宇喜多直家[우희다직가](우키타 나오이에)
~血塗られた策謀家(피에 물든
책모가)~
浦上(우라카미)가를 섬기며 몰락하고 있던 우키타가를 재흥 해
모략,
암살등 모든 수단을 가지고 세력을 확대해 간
희대의 모략가 우키타 나오이에라고 하는 인물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는가?
우키타 나오이에는 砥石(토이시)성에서
宇喜多興家(우키타 오키이에)의 장자로 태어난다.
6세의 무렵,
島村豊後守(시마무라 분고수)의 야습에 의해 토이시성은 낙성.
조부 能家(요시이에)는 자결 하고,
아버지 오키이에와 함께 비젠 후쿠오카로 피신한다.
이 6세의 무렵의 체험은
후의 나오이에 삶의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후, 호상 阿部善定(아베 젠죠)의 비호를 받지만,
天文 5년(1536) 오키이에가
병사하자, 젠죠의 곁을 떠나
笠加村에 사는, 백모인 비구니에게 거두어 졌다.
天文 12년(1543)의 8월, 가문으로 돌아오는 것이
발아들여져
天神山(텐진야마)성의
浦上宗景(우라카미 무네카게)를 섬기게 된다 .
당초는 소나 돌보는 사람이었지만, 차례차례로 군공을 세우고
원복시
宇喜多三郞左衛門直家(우키타 사부로 사에몬 나오이에)로 칭했다.
乙子(오토고)성 성주가 된 나오이에지만, 오토고 마을은 吉井(요시이) 강의
하구에 있어, 서쪽의 細川(호소카와)가, 북쪽의 松田(마츠다)씨,
瀨戶內海(세토나이카이)의 해적이라고 하는
세방면의 적에게 둘러싸여 안정되지
않은 우라카미가의 최전선이 맡겨졌다.
그러나 나오이에의 수하들인 戶川秀安(토가와 히데야스),
長船貞親(오사후네 사다치카), 岡利勝(오카 도시카츠),
花房正幸(하나부사 마사유키)등이 힘을 합해 오토고성을 지켜냈다.
나오이에는
방어전만 했던 것이 아니라
오토고성으로부터 군사를 내어 적지를 침략하며 갔다.
나오이에의 피로 물든
생애는 이제부터 시작된다.
나오이에가 최초로 표적으로 한 것은, 우라카미의 중신인 마츠다씨였다.
우선,
마츠다씨의 중신 宇垣(우가키)씨를 암살한 다음에
마츠다씨 성에 기습을 걸어, 그 영지를 빼앗아 버렸다.
나오이에의 모략이 꽃 피기
시작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급격한 세력의 확대는 빈궁을 가져왔다.
요시이에 시대의 가신들과
영지 이상의 병졸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식량이 부족하였다,
히데야스, 사다치카, 도시카츠등을 시작으로 가신들
모두
스스로 경작 하여 그것을 식량으로 했고
적지에 밤도둑, 약탈등을 하여 식량을
저축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식량이 부족하면 모든 가신 일동이,
1개월에 몇차례는 절식했다고 한다.
이것은 나오이에의 모략가와는 다른
일면인가,
그렇지 않으면 냉철하게 계산된 행위였던 것일까?
어떻든 나오이에는 이
오토고성 시대의 빈궁을 이용해,
가신단과의 결속을 높이는 것에 성공했던 것이다.
다음의 표적은, 아내의 친가인 中山(나카야마)씨였다.
우라카미씨에서는
中山備中守(나카야마 빗츄수)의 세력이 증대하고 있어,
우라카미 무네카게는 나오이에에게 나카야마를 토벌하는 것을 명했던 것이었다.
그 명령을 나오이에는 승낙한다.
나오이에가
이것을 승낙하는 조건으로서 제시한 것이,
조부의 원수인 시마무라 분고수의 살해였다.
나오이에는 나카야마 빗츄수를 술자리에 불러,
척살.
시마무라 분고수도 꾀어내 죽여, 결국 조부의 원수를 갚는 것을 완수한다.
하지만 아내는 자결해버린다.(비구니가 되었다고도
말해진다.)
이 이후, 나오이에는 모략의 귀신이 된다.
이렇게 해서 나오이에는 시마무라 분고수, 나카야마 빗츄의 영지의 대부분이 증가되어
토이시성은 막내 아우 春家(하루이에)에게 지키게 하고
나오이에는 奈良部山城 으로부터 沼城으로 옮긴다.
비옥한 토지를 손에
넣은 나오이에는 우라카미가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어
점차 宗景(무네카게)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나오이에 독단으로 군사를 각지에 움직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나오이에의 모략은 가속한다.
우선, 미마사카 반국을 지배하던
後藤美作守(고토 미마사카노카미)를 암살.
고토 미마사카노카미는 나오이에의 두번째 아내의 아버지였다.
얼마 뒤 이 아내도
죽었다.(자결이라고도, 병사라고도 한다.)
거기에 미마사카의 나머지 반을 가지고 있던
谷川久隆(타니가와 히사타카)도 암살해,
미마사카 통일을 완수한다.
이미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략은 계속 된다.
다음 되는 표적은 주가인
우라카미가였다.
나오이에는 처음에 무네카게를 부추겨 무네카게의 동생이기도 한
岡山(오카야마) 성주 金光宗高(카네미츠 무나다카)를
모반의 죄를 씌워 암살.
그리고, 이웃 播磨(하리마)의 赤松(아카마츠)씨를 이용해
스스로 손대는 일 없이 텐진야마성의 무네카게를
토멸해
하리마로 추방 하게 한다.
1577년. 나오이에는 매부인 龍ノ口(타츠노쿠치) 성주 撮所元常을 자객을 보내
암살.
미마사카로 공격해 온 三村家親(미무라 이에치카)를 저격수를 보내어 사살.
복수하러 온 이에치카의 적남 元親(모토치카)도 내응을
이용해, 가볍게 일축 하였다.
그리고 마무리로 무네타카의 토멸로 용무가 끝난 아카마츠씨도 내쫓아
감쪽같이 備前(비젠)을 수중에
넣었다.
이렇게 갖은 모략으로 비젠, 미마사카 2국의 영주가 된 나오이에지만
이윽고
주고쿠 지방을 공략하러 온
오다가의 부장 羽柴秀吉(하시바 히데요시)에개 항복한다.
원래 나오이에는
모리가에 속하고 있었지만, 모리와의 관계를 끊고
1579년, 오다가의 부하에게 들어간다.
너무도 기민한 나오이에의 변신의 속도였다.
그러나 나오이에는 그 즈음 병에 걸려 天正 9년(1581)에 죽는다. 향년
53세.
모략과 암살 투성이의 생애였다. 나오이에는 동생들도 믿지 않았다고 한다.
나오이에는 전장에 거의 출진하는 일 없이 세력을
확대해 간 희귀한 무장이었다.
자기의 세력 확대를 위해서라면, 친척이든 주군이든 모두 죽였다.
이 정도의 모략을 구사한 무장은,
전국시대에도 그 수가 많지않다.
상속자를 이은 秀家(히데이에)는 나오이에의 3번째 아내의 아이였다.
이
3번째의 아내는 2번째의 아내의 여동생으로,
어릴 적부터 자신의 손으로 길러,
성장하는 것을 기다려 아내로
삼았다고 한다.
속죄를 위한 것이었던가는 확실하지 않다.
나오이에 사후, 적남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아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어
히데요시 정권의 오대로에게까지 오르지만,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에 패해 57만석의 영주에서 유배되는 처지로 몰락한다.
여기서
우키타 가문은 나오이에 사후 불과 일대만에 소멸한다.
그런데 히데이에가 죽지 않고 끝난 것은, 그의 성실한 성격 덕분이라고
한다.
각박하지 않으면 전란의 세상에서 살아 남을 수 없었던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성격이었던 것이
히데이에 자신의 생명을 지켰던
것이다.
유배처가 된 八丈島(하치죠지마)에서, 히데이에는 결코 생활은 편하지
않았지만
두 명의 아들과 종자에 둘러싸여 온화하게 살다가 조용하게 죽었다. 향년 84세.
이러한 온화한 생활이야말로, 나오이에가
바라고 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일까?
나오이에의 법명은 凉雲院天德星友居士.
이 법명만
보면 이 인물이 피로 물든 생애를 살았다는 것을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