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한국사와 세계사

채헌과 석문구곡

작성자돌삐|작성시간26.06.17|조회수24 목록 댓글 0
성명생몰연대(나이)국왕과거시험연도. 나이
채익하주암1633∼1676(43)인조·효종·현종·숙종생원시 합격1673. 40세
권상일청대1679∼1759(80)숙종·경종·영조문과 합격1710. 31세
채헌근품재1715∼1795(80)숙종·경종·영조·정조생원시 합격1738. 38세

 

= 채헌과 석문구곡 그리고 주암정, 우암정 =

 

 

구사일생(九死一生)처럼 ‘구(九)’에는 아홉이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많다’, ‘여러 번’이라는 속뜻도 함께 담겨 있다. 구곡(九曲)은 굽이굽이 많이 휘돌아 흐르는 모습을 이른다. 석문(石門. 돌문)은 문처럼 돌이 우뚝 솟아 있는 경관을 말한다. 높은 봉우리와 기암괴석이 마주 서 있어 마치 하나의 문처럼 보이는 절경을 석문이라 한다.

 

따라서 석문구곡(石門九曲)은 문처럼 솟은 기암괴석 사이로 계곡과 물길이 굽이굽이 흐르는 아름다운 경관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에는 단순한 자연경관의 의미만 담긴 것이 아니다. 자연 속에서 심신을 수양하고, 풍류를 즐기며 살아가던 선비 문화의 정신도 함께 스며 있다.

 

성명(姓名. 성과 이름)은 부모나 조부모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성(姓)은 조상으로부터 이어받는 것이므로 함부로 바꿀 수 없었다. 이름만 새로 짓는 것이다. 근대 이전 사회에서는 성명에 그 사람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 여겨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걸 피휘(避諱) 또는 기휘(忌諱)라고 한다.

 

자(字)는 본이름 대신 부르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 대체로 성년이 된 뒤 본인이나 웃어른이 지어주었다. 호(號. 당호·별호)는 본명이나 자 외에 쓰는 이름이다. 자신의 삶과 학문, 정신세계를 담아 짓는 경우가 많았다. 호는 자신이 짓기도 하고, 친구나 스승이 지어주기도 했다. 그래서 호는 그 사람의 또 다른 정신적 얼굴이라 할 수 있다.

 

채헌 선생의 자는 계징(季澄. 끝 계, 맑을 징)이고, 호는 근품재이다. 그는 자신의 자 속에 삶의 뜻을 담아두었던 것 같다. 끝까지 석문구곡처럼, 금천처럼, 대하리천처럼 맑게 살아가겠다는 다짐 말이다. 석문정을 중심으로 가족과 친구, 지인들과 어울려 시를 짓고 풍류를 나누며 물처럼 맑게 살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그는 그렇게 살다 간 사람처럼 보인다. 여든의 삶을 살아내는 동안 그의 삶은 이름처럼 맑게 흐른 듯하다.

 

근품재라는 그의 호는 채씨 집성촌의 뒷산인 근품산(近品山)에서 끌어온 것으로 보이지만, 본인이 좋은 인품(人品.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近. 가까이) 집(齋)과 같은 존재가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지은 건 아닐까 추론하는 것은 억척일까?

 

 

 

근품재 채헌 선생은 청대 권상일 선생의 영향을 받았다. 두 분은 같은 지역 출신(1914년? 지금의 산북면은 상주에서 문경군으로 편입되었다)이고, 비슷한 시대를 살았다. 또한 학문적으로 퇴계 이황 선생의 계보를 잇는 영남남인이었다. 근품재와 청대 선생은 학연과 지연이 같은 인물이었다.

 

청대와 근품재는 동시대를 살았다. 청대 권상일(1679~1759)은 여든 살까지 살았다. 숙종·경종·영조 연간이다. 근품재 채헌(1715~1795)도 여든 살까지 살았다. 숙종·경종·영조·정조 연간이다. 두 사람의 나이는 서른여섯 살 정도의 차이였다. 같은 시대를 산 것이다.

 

사화(士禍)는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충돌이었다면, 붕당 정치는 사림세력 내부의 권력 다툼이었다.

 

붕당(朋黨)은 생각과 학문, 정치 노선과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이 만든 정치 집단을 말한다. 朋(붕)은 뜻이 같은 벗을 말한다. 黨(당)은 무리와 정치 집단을 뜻한다. 곧 붕당은 같은 학문과 정치 철학을 가진 선비들의 집단이었다. 오늘날의 정당과 비슷한 점도 있지만, 성리학적 학맥과 사상적 색채가 훨씬 강했다.

 

처음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이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북인은 인조반정을 계기로 급속히 몰락했다. 그 뒤 조선 후기 정치는 노론·소론·남인의 대립 속에서 전개되었다. 대체로 세력이 가장 강했던 쪽은 노론이었다. 남인과 소론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때로는 서로 손을 잡기도 했다.

 

현종과 숙종 대에는 예송논쟁과 환국이라는 형태로 붕당 간의 치열한 정치 싸움이 벌어졌다.

 

예송(禮訟)은 왕실의 상복과 예법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다. 禮(예)는 예법과 질서를 뜻한다. 訟(송)은 다툼과 송사를 뜻한다. 겉으로 보면 예절 문제 같지만, 실제로는 왕통의 정통성과 정치 권력을 둘러싼 싸움이었다.

 

예송 논쟁은 서인과 남인이 주도했다. 현종이 어느 쪽의 예 해석을 국가 기준으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정치 권력의 주도권도 달라졌다.

 

1차 기해예송(1659) 때는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서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2차 갑인예송(1674) 때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남인이 권력을 장악했다.

 

반면 환국(換局)은 숙종이 주도한 정치 권력 재편이었다. 換(환)은 바꾼다는 뜻이다. 局(국)은 정치판과 정국을 뜻한다. 곧 환국은 정치판 자체를 통째로 뒤집는 것을 말한다.

 

숙종은 특정 붕당이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서인과 남인을 번갈아 등용하거나 축출했다. 어떤 때는 서인을 중용했다. 다시 남인을 등용했다. 또다시 서인을 복귀시켰다. 그렇게 정국을 급격히 뒤집었다. 그래서 이를 환국 정치라고 한다.

 

대표적인 환국은 다음과 같다.

 

* 경신환국(1680) : 서인 집권

* 기사환국(1689) : 남인 집권

* 갑술환국(1694) : 서인 재집권

 

숙종이 이렇게 환국 정치를 펼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붕당 중심의 신권(臣權)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붕당들이 서로 견제하게 만들고, 최종 결정권은 국왕 자신에게 집중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피비린내 나는 정치 투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유배를 갔다. 벼슬을 빼앗겼다. 사약을 받았다. 붕당 간의 적대감은 깊어졌다. 정치적 원한은 대를 이어 이어지기도 했다.

 

서인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송시열은 기사환국 때 사약을 받았다. 남인의 대표 학자였던 윤휴는 경신환국 뒤 사사되었다. 허목 역시 유배 생활 끝에 생을 마감했다.

 

결국 조선 후기의 붕당정치는 단순한 패거리 싸움만은 아니었다. 그 속에는 성리학적 명분과 왕권, 신권, 정치 철학과 권력 욕망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겉으로는 예(禮)를 말했지만, 그 속에서는 권력이 움직이고 있었다.

 

예송, 환국 형태의 권력 다툼 속에서 왕위에 오른 사람이 경종과 영조였다. 경종은 숙종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장희빈이었다. 반면 영조는 숙종의 둘째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였다.

 

남인과 소론은 경종을 지지했고, 영조는 노론 세력의 지지로 왕위에 올랐다. 영조의 정치적 기반은 노론 세력이었다. 그런데 병약한 경종이 죽었다. 영조가 왕위에 올랐다. 이인좌 등의 남인 세력은 소론 세력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인좌의 난(1728)이다. 이인좌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남인 세력과 소론에 대한 피바람이 불었다.

 

남인과 소론 세력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때 집권하기도 했지만, 조선 후기의 정치적 주도권은 대체로 노론 세력에게 있었다. 노론 세력에 의한 일당독재가 세도정치인 것이다.

 

아들 사도세자가 소론 세력의 지지를 받자, 아들을 죽였다. 소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인조,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음을 증명한다고 할까?

 

주암정(舟巖亭)은 주암(舟巖) 채익하(蔡翊夏, 1633∼1676) 선생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정자이다. 채익하 선생은 조선의 인조·효종·현종·숙종 연간에 살았던 인물이다. 기록에 따르면 현종 때 생원시에 합격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은 크게 문과·무과·잡과·생진과(생원시. 진사시)로 구분했다. 생진과는 소과라고 하며, 문과는 대과라고 했다. 문관을 뽑는 문과가 가장 중시되었다.

 

문과는 문관을 뽑는 시험으로 소과에 합격한 사람은 문과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되었다. 소과에 합격하지 않아도, 성균관을 졸업자나 그 밖의 방법으로 문과에 응시하는 경우가 있었다. 따라서 소과 합격의 여부가 문과 응시의 필요조건은 아니었다.

 

생진과에 합격하고 낮은 관직에 진출하는 사례도 있었지만 흔한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생진과는 관리를 선발하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성균관 입학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시험이었기 때문이다.

 

생원시는 유교 경전 시험이었다. 진사시는 글짓기 시험이었다. 소과는 문과의 예비시험이 아니었다. 소과의 원래 목적은 성균관 입학 자격 부여였다. 조선 후기에는 소과의 응시와 합격이 관직 진출보다 양반 가문의 명예를 위한 것이 많았다. 조선 후기의 생원·진사시는 벼슬길의 출발점이라기보다, 선비로 인정받기 위한 명예의 관문이었다. 소과는 초시와 복시가 있었다. 초시는 각 도나 한성에서 치렀고, 복시는 한성에서만 보았다. 원칙적으로는 생원과에 100명, 진사과에 100명 선발이 기준이었다.

 

생원시는 사서오경(四書五經) 등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와 해석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었다. 진사시는 글짓기 능력을 평가했다. 시(詩)는 한시, 부(賦)는 사물과 생각을 길고 화려하게 풀어낸 산문 형식의 글, 책문(策問)은 나라의 문제와 정책에 대한 해결책을 논리적으로 서술하는 논술시험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문장력과 글재주를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진사시를 높게 평가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과는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초시는 1차 시험, 복시는 초시 합격자를 대상으로 한 2차 시험이었다. 문과의 실제 합격 여부는 복시에서 결정되었다. 전시는 임금 앞에서 치르는 최종 시험으로, 합격자의 등수를 정하는 시험이었다. 전시의 성적은 이후 관직 생활과 승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주암 채익하 선생과 근품재(近品齋) 채헌(蔡憲) 선생은 모두 소과(생원시)에 합격한 인물로 전해진다. 연대로 보면, 주암 채익하(1633∼1676)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3년 후에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1679∼1759) 선생이 태어났다. 또 청대 선생이 36세 되던 해에 근품재 채헌(1715∼1795) 선생이 태어난 셈이 된다.

 

청대 선생은 1738년 낙향한 적이 있음. 그 당시 근품재 선생의 나이는 24세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대 선생과 근품재 선생의 나이 차이는 36세 정도이다. 청대 선생은 75세에 병조참판(국방부 차관)을 역임했다.

 

인조반정으로 북인은 정계에서 완전히 몰락했다.

인조와 효종 시기에는 대체로 서인이 정국을 주도했다.

현종 때에는 두 차례의 예송 논쟁을 거치며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집권했다.

숙종 때에는 세 차례의 환국이 일어나며 서인 → 남인 → 서인(이후 노론·소론 분화) 순으로 정권이 급격히 교체되었다.

경종 때에는 신임사화를 거치며 소론이 잠시 정권을 잡았다.

영조 때에는 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노론이 대체로 집권했으나, 영조의 강력한 탕평책으로 소론과 남인도 일부 정계에 참여했다.

정조 때에도 여전히 노론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이었으나, 정조는 국왕 중심의 탕평책을 통해 남인과 소론 계열의 인재들을 파격적으로 등용하여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순조·헌종·철종 3대 60여 년간은 노론 계열의 특정 가문(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에 의한 세도정치가 이어지면서 노론 외척이 권력을 독점했고, 남인과 소론은 중앙 정계에서 사실상 괴멸되었다.

 

남인은 크게 근기남인(경기도 일대)과 영남남인(경상도 일대)으로 구분되었다.

중앙 정계 진출이 사실상 막힌 근기남인은 대체로 실학과 국학 연구에 몰두하며 사회 모순을 해결할 새로운 길을 찾고자 했다.

반면, 마찬가지로 정계 진출이 어려워진 영남남인은 퇴계학을 바탕으로 한 경학 연구에 매진하는 한편, 향촌 사회에서 서원 등을 통해 후진을 양성하며 학문적 정통성을 지켜나갔다. 이들은 대과(문과)를 통한 중앙 관직 진출 대신, 생원진사시(소과) 합격을 통해 양반 유생으로서의 최소한의 위신을 유지하기도 했다. 또한 향촌에 정자를 세워 주변 인물들과 교류하며 정보를 교환하고 시문학을 즐겼는데, 이는 단순한 유희를 넘어 향촌 사회에서 양반으로서의 결속력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청대 선생은 1738년 낙향한 적이 있음. 그 당시 근품재 선생의 나이는 24세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대 선생과 근품재 선생의 나이 차이는 36세 정도이다. 청대 선생은 75세에 병조참판(국방부 차관)을 역임했다.

 

인조반정으로 북인은 정계에서 완전히 몰락했다. 인조와 효종 시기에는 대체로 서인이 정국을 주도했다. 현종 때에는 두 차례의 예송 논쟁을 거치며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집권했다. 숙종 때에는 세 차례의 환국이 일어나며 서인 → 남인 → 서인(이후 노론·소론 분화) 순으로 정권이 급격히 교체되었다.

 

경종 때에는 신임사화를 거치며 소론이 잠시 정권을 잡았다. 영조 때에는 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노론이 대체로 집권했으나, 영조의 강력한 탕평책으로 소론과 남인도 일부 정계에 참여했다. 영조 때 있었던 이인좌의 난은 남인을 거의 재기 불능에 가깝게 만들었다. 청대 선생은 이인좌의 난의 진압에 이바지한 공로로 영남남인 계열 가운데서 특이하게 정계에 살아 남았다. 아마도 영조의 탕평책의 여파도 있었을 것이다.

 

정조 때에도 여전히 노론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이었으나, 정조는 국왕 중심의 탕평책을 통해 남인과 소론 계열의 인재들을 파격적으로 등용하여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순조·헌종·철종 3대 60여 년간은 노론 계열의 특정 가문(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에 의한 세도정치가 이어지면서 노론 외척이 권력을 독점했고, 남인과 소론은 중앙 정계에서 사실상 괴멸되었다.

 

남인은 크게 근기남인(경기도 일대)과 영남남인(경상도 일대)으로 구분되었다. 중앙 정계 진출이 사실상 막힌 근기남인은 대체로 실학과 국학 연구에 몰두하며 사회 모순을 해결할 새로운 길을 찾고자 했다.

 

반면, 마찬가지로 정계 진출이 어려워진 영남남인은 퇴계학을 바탕으로 한 경학 연구에 매진하는 한편, 향촌 사회에서 서원 등을 통해 후진을 양성하며 학문적 정통성을 지켜나갔다. 이들은 대과(문과)를 통한 중앙 관직 진출 대신, 생원진사시(소과) 합격을 통해 양반 유생으로서의 최소한의 위신을 유지하기도 했다.

 

또한 향촌에 정자를 세워 주변 인물들과 교류하며 정보를 교환하고 시문학을 즐겼는데, 이는 단순한 유희를 넘어 향촌 사회에서 양반으로서의 결속력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주암 선생과 근품재 선생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향촌에 묻혀 유유자적하면서도 유학자로서의 지조와 학문적 깊이를 지키며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당시 영남남인들은 숙종 때의 환국과 영조 때의 이인좌의 난을 거치면서 중앙 정계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그래서 과거 시험(대과)을 포기하거나 낙방해도, 향촌에서 정자를 짓고 시를 읊으며 유교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힘썼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