寡默の名將 上杉景勝(1555~1623)
(과묵한 명장-우에스기
가게카쓰)
결과적으로는 무릎을 굽혔지만, 명장 直江兼續(나오에 가네츠구)와 힘을 합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호각으로 대치한 우에스기
가게카쓰.
그러나 그 이름은 너무도 위대한 양부 우에스기 겐신의 그늘에 가려져
유감스럽지만 그의 지명도는 상당히 낮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그에게 스포트를 맞춰 소개합니다.
이 기회에 한번 더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본 모습을 지켜봐
주세요.
★젊은 날의 가게카쓰
그런데, 양부 겐신과 비교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존재로
느껴지는 우에스기 가게카쓰.
젊은 날의 그는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우에스기 가게카쓰라는 인물
후세에 [가게카쓰는 뛰어난 호걸로 담대한 자였다.
전투에서는 전대에 서서 적과
창을 겨누기도 하고,
적의 화살이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부하들과 함께 하며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전투가 한창인 전시에도 진중 막사에
누워 우뢰와 같은 소리로 코를 골며 자기도 했다.]
항상 준엄한 태도를 보였다고 전해지는 과묵한 명장 우에스기
가게카쓰.
참내할 때의 그의 군대의 행렬은
[고요함속에 기침 소리도 들리지 않고, 다만
인마의 발자국 소리만이 들릴뿐.]이었다고 한다.
또, 그의 군사들은 적보다 이런 주군 가게카쓰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패배하였기 때문에,
米澤(요네자와) 30만석으로 감봉이
되지만,
그의 의리가 두터운 면에 뿌리 깊은 팬도 많다.
가게카쓰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지금부터 그의 인생을 간단하게 쫓아 보기로
하자.
○젊은 날의 가게카쓰
그는 弘治元(1555)년 11월 27일,
越後(에치고) 魚沼郡(우오누마군)
上田莊(우에다장)을 본거지로 하는
坂戶城(사카토성) 성주 長尾政景(나가오 마사카게)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겐신의 누이인
仙桃院으로 가게카쓰는 겐신의 조카에 해당된다.
이해 10월 1일에는 毛利元就(모리 모토나리)가 安芸(아키)
嚴島(이쓰쿠시마)에서
陶晴賢(스에 하루카타)를 공격해 격파한 때였다.
가게카쓰와 동세대 무장으로는 藤堂高虎(도도 다카토라-1556년
1월6일 출생)가 있다.
그는 처음에는 卯松(우노마츠)로 불리다 후에 喜平次顯景(아키카게)를
자칭한다.
그리고 天正3(1575)년 景勝(가게카쓰)로 개명하고, 彈正少弼에 임명되지만,
이 글에서는 번잡함을 피하기 위해, 처음부터
가게카쓰, 겐신의 이름을 통일해서 진행하기로 한다.
그런데, 그가 아직 10세였던 永祿7(1564)년 7월 5일,
아버지 마사카게가
野尻(노지리) 호수에서 뱃놀이 도중 사고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모반의 소문이 있던 마사카게를 宇佐美定滿(우사미
사다미쓰)가
독단으로 뱃놀이로 끌어들여 살해했다는 것과,
겐신의 명을 받은 사다미쓰가 마사카게를 살해했다는 설이 있지만, 진상은
확실치 않다.
그냥 술에 취해 익사했다는 설도 있다.
그가 겐신의 양자가 되었던 시기에 대해서도,
5세 때라고 하는 설과 이 사건
직후라는 설 등이 있지만,
가게카쓰 8세 때에 上野(고즈케) 館林(다테바야시) 출진중의 겐신으로 부터
자애로 가득찬 편지가 보내진
것으로 보아, 양자 결연의 성립 일시는 차치하더 라도
겐신이 이전부터 가게카쓰를 남다르게 생각했다는 것에는 틀림이 없는거
같다.
또, 이 사건 이래로 그가 과묵하게 되었다고도 전해지는데
인정적으로는 납득이
가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리고 뜬소문으로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아버지 마사카게의 횡사 뒤에
겐신의 명에 의해 그는 直江實綱(나오에 사네쓰나),
甘糟景持(아마카스 가게모치)에게 맡겨져
그에게 기량이 있다면 16세 때에 마사카게의 본령을 돌려주려고 한
것이었다.
나오에, 아마카스가 긴밀하게 관찰하였는데,
그의 인품은 부드러운데, 미지근한거
같지만 그렇지도 않고,
대부분은 가만히 인내하지만, 화낼 때는 격렬했다.
또, 불쌍하다고 생각하면 자비를 베풀어 사람을 부리는데도
배려를 해
고마운 마음을 갖게하는 사람을 다스리는 법을 사용했다.
거기에 문무에 모두 정진하여 연로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데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또, [아버지 마사카게가 죄를 지어 신세를 망친 것은 천벌로 겐신공에게 조금의 원한도
없다.
(이 이야기에서는 마사카게가 겐신에게 제거된 것으로 진행한다.)
본래라면 마사카게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제거되어도 어쩔 수 없는
일,
목숨을 부지하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장래에 내가 바라는대로 본령을 받게 된다면 이 은혜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그렇게만 된다면 신명을 다해 충성함으로써 아버지의 불충의 죄를 씻고,
나의 충성으로서 망령의 미혹을 뿌리치고 싶은
것이다.]라고 하고
아버지를 위해서 매일 천편의 경을 읊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두 사람을 통해 들은 겐신은, 그를 용서하고 측근으로
명했다.
가게카쓰 13세의 나이였다.
그리고 元龜元(1570)년 가게카쓰와 운명적인 만남이 되는
한 명의 청년이
春日山城(가스가야마성)으로 왔다.
★우에스기 가게토라와 오다테의 란
그런데, 우에스기가에 또 한사람의 양자
上杉景虎(우에스기 가게토라)가
小田原(오다와라) 北條(호조)가로 부터 들어 옵니다.
그리고 갑작스런 겐신의 죽음. 가게카쓰는 재빠르게
움직인다.
○또 한사람의 양자 우에스기 가게토라
그 인물의 이름을 上杉景虎(우에스기 가게토라)라고
한다.
가게토라는 相模(사가미)의 명장 北條氏康(호조 우지야스)의 아들로 통칭 三郞(사부로)로,
후사가 없는 北條幻庵(호조 겐안)의
양자가 되어 있었지만,
永祿12(1569)년 윤5월 3일에 겐신과 우지야스 사이의 [越相同盟]으로
다음 元龜元(1570)년 호조가에서
겐신의 양자로 우에스기가로 오게 된다.
거기에 우에스기가에서는 枾崎晴家(가키자키 하루이에)가 오다와라로
갔다.
이 가게토라는 최근까지 호조 우지야스의 7남(또는8남)인
氏秀(우지히데)로 여겨졌지만,
아무래도 가게토라와 우지히데는 딴 사람인 것 같다.
우지히데는 北條綱成(호조 쓰나시게)의 차남으로
江戶城(에도성)을 맡은
孫二郞康元(야스모토)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일의 진위는 차치하고, 이후 그도 전국기 특유의
외교 정책의
희생자라고 말해도 좋은, 불우한 생애를 보내게 된다.
또, 가게토라는 겐신의 전 이름을 하사받은 것 뿐만
아니라,
아내로 나가오 마사카게의 딸(가게카쓰의 누이)을 맞이하게 된다.
즉 가게카쓰와 혈연관계가 된
셈이다.
가게카쓰라고 하는 일족의 양자가 먼저 있으면서,
겐신이 어떤
의도로 그에게 가게토라라는 이름을 주었는가는 알수가 없다.
가게카쓰는 본가 [나가오 우에스기가], 가게토라는 [관동 관령가]가가
중심이었다.
실은 겐신에게는 또 한사람 上條政繁(조조
마사시게-전山義春(하타케야마 요시하루))라는
양자가 있어서 가게카쓰를 많이 돕고 있었는데,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도쿠가와가에 속해
본성을 쓰게 되니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가신들 중에는, 내심 이 양자 결연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을
테지만
당분간은 표면화 되지 않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전 天正3(1575)년 가게카쓰는 喜平次에서 景勝로 개명하고
彈正少弼로 임명되고,
겐신은 能登(노토)로 침공하여 手取川(테도리가와)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天正6(1578)년, 청천벽력과 같은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겐신의 죽음과 오다테의 란
이해 3월 9일, 겐신이 가스가야마성에서 돌연 쓰러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채 4일 후에 병사한 것이다.
유언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이 때문에 가문내에서는 가게카쓰파와 가게토라파로
나뉘어져
이른바 상속자 싸움인 [御館(오다테)의 란]이 일어났다.
여기서 가게카쓰의 행동은 빨랐다.
3월 15일에 겐신공의
유언이라고 칭하고 가스가야마성의 병기 창고를 점거하고,
24일에는 자신이 겐신의 후계자임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양군은 5월 5일
大場(오오바)에서 처음으로 교전하였다.
가게토라는 처자를 동반하고 가스가야마성을 탈출해
天文21(1552)년 이래 겐신을 의지해
에치고로 와 있던
전 관동 관령 山內(야마노우치) 上杉憲政(우에스기 노리마사)의
저택인 御館(오다테)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가게토라의 형인 北條氏政(호조 우지마사)는 武田勝賴(다케다
가츠요리)에게
가게토라 구원을 의뢰하였고, 가츠요리는 수락하여 5월 29일에 군사를 국경 부근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가게카쓰는 막대한
금은과 일부 영토의 할양을 조건으로 내걸고
황금 1만량과 가츠요리의 여동생과 혼인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화목에 성공한다.
가츠요리는
조건을 수락하고 군사를 물려버렸다.
일설에 가츠요리의 중신 長坂長閑(나가사카 노도카), 跡部大炊助(아토베 오이조)에게
2천량씩의
뇌물을 건네주고 이야기를 진행시켰다고 한다.
가츠요리의 철병에 의해 호조가에서는 9월 氏照(우지테루),
氏邦(우지쿠니)가 출진하여
에치고에 침입해 樺澤城을 본거지로 사카토성등 주변의 성들을 공격하였다.
격렬한 전투가 안정되었다고 생각된
다음 天正7(1579)년 2월 1일,
눈이 퍼붓는 중에 가게카쓰는 오다테에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가게토라군으로 일기당천의 호걸로 [鬼彌五郞]의 이명을 가진
北條景廣(長國)가
이날 가게카쓰군의 荻田主馬(孫十郞)의 창에 전사하였다.
수에서 밀린 가게토라군은 눈으로 오다와라에서 원군도 오지
못하게 되자
마침내 3월 17일에 오다테는 점령되었다.
덧붙여 이날 가게토라에 가담하고 있던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가게토라의
장남으로 9세의 道滿丸을 데리고 화해의 중재를 위해
가스가야마성으로 향하지만 도중에 가게카쓰군에 의해 참살되고
만다.
가게토라는 낙성 직전에 鮫ヶ尾城(사메가오성)으로
탈출하지만,
의지했던 성주 堀江宗親(호리에 무네치카)가 가게카쓰쪽으로 돌아서자,
진퇴양난에 빠진 가게토라는 24일에 자결하고 만다.
향년 26세의 젊은 나이였다.
이후, 회尾城(토치오성)의 本庄秀綱(혼조 히데쓰나),
三條城(산조성)의 神余親綱,
北條城의 北條輔廣등이 저항을 계속 했지만,
차례로 이들을 격파하고 天正9(1581)년 2월에 동란을
종식하였다.
★하시바 히데요시의 접근
갈수록 태산으로 이번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북상의 위협에 노출되는
가게카쓰.
그러나, 노부나가는 혼노지에서 횡사하고
대신에 하시바 히데요시가 급속히
대두하여
우에스기가에 접근해 오게 된다.
○우오츠성 공방과 혼노지의 변
그런데, 간신히 안정된 가게카쓰이지만, 테도리가와에서 겐신에게
당했던
오다 노부나가가 이 기회를 놓칠리가 없었고,
이번에는 오다군의 침공 위기에 노출되게 되었다.
상대는 天正8(1580)년
加賀(가가)를 평정한
오다가의 北陸(호쿠리쿠) 방면 사령관인 柴田勝家(시바타 가쓰이에)였다.
총대장 가쓰이에는 물론이고,
佐佐成政(삿사 나리마사),
前田利家(마에다 토시이에), 佐久間盛政(사쿠마 모리마사)등
맹장들이 참가하고 있어 가게카쓰로서는 중대 국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天正9(1581)년 越中(엣츄)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던
중에
新發田重家(시바타 시게이에)가 오다테의 란에 있어서의 은상에 불만을 품고
노부나가와 통하여 가게카쓰에게 반란을 일으켜, 배후의
위협에 노출되게 되었다.
다음 天正10(1582)년 3월 11일에 가게카쓰와 연합한
一向一揆(잇코잇키)의 장수 小島職鎭이 富山城(토야마성)을 낙성시키기도 했지만,
같은 날에 노부나가가 甲斐(카이)
天目山(텐모쿠산)에서 다케다 가츠요리를 멸망시키고
이 기세를 탄 오다군과의 싸움이 한층 더 격화되어 토야마성을 다시
빼앗겼다.
거기에 오다군은 魚津城(우오츠성)으로 쳐들어왔기
때문에,
가게카쓰는 上條政繁(조조 마사시게), 齋藤朝信(사이토 도모노부)등을 보내
성 병사들을 격려하고 성을 견고히 하면서 스스로도
성의 구원을 위해 출진하였다.
그러나, 이때 오다군의 森長可(모리 나가요시)가 가게카쓰의 부재를 틈타
信濃(시나노)에서 북상하여
에치고의 경계로 침범해 왔기 때문에
가게카쓰는 가스가야마성으로 되돌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가 5월 27일의
일이었다.
가스가야마성으로 돌아온지 얼마 안된 6월 2일 새벽녁에
오다
노부나가가 本能寺(혼노지)의 불길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그런일이 있는줄을 모르는 오다군은 이날 우오츠성에 총공격을 감행해
다음
6월 3일에 마침내 성을 낙성시켜 성주 中條景泰(나카조 가게야스)등이 자결하고 끝이났다.
이 자결한 광경이 굉장했기 때문에 부기하자면,
가게야스등은
불에 타 누구의 목인지 모르면 보기 흉하다며
자신의 이름을 쓴 금침을 귀에 꽂은 다음에 자결했다고 한다.
얼마 뒤에 이 광경을 본
오다군의 장수들에게 우에스기의 두려움을 더 강하게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다음 6월 4일, 혼노지의 비보가 우오츠성에 닿자
오다군은
혼란에 휩싸인채 철퇴하게 된다.
○시즈가타케 전투와 히데요시의 접근
이렇게 하여 가게카쓰는 당면의 위기를 벗어났다.
한편,
羽柴秀吉(하시바 히데요시)는 후에 [中國大返し]이라고 불리는
전광석화의 재빠른 솜씨로 군을 돌려 13일에
山崎(야마자키)에서
明智光秀(아케치 미츠히데)를 물리치고
미츠히데는 알려진 바대로 토착 주민의 창에 사망하고 만다.
그리고 6월 27일에 이른바 淸洲會議(기요스 회의)에서 오다가의
호주 승계를 주도하여
평소부터 사이가 나빴던 시바타 가쓰이에와 결정적인 대립을 하게 된다.
이것도 가게카쓰에게는 다행인
점이었다.
만약 히데요시와 가쓰이에가 사이 좋게 손을 잡았다면,
제일 먼저 가게카쓰가 존망의 위기에 처할뻔 하였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가쓰이와의 싸움을 피할 수 없도록 계속해서 손을
썼다.
가게카쓰도 서서히 움직여 히데요시와 협력하는 길을 선택해,
天正11(1583)년 1월 12일에 엣츄 瑞泉寺(즈이센지)의
승려들을 통해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서신을 쓰게 하였다.
히데요시의 대응도 빨라, 2월 7일자로 가게카쓰에게
가신 須田滿親(스다
미쓰치카)에게 서신을 동봉해
가쓰이에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해 가게카쓰에게 엣츄에서 출병을 요청하였다.
3월 17일자의 서신에서는
[엣츄로 침공을 하면,
노토를 포함해 영지로 취하는 것은 자유]라고 씌여 있었다.
이윽고 히데요시와 가쓰이에에 의한 싸움이
일어나지만,
가게카쓰는 히데요시가 기대한 대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큰 이유는 반의를 나타낸
시바타 시게이에의 동향과
거기에 호조, 사나다 마사유키, 도쿠가와 이에야스라고 하는 이들이
틈을 엿보고 있었기 때문에, 거국적으로
출진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엣츄의 시바타군은 삿사 나리마사라는 싸움에 능숙한 맹장으로
그렇게 간단하게 가게카쓰가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러 사정에 의해 가게카쓰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삿사 나리마사에게 견제가 되어 나리마사는 전투에 참가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4월 21일에 近江(오미) 賤ヶ岳(시즈가타케)에서
가쓰이에군을 격파하였다.
가쓰이에는 3일 후에 거성 越前(에치젠) 北ノ庄城(기타노쇼성)에서
아내인 お市(오이치)와 함께 자결하고,
전투는 히데요시의 승리로 끝이났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가게카쓰에게 영지를 하사한 것이
아니라
가게카쓰의 약속의 위반에 화내며 문책의 문서를 보냈다.
그리고 가게카쓰는 배반한 시바타 시게이에 토벌을 위해
향했지만,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단번에 평정이 되지 않았다.
★越水(코시미즈)의 회담
초소카베 모토치카나 삿사 나리마사등의 항복을 받고
從一位
관백이 된 히데요시가 생각지도 않게 에치고로 찾아와
가게카쓰에게 면회를 요구한다.
그런데,
가게카쓰는....
○가게카쓰의 자존심
히데요시는 정력적으로 움직여, 오다 노부카츠를 이용해
오다 노부타카를 제거하고
초소카베 모토치카 정벌을 준비한다.
그리고, 大坂城(오사카성)의 축성을 개시한다.
다음 天正12(158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교전을 벌이게 되지만
서로간의
결착을 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9월 木村秀俊(기무라 히데토시)를 사자로 보내
우에스기가와의 호의 관계를 추구하는 서약문을
보내왔다.
여기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으므로 조금 소개한다.
가게카쓰는 시바타 가쓰이에 공략시에 히데요시에게 협력하고 있었지만,
신종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대등한 입장에서의 협력이었다.
가게카쓰는 항상 [겐신공을 따른 나라들의 아직 1/5도 손에 넣지 못했는데,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히데요시와 연계하여 나머지 나라들을 평정해도,
세상에서는 가게카쓰의 실력으로 취한것이 아니고
히데요시의 위광으로
평정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것은 재미없다.]
라고 했다고 전해지고 있어 여기에 가게카쓰의 자존심이 보일듯 말듯해 흥미롭다.
아무래도
그는 상당히 완고한 성격으로 심지가 곧은 무장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서약문과 삿사 나리마사 공략의 협력요청에 대해서
[우오츠성은
나리마사에 의해서 떨어졌다.
당시는 국내의 사정으로 그와 자웅을 겨룰 수 없었지만,
엣츄는 우리들이 누대에 거쳐 다스려온 것으로
반드시 나리마사를 멸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리마사를 토벌하는 것은 히데요시공과 함께 싸우는 것이 된다.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히데요시공의 힘을 빌어 싸운다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내가 먼저 엣츄로 출진하여 에치고 무사의 힘을 당신에게
보여드리겠소.
그 다음에 히데요시공의 뜻에 따르도록 하겠소.]
가게카쓰는 이렇게 말하고 8천의 군사를 편성해 10월 23일에 에치고를
출진하여
나리마사측의 엣츄 宮崎, 境城을 단번에 점령하고
滑川城(나메리카와성)에 병사를 배치하고 도처에 방화를 하며 시위행동을
벌였다.
나리마사는 9월에 히데요시측의 마에다 토시이에의 성으로
奧村助右衛門永福(오쿠무라
스케에몬 나가후쿠)가 지키는 노토 스에노모리성 공략에 실패하여
고입된 처지에 놓여 방어전에 몰두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거기에
가게카쓰가 위협을 해오자 다음달 23일에 결사의 각오로
이에야스의 원조를 구하기 위해 험준한 산맥을 넘기
시작하였다.
○코시미즈의 회담
나리마사는 고생 끝에 하마마츠에 있는 이에야스에게 가까스로 도착하지만
벌써
이에야스는 차남 히데야스를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내고 강화를 한 다음이어
실의속에 귀국하게 된다.
이때, 히데요시는 從三位大納言이 되었고,
다음 天正13(1585)년 3월
正二位內大臣, 7월 11일에는 從一位關白이 되었다.
놀랄만한 속도로 정상을 향해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군사면에서는 스스로 출진하여 4월말 까지 紀州(기슈)를 평정하고,
7월에는
동생 히데나가를 시코쿠 정벌군으로 내세워 초소카베 모토치카의 항복을 받아내고,
8월에는 金森長近(가나모리 나가치카)를 파견하여 히다
三木(미키)가를 멸망시키고,
마침내 29일에 삿사 나리마사도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이시다 미쓰나리, 기무라 히데토시와
잡병 38명을 동반했을 뿐인
비무장의 상태로
가게카쓰의 가신인 須賀修理亮이 지키는 에치고 코시미즈성 아래에 나타났다.
히데요시는 스가와 면식이 있는 기무라 히데토시를 통해 스가와 직접
만나,
가게카쓰와의 면담을 요구하였다.
당황한 스가는 즉시 가게카쓰에게 소식을 알리고 성내로 히데요시 일행을 맞아들였다.
스가는
가게카쓰에게 [만약 히데요시를 제거할거라면 주군의 손을 번거롭게 할 것이 없이
제가 직접 손을 쓰겠습니다.]라고 제안을 하였으나,
가게카쓰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미 천하의 권력을 잡은 히데요시가,
이 전국에서 가장 험한 곳의 하나라는
에치고까지 온 것은
지난 해 약조하고서 서로 의를 통하지 않았던 것과
이 가게카쓰가 비겁한 행동을 하지 않는 다고 믿고온
것이다.
그러한 것을 여기서 죽여 버린다면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것이 더럽혀질 것이다.
여기서는 그와 회담하고 소망대로 서로 의를
통하던지,
아니면 일단 그를 돌려 보낸 다음에 재차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가게카쓰는 直江兼續(나오에
가네츠구),
藤田信吉(후지타 노부요시), 泉澤久秀(이즈미사와 히사히데)등을 동반하고
70여명의 인원으로 코시미즈성으로
향하였다.
성내에서 통상의 인사를 주고 받은 후에
히데요시, 가게카쓰, 이시다 미쓰나리,
나오에 가네츠구의 네명만이
4시간에 이르는 밀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여기서 양자간에 무슨말이 오갔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때 정식으로 신종에 관해서
이야기를 주고 받았을 확률이 높다.
당시 서로간의 힘과 관직등의 차이는 확연하였고,
히데요시에게의 가게카쓰의 신종은 시간의 문제였던
예정된 수순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후에 크게 두각되는 두 인물의 첫 만남의 장이기도 했다.
이시다 미쓰나리, 나오에 가네츠구
모두 25살의 젊은이였다.
이 회담을 세상에서는 [코시미즈의 회담]이라고 부른다.
★히데요시에게의 신종
마침내 가게카쓰는 히데요시에게 신종하고
상경을 합니다.
히데요시는 이를 맞아 대환영 하였고,
이윽고 귀국한 가게카쓰는 시바타를 토벌하고,
사도 평정을 완수하고 에치고를 통일한다.
○히데요시에게의 신종
天正14(1586)년 5월, 가게카쓰는 4천의 군사를
인솔하고 상경의 길에 올라,
28일에 金澤(카나자와)에 들러 6월 7일에 입경한다.
그리고 14일에 히데요시를 알현한 후, 히데요시에
의해 從四位下左近衛權少將에 임명된다.
그리고 23일에 히데요시로 부터 佐渡(사도)에 관한 처분을 일임받고
귀국한다.
9월이 되자 우선은 시바타 시게이에 토벌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바타군의 저항은 완강하고 시게이에도 노련한 장수라 교착상태로 빠져든다.
이해, 12월 19일에 히데요시는
太政大臣에 오르고 豊臣氏를 일으킨다.
해가 바뀌어 天正15(1587)년 7월, 가게카쓰는 다시 시게이에
토벌의 군사를 일으켰다.
8월 시게이에 원조를 위해 會津(아이즈) 蘆名(아시나)가로 부터 원군이 오지만,
가게카쓰는 후지타 노부요시를
보내 이를 격파하고,
수급 2백과 59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는데 여기에는 조금 재미난 이야기가
남아있다.
생포한 사람중에 사무라이가 세 명 있었다.
이들을 통해 현재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시바타 성내에서는 식량이 동이나 아사하기 직전으로,
시게이에는 식량과 탄알, 철포등의 원조와 함께
군사의 원조도 들어와
우리들이 식량을 짊어지고 아이즈로 부터 직접 온 사람들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가게카쓰는,
[이 사람들을
처리하고 식량을 빼앗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러한 잔재루를 부리는 것은 점잖지 않다.
이들을 살려주고 식량을 가지고 성에 들어가게 해
주어라.
성을 점령하는 것은 상대의 강한면을 우리의 힘으로 부수어야만,
기분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말하며 세 명을
살려준 후 식량을 가지고 성으로 가게 하였다.
그러나, 성내에서는 이를 수상히 여겨
가게카쓰측의 계략이라고
믿고 그들을 붙잡아 참하고 말았다.
이를 들은 아이즈군이나 살해당한 사람들의 일족들은
모두 시게이에를 미워하고, 가게카쓰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10월 24일에 三條道如齋(信宗)의 五十公野城,
다음
25일에는 시바타성을 점령하였고 성주 시게이에는 자결하였다.
여기서 7년에 걸친 [시바타의 란]은
종결되었다.
○히데요시의 전국통일
天正16(1588)년, 가게카쓰는 재차 상경하여 從三位參議로
임명되고
히데요시로 부터 토요토미와 하시바의 성을 하사받았다.
이때, 가게카쓰의 수하인 나오에 가네츠구도 從四位下山城守로
임명되어
후에 천하에 이름을 알린 [直江山城]이 여기서 탄생한다.
히데요시는 이미 전년도에 시마즈 토벌을 끝내고 오다와라의 호조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가게카쓰는 이해 9월에 本庄繁長(혼조 시게나가)를 보내
데와를 공격하게 하는것 말고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그리고 天正17(1589)년 6월 12일, 가게카쓰는 사도로 건너가
本間三河守, 羽茂高持등을 토벌하고, 사도를
평정하였다.
그리고 10월, 호조 토벌의 구실을 찾고 있던
히데요시에게
정말로 안성맞춤의 사건이 일어났다.
10월 23일, 호조가의 가신 이노마타 구니노리가 사나가의 名胡桃城을 돌연 탈취한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이것에 격노하여 12월, 가게카쓰를 시작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토시이에등을 불러들여 호조 토벌의
작전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다음 天正18(1590)년 3월 1일, 히데요시는 전국의
영주들을 따르게 하고
자신도 3만여의 군사를 인솔하여 오다와라로 출발하여
총 병력 20만이 넘는 군사들로 오다와라성을
포위하였다.
가게카쓰도 정월 하순에 가스가야마를 떠나 마에다 토시이에들과
함께
차례로 호조가의 성들을 점령해 들어갔다.
3월 18일 우스이 고개를 넘어 고즈케로 침입하여 安中, 國峰, 廐橋의 각 성을
점령하고
4월 20일에 大道寺政繁(다이도지 마사시게)가 지키는 松井田城(마쓰이다성),
또 무사시로 침입하여 6월 14일에는 호조
우지쿠니가 지키는 鉢形城(하치가타성),
25일에는 八王子城(하치오지성)등을 연달아 점령하였다.
이런 싸움중에 후지타 노부요시나
甘糟淸長(아마카스 기요나가)등이 분전하였다.
호조 우지마사, 우지나오 부자는 7월 5일에 오다와라성을
명도하고
우지마사는 얼마뒤에 자결하고 우지나오는 이에야스의 사위인 점으로
목숨은 용서받고 코노야마에 유배되었다.
이 시점에서
사실상 히데요시는 마침내 전국통일을 완수한 것이다.
★에치고에서 아이즈로
가게카쓰는 조선출병 당시 그다지 크게 관여하지 않고,
내정의 충실에 힘을
쏟습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만년에 가게카쓰는
에치고에서 아이즈로 이봉됩니다.
○사도金山 지배의 위임
文祿元(1592)년 3월, 히데요시가 조선 출병을
단행하자
가게카쓰는 5천의 군사를 인솔하여 肥前(히젠) 名護屋(나고야)로 향하였다.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토시이에등과
나고야에 머무른채,
한 번 熊川(웅천)에 갔다온 후에는 별로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文祿3(1594)년 8월에 從三位權中納言에
임명되고,
9월에는 [定納 員數目錄]을 작성하여, 영토내의 내정 충실을 도모하였다.
이것은 영토내의 가신과 토지및 병역수를 집계한
것으로,
군정 양면에서 능률적으로 일을 실행하기 위한 기본 대장이었다.
즉 이시기, 가게카쓰는 전쟁보다는 내정에 힘을 쏟고
있었는데
중요한 것은 조선출병에 대한 군사를 착출을 위해
히데요시로 부터 에치고, 사도의 金山(금광)의 지배가 위임된
것이다.
실은 文祿3(1594) 12월, 상경한 나오에
가네츠구에게
오봉행의 淺野長政(아사노 나가마사)로 부터 이에 대한 사전통고를 받았고,
다음해 정월 17일, 히데요시는
가게카쓰에게
[나오에 가네츠구를 대관으로 하여 금은을 납입하라]라는 주인장을 내렸다.
즉시 나오에 가네츠구는 立岩喜兵衛, 志태修理亮(義秀)을 봉행에
임명하고
金山에 관한 법도 5개조를 발령하였다.
5월에 石見(이와미)로 부터 石田忠兵衛(이시다 츄우베)등이 와서
이와미에 있는
은광의 선진 기술을 전수하였다.
이것에 의해 사도의 금은광은 비약적으로 산출량이 높아져
慶長3(1598)년에 상납한 금액은 대형으로
8백매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히데요시로 부터 주인장을 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 2월
7일,
교토에서 한 인물이 죽었는데, 이것은 가게카쓰의 후반생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된다.
○에치고로 부터 아이즈로
그 인물의 이름은 蒲生氏鄕(가모 우지사토)라고 한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가 마음에 들어했던 용장으로 전공도 아주 높았다.
그는 히데요시의 정권하에서 오슈의 중요인물인 다테 마사무네의
견재역으로
會津(아이즈)에 배치되어 있었지만, 돌연 교토에서 급사하였다.
사인은 병사라고 하지만 불명확하여, 독살설이 재기되고
있다.
히데요시에 의한 독살설도 있는거 같지만,
이시다 미쓰나리와 나오에 가네츠구의 공모에 의한 독살설도 있다.
일의 진위가
어떳든 우지사토의 뒤를 이은 秀行(히데유키)에게는
요충지 아이즈의 통치는 과중했던 것 같아, 가신의 통솔에 문제가 발생하여
머지않아
下野(시모스케) 宇都宮(우츠노미야) 12만석으로 이봉되었다.
그리고 가게카쓰가 에치고에서 아이즈로 이봉된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때는 慶長3(1598)년 정월 10일의 일이었다.
이것에 의해 가게카쓰는 에치고, 사도 90여만석에서
일약 아이즈
120만석의 대영주가 되었지만 가게카쓰의 마음은 복잡하였다.
덧붙여 가게카쓰는 전년 6월 12일에 65세로
사망한
小早川隆景(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뒤를 이어 五大老에 올라있었다.
오대로는 이에야스, 토시이에,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와 가게카쓰였다.
겐신 이래의 에치고를 떠나는 것에 상당히 저항이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가게카쓰는 별다른 저항없이 아이즈로 옮겼다.
공식상의 이유는 가모 히데유키에게 아이즈의 통치를 맡길 수 없다는
판단과
다테 마사무네, 도쿠가와 이에야스 견제를 위한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거기에는 가게카쓰가 에치고에서 뿌리를 내려
더욱
강대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히데요시의 의향도
반영된 것이 아닐까 보여지기도 한다.
그리고 일년도 지나지 않은 얼마 후 시대는 다시 크게 움직이기
시작해,
일본 사상 최대의 싸움으로 향해 간다.
주목해야할 사람은 나오에 가네츠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