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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伊達家(다테가) 무장 原田宗時(하라다 무네토키)

작성자odayusi|작성시간06.03.08|조회수394 목록 댓글 0

 

          

 

 

原田宗時[원전종시]
하라다 무네토키(1565~1593)
------혈기의 무네토키, 미숙함을 깨닫고 노부야스와 친교하다------

 

山嶺源一郞의 아들이었지만 1582년 백부 原田大藏宗政가
소마가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뒤 가문을 상속하였다.
1585년 낭인인 平田(히라타)를 이용해 아시나가의 무장을 내응시켜
아이즈를 공격했지만 히라타가 적군에 가담하는 바람에 패배하였다.
하라다는 고토 노부야스가 자신을 비웃은 것에 화를 내며 결투를 신청했지만
노부야스는 두 명이 싸워 죽는 것은 나라의 손실로 나라를 위해서 싸우다 죽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 하라다는 자신의 미숙함을 깨닫고 노부야스와 친교를 다지게 되었다.

1585년 刈松田에 출진하여 오우치 사다쓰나에 대비하였다.
그후 本宮(모토미야) 방면에 출진하여 사타케, 이와키 연합군에 대비하였다.
1588년 郡山(코오리야마) 전투에서는 評定衆으로 활약하였다.
1592년 하라다는 임진왜란 출병식에서 대칼을 짊어지고

쇠사슬로 묶어 다테군의 제1진을 장식했다.
그러나 다음 해 부산에서 병을 얻어 대마도까지 돌아왔지만 거기서 사망하였다.
무네토키의 손자인 原田甲斐守宗輔는 伊達騷動[다테소동]의 중심적 인물로
이 사건으로 하라다가는 단절되었다.


 

伊達騷動(다테소동)과 原田甲斐(하라다 카이)의 妻(처)

 

原田甲斐(하라다 카이)의 아내가 水澤(미즈사와)에 매장된 경위는 寬文년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쿠로타, 나베시마와 함께 3가의 소동이라고 하는 [다테소동]이 그것이다.

 

1660년 센다이번 3대인 伊達綱宗은 방탕한 생활로 은거를 명령받아
불과 2살의 나이인 龜千代(4대 綱村)이 상속자를 잇게 되었다.

그러나 너무 어렸기 때문에 실직적으로는 도쿠가와 막부의 감독하에 들어갔고
후견역으로는 다테 마사무네의 아들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伊達兵部宗勝과 田村右京宗良이 맡았다.
후견이 된 伊達兵部는 一關에 3만석, 田村右京도 岩沼에 3만석을 각각 가지고 있었다.
세력이 비슷했던 후견과 봉행과의 권력싸움은 봉행간의 분파 권력 싸움으로 발전하였고
伊達兵部의 독벌체제에서 형제 자매의 문벌 싸움으로 퍼져나갔다.

 

寬文(간분 6년) 1666년 의사 河野道円의 刎首 사건은
연극이나 이야기등을 통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어져 伊達兵部의 영지가 몰수되고
龜千代의 독살 미수 사건등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寬文(간분 8년) 1668년 번내의 항쟁은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6월 6일 二鄕村의 늪의 습지 귀속권을 두고 登米(토요마)의 伊達式部宗倫과
涌谷의 伊達安芸宗重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 伊達安芸가 막부에 상소하였다.

이때 검시관으로 伊達式部(다테 시게부)에게 2/3, 伊達安芸(다테 아키)에게 1/3로
조정을 한 이가 위법 감찰 무사직의 橫山彌次右衛門(요코야마 미지에몬)이었다.

 

다테소동은 寬文(간분 11년) 1671년 3월 27일 클라이막스를 맞게된다.
二鄕村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던 이들은
酒井雅樂頭 忠淸邸, 柴田外記, 原田甲斐, 古內志摩, 伊達安芸 였다.
그 때 갑자기 하라다 카이가 호신용 단도로 다테 아키를 참살하고
柴田, 古內, 蜂谷六左衛門등이 하라다 카이를 참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사후처리가 시작되었다.
하라다 카이의 육친들이 가장 가혹한 처분을 받아
자식들은 할복하고 어머니는 10일간 굶겨 죽게 만들었다.
아내의 남동생인 津田景康은 악인 취급으로

逼塞(힛소쿠-구금형의 일종)을 명령받아 佐沼(사누마)로
津田豊前의 딸인 카이의 아내는 水澤(미즈사와)에 위탁이 되었던 것이다.

 

하라다 카이의 아내를 맡은 이는 미즈사와의 3대 伊達上野宗景(다테 무네카게)였다.
무네카게는 미즈사와 2대 宗直과 涌谷伊達氏의 딸을 어머니로 1650년 미즈사와에서 태어났다.
무네카게는 미남이라는 평판이 있었는데, 젊은 날 에도에서 한명의 공주를 사랑하게 되었다.
무네카게의 상대는 가문의 격이 너무 다른 큐슈의 대 가문인 쿠로다가의 삼녀 戀(에츠코)였다.
그 때문에 에츠코는 일단 松平(마츠다이라)가의 6번째 양녀가 되고
寬文(간분 8년) 1668년 7월 약혼이 인정되어 다음 해 9월에 결혼하기에 이른다.
이 일을 위해서 伊達安芸宗重가 움직여 다테 아키는 간분 사건의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이다.

이 혼인도 포함해 미즈사와와 간분 사건과는 깊은 인간 관계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무네카게는 다테 아키의 유일한 여동생의 아들로 조카에 해당하고
14세에 가문을 이은 무네카게의 후견인이기도 하였다.
에츠코에 있어서도 다테 아키는 義理(의리-남남끼리 혈족과 같은 관계를 맺는 일)의 숙부가 된다.
간분 사건을 둘러싼 복잡한 계보 안에서 하라다 카이의 아내가 미즈사와에 맡겨진 것이다.

 

하라다 카이의 아내는 津田重康(츠다 시게야스)의 딸로 센다이번 봉행인 津田景康의 누나이다.
津田景康(츠다 가케야스)는 가사이, 오사키 반란때 佐沼(사누마) 공격에 공적이 커
마사무네의 신뢰도 두텁고 평생 사누마의 요지를 영지로 하였다.

酒井邸의 칼부림 사건 뒤 寬文(간분 11년) 1671년 6월 9일
하라다 카이의 아내는 미즈사와에 맡겨졌다.
1689년 4월 2일 사망하여 瀧野(다키노)가의 묘지내에 묘비가 지어졌다고 한다.
역신 취급을 받았다 해도 센다이번 봉행인

하라다 카이의 아내로서 조심스럽게 매장되었다고 한다.

하라다 카이의 아내를 맡은 미즈사와 3대 무네카게는 1675년 천연두에 걸려 26세에 죽었다.
그 다음해 아내 에츠코도 24세의 나이로 죽고만다.
무네카게에게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센다이 3대인 伊達綱宗의 차남이 미즈사와 다테가를 상속하여
顯孝로 칭하고 무네카게 사후 하라다 카이의 아내를 계속 맡게 되었다.
연령의 차이를 떠나 타향의 땅에 매장해진 다테가의 비운의 아내들의 땅이 미즈사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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