 65만석으로 큰폭으로 줄어드는 결과가 되었다.
천하의 형세는 이것으로 단번에 도쿠가와가로 흘러가게 되었다.
그렇지만 무가에 있어서 주종의 관계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어서
도쿠가와가가 토요토미가의 대로인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1603년 征夷大將軍, 右大臣으로 임명되고

江戶幕府(에도막부)를 열어 토요토미가 오대로의 필두에서

무가의 대표로서의 지위를 손에 넣었다.
조금 잘못하면 천하 찬탈의 비난을 면할 수 없는거였지만
히데요리가 어리므로 서구 열강에 대한 대비를 한다는 이유를 붙여
어떻게든 대의명분을 살리고 있었다.
거기에 토요토미가가 그것을 좋게 볼리가 없으므로
토요토미가에 장군 취임은 일시적인 거라는 인상도 남겨 두었다.
당시에 주종의 관계는 무가 사회에서 중요시 되는 것으로
조정의 권의는 사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정으로 부터 무가의 대표자로 인정되자

이에야스의 세력은 더 커졌고
관직의 등급과 천하 호령의 대의명분을 획득하여

명실공히 토요토미가를 웃도는 지위를 확립하였다.
막부 관청을 설치하고 무가와 문신의 여러 제도의 정비를 실시해
무가의 통제 및 조정의 장악을 위한 법도를 정하였다.
조정의 장악을 통해 이후 토요토미가가 세력을 회복할 길을 막고
천하 통일의 뒤에도 조정을 지배하에 넣는다는 것은
그 후의 모반의 예방이나 모든 정치적인 우위를 확립하는데 중요했다.
1604년 右大臣에서 물러나고

다음 해에는 아들 秀忠(히데타다)에게 장군직을 양보해
도쿠가와 막부에 의한 장군직의 세습을 확실히 하였다.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신장군 히데타다와의 대면을 요청하였지만
요도도노가 격노하자 결국 이에야스가

6남 松平忠輝(마츠다이라 타다테루)를

오사카성에 파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토요토미가의 권위가

크게 꺽인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607년 부터는 은거라고 칭하고 슨푸성으로 옮기지만
에도의 장군에 대해서 大御所(오고쇼)로서

실권을 계속 행사하여 2원정치를 하여

막부의 제도 만들기에 열심이었다.

만년에는 토요토미가 처리에 심혈을 기울여
1611년에는 二條(니조)성에서

히데요리와 회견하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주군임을 자인하는 토요토미가는 이것을 거절하려고 했지만
장군 히데타다는 히데요리의 장인인 관계로,
어디까지나 장인에게 인사라는 명목으로 상경을 요청하여
마침내 히데요리를 상경시키는 것에 성공하였다.
이것으로 히데요리를 통해 토요토미가가 발길을 옮긴 형태가 되어
천하의 이목은 이에야스의 천하가 된 것을 재차 확인하게 되었다.
1614년 方廣寺의 종명사건을 계기로 전투를 일으켜
1614년의 겨울 전투와 다음 해의 여름 전투에서

오사카성을 공격하여

토요토미가를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달성하였다.
그해 동안에 무가와 궁중의 여러 법도와 일국일성령이 제정되었다.
이렇게 하여 도쿠가와 정권에 의한 일본 전국 지배가 실현되었다.
1616년 太政大臣으로 임명되고 슨푸성에서 75세로 사망하였다. 正一位가 추존되었다.
사인은 식중독이라고도 하지만 위암일 가능성이 더 높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기에
결코 서둘러서는 안된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의 시조로서

權現樣(곤겐님)이라 불리며 에도시대에 숭배되었다.
현재도 日光東照宮의 奧社를 묘소로 전국 각지의 東照宮,
愛知縣 岡崎市의 大樹寺, 도쿄 台東區 上野의 寬永寺가 있다.

 

이에야스가 주춧돌을 쌓아 올린 도쿠가와 막부를 정점으로 하는
에도 막부의 지배체계는 지극히 완성도가 높은 것이었다.
에도 막부는 교토, 오사카, 사카이, 博多(하카타)등

전국의 막부 직할 도시를 포함해
전국 총 수확량의 1/4에 해당하는 약 700만석을 독점관리 하고
또, 주요 광산과 화폐를 만들 권리도 독점해

화폐 경제의 근간을 제압하는등
타 영주들의 발현을 허락하지 않는 압도적인 권력 기반을 가져,
이것을 기반으로 전국 영주, 사찰, 조정, 그리고 천황가까지도

얼마든지 법도로 단속하고 지배했다.
이것을 거역하는 것, 혹은 막부에 대해서

위험이라고 판단되는 것에는 용서를 하지 않아
그 때문에 막부의 초기에는 여러 영주들이

개역당하는 괴로움을 겪었다.
이것은 조정이나 천황가 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막부는 온순한 영주가에 대해서도 참근교대를 통해

항상 재정을 압박시켜

막부에 반항하는 힘을 기르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
이와 같이 압도적인 권력 기반을 배경으로

도쿠가와 막부를 정점으로 군림시켜
전국의 영주, 조정, 천황가를 [살지도 죽지도 않게 하고
거역하면 혹은 그럴 위험이 있다면 잡는다]의 자세로
지배한 것이 이에야스가 쌓아 올린 에도 막부이다.
이와같이 도쿠가와 막부만을 절대로 하는

에도 막부의 절대적인 지배 체계는
[보수적, 봉건적]이라고 비판을 받지만
그 정도까지의 강고한 지배체계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전국시대를 완전하게 종결시키고 에도 막부가 250년 이상에 이르는
일본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장기 안정 정권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이 에도 막부의 주춧돌을 구축한

이에야스의 수완은 에도 막부의 여러가지 과실과는 별도로

높게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또, 후의 쇄국정책으로 연결되는

폐쇠적 외교 방침을 기본정책을 한것이
오히려 에도 막부 말기 열강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하는 평가도 있다.
이러한 막부의 과실들은 모두 이에야스 사후에

당시의 정세속에서 행해진 것으로
이에야스에 대한 비난으로서는 옳지 않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이에야스의 악평이 높아진 것은,
메이지 정부가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만들어진 정권이기 때문에
에도시대를 악으로 규정하고 정부를 선으로 한 때문이었다.
특히, 태평양 전쟁은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과

일제의 제국주의적 영토 확대 정책과 합치하여
히데요시는 淸君,

거기에 등진 이에야스는 奸君이라고 평가되었던 것이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는
어릴적 부터 인내에 인내를 거듭하고

역경과 갖은 고통에도 굴북하지 않는
선경지명을 가지고 승리한 인물로 이상주의자로 그려져 있다.
이 소설로 인해 이에야스의 재평가가 시작되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소설의 영향으로 인해 이에야스를

불굴의 정신력의 소유자로 평하는 사람도 많다.

 

이에야스는 에도시대 神君으로 불리며 공경의 대상이었지만,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음험한 모략가,

혹은 간사한 늙은이로 평가 되었다.
이것은 히데요시 사후, 모략을 구사해

토요토미측의 여러 영주들을 제거하고
마침내 토요토미가를 멸망에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이 대문에 에도시대 역적으로 평가되었던 이시다 미쓰나리등이
근래에는 토요토미가를 지키려고 한 충신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에야스를 평하는 말 중에

[狸親父](교활한 영감)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이에야스가 모략에 뛰어난 것도 있지만,

동시에 비열한 모략을 구사해
천하를 좌지우지 하려고 한 비열한 인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오사카 전투 직전에 토요토미가에 은혜를 입은 영주들인
가토 기요마사나 淺野幸長(아사노 유키나가)가 급사한 것은,
이에야스의 모략에 의한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고
그 외의 모략에도 비열한 색이 강하여

이것이 근간에 이에야스를 낮게 평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도쿠가와측의 사료라고 할 수 있는 [에도막부의 역사서]에 조차
이에야스의 모략의 여러가지를 어떻게든 열심히 변호하고 있다.
뚜, 근래에 동시대의 영웅인 오다 노부나가나
이에야스와 철저하게 적대했던

사나다 마사유키, 유키무라 부자의 인기가 높아져
이에야스는 그 상대적으로 저평가가 되어 손해를 보는 것도 있다.
한층 더 이에야스의 악명을 근간에 높이고 있는 이유로서
자신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서 활약한 공신인

혼다 타다카쓰, 사카기바라 야스마사, 오쿠보 타다치카등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멀리 하거나,

자신의 차남 유키 히데야스, 6남 마츠다이라 타다테루등을

푸대접하고 다른 집 아이처럼 대했던 일등이 들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역사 소설이나 시대극에서는

이에야스는 음습하고 음험한 모략가로 그려지는게 많다.
전국시대 최대의 무장 종교 세력인

一向宗 本願寺(혼간지)가 顯如(겐뇨) 사후,
겐뇨의 장남 敎如(교뇨)와 산남 准如(준뇨)가 대립하여
교뇨가 독립하는 형태로 동 혼간지가 설립(眞宗大谷派)하고
후에 이것에 대해 준뇨가 서 혼간지를 설립(淨土眞宗本願寺派)해
동서 혼간지로 분열되는데,

이 분열에 관여한 것이 바로 이에야스이다.
지금까지는 젊은 날에 일향종 일규에 의해 괴롭힘을 당한 이에야스가
혼간지의 세력을 약체화 시키기 위해서

교뇨를 부추킨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
근래에는 眞宗大谷派가

[교뇨는 이에야스에게 부추겨져 동 혼간지를 설립한 것이 아니고,
원래 독립 지향적 경향이 있었다]라는 견해를 발표하였다.
혼간지의 분열이 이에야스의 책모에 의한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적어도 이 분열에 즈음하여 교뇨를 지지하여
동 혼간지의 토지를 기부한 것이 이에야스 인것은 확실하다.
眞宗大谷派도 동 혼간지의 설립에

이에야스의 관여가 있던 것은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혼간지의 분열에 의해서

혼간지는 서로 대립관계에 빠져
그 결과 전국시대에 여러 영주들을 위협했던 것 같은

강대한 무장 종교 세력은 아니게 되어버렸다.
일찌기 오다 노부나가는 혼간지를 섬멸하려고 하였고,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반대로 이들을 회유하려고 했지만
이에야스는 그들에게 관여를 불분명하게 해

결과적으로 혼간지를 내부 분열시키고 그들을 자멸케 만듬으로서

세력을 큰폭으로 약체화 시키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이 일도 이에야스의 교활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비판적으로 파악되는 일도 있다.
도쿠가와 막부를 절대 군주로 하여 전국의 영주를 시작으로,
사원 세력, 조정 그리고 천황가까지도 실질 지배하에 두고
또, 외교면에서도 폐쇠적인

철저한 중앙집권적 봉건 지배체제를 구축한 것은
일본의 근대화를 늦게 한 요인이 되었다고 비난하는 소리도 있다.
또, 이것에 관련되어 [살리지도 죽이지도 않는] 자세로

백성들을 지배한 일이나

크리스찬에 대한 엄격한 탄압도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 [覇王の家]에서는

에도시대에 대해 [공죄가 반이다]라고 하고 있다.
[일본인의 민족적 성격이 외소형화 되어 기형화 되었다.]
[대항해 시대의 조류에 쇄국정책으로 일본을 가둠으로서

세계적 보편성에 도달하기 어렵게 만들어

현재에도 그 뿌리를 남아있는 불행을 만들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공죄의 원인은

[도쿠가와가라고 하는 극단적으로 자가 보존의

신경에 과민한 성격으로 부터 나온것]이라며

 이에야스에게 그 원인이 있다고 하고 있다.
료타로는 이에야스에 대해 지극히 비판적이며,

또 극단적으로 혐오하고 있는 것 같아
료타로의 작품안에서 이에야스는 [모략에 뛰어난 교활한 인간,
그리고 아무 재미도 없는 현실주의자]로 그려지고 있다.
시바 료타로의 이에야스 비판은 료타로의 작품의 인기를 등에 업고

그 지지자가 더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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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야망 | 작성시간 08.04.28 잘보았습니다. 좋은글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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