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치로

작성자돌삐|작성시간26.06.18|조회수10 목록 댓글 0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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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白山眠을 넘는 중요한 교통로 가운데 忠州로 통하는 竹嶺·低首嶺·伐峙·鷄立嶺·鳥嶺·伊火嶺의 嶺路를 살펴보았다. 소백산맥은 嶺湖를 가르는 천연의 분수령으로 小國의 分立時期부터 자연적인 경계가 되고 삼국의 정립 후에는 北進과 南征을 위하여 계립령과 죽령을 열었다. 그후 요충지마다 嶺路를 개설하는 한편 關防을 설치하여 길을 막기도 하였다. 嶺南에서는 여러 갈래의 길을 따라 산맥을 넘지만 嶺北에서는 대개 충주로 집결되어 남한강을 따라 서울까지 이어진다. 그 길목에는 삼국의 영역변천과 문화의 전파 또는 교통·통신의 발달에 따른 여러가지 시설이 있게 되어 오늘날에 유적으로 남아 있다. 소백산맥 지역의 역사변천과 유적을 통해서 본 諸路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① 소백산맥상의 諸路는 단양을 경유하여 충주로 연결되거나 직접 충주로 통한다. 단양을 경유하는 嶺路는 竹嶺·低首嶺·伐峙 등으로 이를 竹嶺三路라 할 수 있으며 충주로 직통하는 길은 鷄立嶺·鳥嶺·伊火嶺으로 이는 鳥嶺三路라 할 수 있다.

② 竹嶺三路 가운데는 竹嶺路가 삼국시대 이래로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주요 교통로가 되고 있다. 그러나 鳥嶺三路는 주요 통로가 계립령·조령·이화령 순으로 점차 남서쪽으로 이동되었다. 즉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계립령로가 중요한 교통로가 되었지만 고려시대 이후 조령로에 많은 통행이 있게 되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계립령은 거의 폐로가 된 반면 조령에는 壬辰倭亂을 계기로 관방이 설치되는 등 천험의 요새지로서 중시되었다. 그러나 일제 때인 1925년에 이화령에 新作路가 개척되면서 이곳이 주요 교통로가 되고 조령은 관광로 또는 유원지가 되었다.

③ 삼국의 정립기에 소백산맥은 신라와 백제의 경계가 되었다. 그러나 강력한 중앙정부의 세력은 미치지 못한 변방지역으로서 군사적인 충돌은 없었던 듯하다. 그리고 阿達羅王代의 계립령로와 죽령로의 개척은 북방진출의 시초로서 신라와 백제는 4세기말까지 계립령―죽령선에서 대치한 것으로 보인다.

④ 고구려 廣開土王의 南征으로 同王 6년(396)에 영춘의 阿旦城을 비롯한 단양지역은 고구려의 영역이 되어 신라와 죽령에서 접하였다. 그 4년 후인 同王 10년(400)의 庚子年 출병으로 고구려 세력은 죽령이남의 榮豊·安東·盈德·蔚珍까지 미치면서 죽령은 고구려의 内地가 되어 신라지역 경영을 위한 교통로가 되었다. 이때 고구려 세력의 南征路는 죽령과 저수령에 한정되며 벌치·계립령 以西地域은 계속 신라가 장악하고 있었다.

⑤ 죽령·계립령·조령에는 嶺上에 行城 형태의 山城이 있는데 그 방어하는 쪽이 죽령에는 동쪽으로, 계립령과 조령에는 서쪽으로 되어 있어 비교된다. 그러나 죽령산성은 壬辰倭亂때 변형된 것으로 보여 대체로 신라측에서 북쪽을 방어할 목적으로 天險의 소백산맥을 이용한 長城을 구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죽령·저수령·벌치·계립령·조령의 남북 교통로에는 그 길목을 차단하기 위한 山城이 구축되어 있다.

⑥ 삼국시대에 佛敎는 고구려에서 신라로 전파되었는데 그 통로는 역시 계립령과 죽령이 되었다. 특히 죽령 이남의 영주·봉화지역에는 지리적인 위치로 인하여 일찍부터 佛敎文物이 정착하였다. 즉 북방으로부터 전달된 불교가 峻嶺을 넘어 신라지역에 유입될 때 國都慶州에 앞서 변방지역인 이곳에서 먼저 신앙과 문화의 맥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계립령을 통한 불교문화는 善山地域에서 정착되었다.

⑦ 소백산맥 교통로에는 대개 큰 寺院이 경영되었다. 죽령로의 輔國寺址, 저수령 또는 벌치로의 大興寺址, 계립령로의 彌勒里寺址(大院寺址), 조령로의 惠國寺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輔國寺址와 彌勒里寺址는 거대한 石窟寺院으로서 특히 주목되는 바이며 소백산맥의 남북을 잇는 大路上에 造營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계립령로는 月岳山을 끼고 있어 후대까지 獅子頻迅寺·德周寺·月光寺와 같은 名刹과 造形物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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