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은 신라 삼국통일의 관문(關門)이었다.

작성자돌삐|작성시간26.06.17|조회수23 목록 댓글 0

 

제목  :  문경은 신라 삼국통일의 관문(關門)이었다.

 

 

문경문학아카데미조향순 원장께서 어느 날 지나가는 말투로 산북면 내화리에 잘생긴 3층 석탑이 있는데 왜 관리가 잘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선 또 산북면 소야리에 돌탑이 무너진 게 있는데 그냥 두는 것 같아 마음이 좀 그래요.” 했다. 나는 그래요? 하면서도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또 한번은 주암정사랑회정창식 회장과 차를 마시는 기회가 있었는데, 정 회장께서 산북면 서중리에 도천사지라는 절이 있었고, 그 절터에 3층 석탑이 무려 3기나 있었다는데, 우리나라에 드문 사례라서 참 궁금합니다. ”라고 했다.

 

두 분은 무너진 탑의 관리 소홀과 한 사찰에서 세쌍둥이 석탑 3기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 궁금해했지만, 나는 그보다 이렇게 큰 규모의 사찰과 그에 상응하는 탑이 이곳에 왜? 하필 존재했을까에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내가 가진 의문을 푸는 과정에 두 분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존재하길 바라며, 자료를 찾고, 이 분야에 앞선 지식이 있는 분께도 여쭤봤다. 그 과정에 필자가 내린 잠정적인 결론은, 도천사지(영원사지. 산북면 서중리)와 미면사지(산북면 소야리)진호사찰(鎭護寺刹)’일 개연성이 크다는 점이다.

 

문경의 대표적인 사찰 대승사와 김룡사도 진호사찰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진호(鎭護)는 난리를 진압하고 나라를 지킨다는 뜻이다. 밖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고, 안으로 반란 등을 진압하여 왕실을 지키는 역할을 했던 사찰이 진호사찰이다. 호국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은 국가 차원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다. 삼국의 불교는 호국불교였다. 호국불교사상은 불력(佛力. 부처의 힘)으로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킨다는 불교사상이다. 왕을 지키는 것은 부처를 지키는 일이었다. 진흥왕은 고구려에서 신라로 귀화한 승려 혜량을 신라의 국통(國統)으로 삼았다. 국통은 왕을 대신해서 신라의 모든 승려와 사찰을 관리·감독하던 불교 최고 책임자라고 할 수 있다. 국통 밑에 주통(州統)과 군통(郡統)이 있었다. 통일 이전에 신라는 산성에 근간을 둔 지방행정제도인 주··현제를 실시했다.

 

신라는 왕을 중심으로 중앙과 지방 모두, 군사·행정 시스템과 종교(불교) 시스템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통치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 따라서 고대 문경지역에 존재했던 계립령로(鷄立嶺路. 하늘재길)와 적성로(赤城路. 벌재길) 그리고 금천과 영강, 그 주변의 산성과 사찰을 살피고자 한다. 참고로 이도학 교수에 따르면 벌재를 한역한 것이 적성(赤城. 붉을 적, 재 성)’이라고 한다. 동로면의 면 소재지는 적성리이다. 충북 단양군에는 적성면이 있고, 단성면에 적성산성이 있고, 적성산성 안에 단양신라적성비가 있었다.

 

적성은 문경이 먼저 사용한 단어다. 진흥왕의 신라군은 소백산맥을 넘어, 남한강 유역의 단양을 점령하고 그곳에 적성산성을 쌓아 고구려와 백제의 남진에 대비했다. 삼국시대 계립령로·적성로·저수령로·죽령로는 소백산맥을 넘는 대표적인 남진의 통로였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국경의 요충지()에 설치했던 시설을 관방(關防)시설이라 한다. 대표적인 관방시설은 산성(山城)이다.

 

삼국시대에 지금의 문경은 신라의 영토였다.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펴, 죽령 동쪽 소백산맥 이남 영덕까지 통치권을 행사할 때도 문경은 고구려의 지배권 밖에 있었다. 지금의 저수령(예천군 효자면에서 단양군 대강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부근을 경계로 예천과 문경은 신라의 영토였다. 역사에서 가정(만약)은 필요 없지만, 만약 문경이 고구려의 지배권 아래 들어갔다면 신라의 수도 서라벌(경주)은 안전을 보장받기 힘들었을 것이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여러 이유 중의 하나가 문경이 신라의 영토로 남아 있었기에, 고구려 세력을 소백산맥 이북으로 몰아낼 수 있었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진흥왕 때 신라군은 적성로(벌재)를 넘어서 단양을 점령하고, 단양을 발판으로 충주를 포함한 한강 상류 지역을 장악했고, 나아가 백제와 싸워 한강 하류까지 점령(553)할 수 있었다. 그걸 진흥왕이 직접 확인하고 기념한 비석이 진흥왕의 북한산순수비이다. 신라 삼국통일의 본격적인 시작은 신라군이 문경 동로에서 적성로를 넘어 단양을 점령한 것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신라가 통치하던 소백산맥 이남의 문경지역은, 오늘날 한반도의 휴전선에 비유할 수 있다. 국경이고 변경(변방)이고 최전방이고 최전선이었다. 문경이 없는 신라는 입술이 없는 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진흥왕의 신라군은 일차적인 목표인 단양을 차지하기 위해, ‘적성로(625m)’를 지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죽령로(689m)는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었고, 저수령로(850m)는 고도가 높고, 계립령로(520m)는 단양과 거리가 좀 멀었다. 물론 단양을 공격할 때, 신라군이 적성로만으로는 가진 않았겠지만, 주력 부대는 적성로를 넘어갔을 개연성이 크다고 본다.

 

정리하면, 신라는 교통로를 따라 군사적 요충지마다 산성을 쌓고, 그것을 진호하는 사찰을 세워 지원하게 했다. 진호사찰 승려의 일부는 승병(僧兵. 승군)이었을 수 있다. 삼국시대에도 승병이 있었다. 문경은 남북의 휴전선처럼 백제·고구려와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던 국경이었고, 공격과 방어의 거점이었다.

 

이에 신라는 영강(서쪽)과 금천(동쪽) 주변을 따라 관방시설인 산성을 쌓고 진호사찰을 세웠다. 관방시설과 진호사찰은 마치 햄버거 세트 메뉴와 비슷한 거였다. 참고로, 서라벌(신라의 수도)은 월성(도성), 명활산성 등의 관방시설, 황룡사·분황사 등의 호국사찰로 구성된 방어시스템이었다.

 

문경의 좌측(서쪽)에는 계립령로와 영강이 있었고, 우측(동쪽)에는 적성로와 금천이 있었다. 그 형세가 ‘V’ 자형 방패였다. 문경은 신라 삼국통일의 ‘V’ 자형 방패였고 관문(關門)이었다. 문경은 신라 북진의 창이었고, 백제·고구려·당의 남진을 저지하는 방패였다. 관문은 그곳을 지나야 드나들 수 있는 중요한 길목을 말한다. 문경이 없는 신라의 삼국통일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게 필자의 견해이다.

 

화장사지3층석탑과 미면사지 적석탑, 그리고 도천사지(영원사지)3층석탑 3기는 모두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세워진 호국사찰이라는 게 필자의 견해이고, 질문하신 두 분에게 드리는 답변이다. 문경은 신라 삼국통일의 거점이자 통로였다. 그래서 문경은 신라 삼국통일의 관문과 로드라고 말할 수 있다.

 

 글쓴이 최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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