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성로. 벌치로. 벌재길

작성자돌삐|작성시간26.06.17|조회수14 목록 댓글 0

아래의 내용은 박상일 교수님의 논문에서 가져 온 것입니다.

귀한 논문을 읽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小白山脈地域의 交通路와 遺蹟

 

—忠州와 연결되는 交通路를 중심으로

 

 

5. 伐 峙 路

 

 

다음으로 伐峙는 李道學 교수가 지적했듯이 삼국시대의 교통로로서 예천군 용문면과 문경 군 산북면에서 시작하여 문경군 東魯面-磵松里-赤城里에서 단양군 大岡面의 傍谷里-伐川里-佳山里-舊丹陽邑으로 연결된다. 현재도 단양-예천 간 직행버스가 다닐 정도로 중요한 교통 로인데 경상도쪽에서 오르는 길은 경사가 약간 심하지만 고도 620m의 고개마루에서 단양까 지는 순탄한 길이 계속된다. 전체적으로는 죽령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평탄한 길이다. 필자 가 이 지역을 조사한 1989년 9월에는 이 길의 포장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공사가 끝 나면 죽령에 버금가는 교통의 요지가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伐峙路가 역사적으로 중시되어 사료에 등장한 경우는 없다. 단지 지리적인 조건으 로 보아 소백산맥을 넘어 다닐 수 있는 중요한 嶺路임에 틀림없으며 삼국시대 이래의 關防 施設이 길목을 차단하고 있어 이를 입증해 준다. 伐峙는 흔히 벌재재61)라고 불리고 있으며 각종 지리서에는 伐峙로 기록되어 있다.62) 그리고 벌치의 남쪽인 赤城里는 벌재를 한역한 지명으로 볼 수 있는데 단양 赤城에 이르는 길의 입구에 다시금 赤城〔벌재〕이라는 지명을 붙인 것은 단순한 고개 이름에서 연유했다기 보다는 단양의 진입로인 데서 비롯되었으며 그 렇기 때문에 이 길은 이미 삼국시대에 존재하였다는 주장이 있다.63) 그런데 伐峙〔벌재〕의 북쪽 단양읍 伐川里의 속칭이 ‘벌내’이고 벌재에서 발원하여 이 마을 앞을 지나는 내가 곧 ‘벌내’이다. 따라서 이곳의 지명이 단양 赤城으로 진입하는 길목에서 유래했다기보다는 반대 로 이 고개이름에서 赤城里와 伐川里가 유래하였고 신라의 북진이후의 단양 赤城도 벌재와 연관된 지명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64) 왜냐하면 지명은 종족의 이동이나 영역의 변천에 따라 옮겨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벌치로의 개통시기나 역사의 변천과정은 문헌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으나, 지리적인 위치나 동로면 간송리의 老姑城과 단양읍 가산리의 獨樂城과 같은 유적을 통하여 볼 때 삼국시대 이후 계속하여 죽령에 못지 않게 통행된 교통 로임에 틀림없다.  <박상일 교수님>

 

 

맺 음 말

 

小白山眠을 넘는 중요한 교통로 가운데 忠州로 통하는 竹嶺·低首嶺·伐峙·鷄立嶺·鳥嶺·伊火 嶺의 嶺路를 살펴보았다. 소백산맥은 嶺湖를 가르는 천연의 분수령으로 小國의 分立時期부 터 자연적인 경계가 되고 삼국의 정립 후에는 北進과 南征을 위하여 계립령과 죽령을 열었 다. 그후 요충지마다 嶺路를 개설하는 한편 關防을 설치하여 길을 막기도 하였다. 嶺南에서 는 여러 갈래의 길을 따라 산맥을 넘지만 嶺北에서는 대개 충주로 집결되어 남한강을 따라 서울까지 이어진다. 그 길목에는 삼국의 영역변천과 문화의 전파 또는 교통·통신의 발달에 따른 여러가지 시설이 있게 되어 오늘날에 유적으로 남아 있다. 소백산맥 지역의 역사변천 과 유적을 통해서 본 諸路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소백산맥상의 諸路는 단양을 경유하여 충주로 연결되거나 직접 충주로 통한다. 단양을 경유하는 嶺路는 竹嶺·低首嶺·伐峙 등으로 이를 竹嶺三路라 할 수 있으며 충주로 직통하는 길은 鷄立嶺·鳥嶺·伊火嶺으로 이는 鳥嶺三路라 할 수 있다.

 

② 竹嶺三路 가운데는 竹嶺路가 삼국시대 이래로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주요 교통로가 되 고 있다. 그러나 鳥嶺三路는 주요 통로가 계립령·조령·이화령 순으로 점차 남서쪽으로 이동 되었다. 즉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계립령로가 중요한 교통로가 되었지만 고려시대 - 162 國史館論叢 第16輯 이후 조령로에 많은 통행이 있게 되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계립령은 거의 폐로가 된 반면 조 령에는 壬辰倭亂을 계기로 관방이 설치되는 등 천험의 요새지로서 중시되었다. 그러나 일제 때인 1925년에 이화령에 新作路가 개척되면서 이곳이 주요 교통로가 되고 조령은 관광로 또 는 유원지가 되었다.

 

③ 삼국의 정립기에 소백산맥은 신라와 백제의 경계가 되었다. 그러나 강력한 중앙정부의 세력은 미치지 못한 변방지역으로서 군사적인 충돌은 없었던 듯하다. 그리고 阿達羅王代의 계립령로와 죽령로의 개척은 북방진출의 시초로서 신라와 백제는 4세기말까지 계립령―죽령 선에서 대치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廣開土王의 南征으로 同王 6년(396)에 영춘의 阿旦城을 비롯한 단양지역은 고 구려의 영역이 되어 신라와 죽령에서 접하였다. 그 4년 후인 同王 10년(400)의 庚子年 출병 으로 고구려 세력은 죽령이남의 榮豊·安東·盈德·蔚珍까지 미치면서 죽령은 고구려의 内地가 되어 신라지역 경영을 위한 교통로가 되었다. 이때 고구려 세력의 南征路는 죽령과 저수령 에 한정되며 벌치·계립령 以西地域은 계속 신라가 장악하고 있었다.

 

⑤ 죽령·계립령·조령에는 嶺上에 行城 형태의 山城이 있는데 그 방어하는 쪽이 죽령에는 동쪽으로, 계립령과 조령에는 서쪽으로 되어 있어 비교된다. 그러나 죽령산성은 壬辰倭亂때 변형된 것으로 보여 대체로 신라측에서 북쪽을 방어할 목적으로 天險의 소백산맥을 이용한 長城을 구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죽령·저수령·벌치·계립령·조령의 남북 교통로에는 그 길목을 차단하기 위한 山城 이 구축되어 있다.

 

⑥ 삼국시대에 佛敎는 고구려에서 신라로 전파되었는데 그 통로는 역시 계립령과 죽령이 되었다. 특히 죽령 이남의 영주·봉화지역에는 지리적인 위치로 인하여 일찍부터 佛敎文物이 정착하였다. 즉 북방으로부터 전달된 불교가 峻嶺을 넘어 신라지역에 유입될 때 國都慶州에 앞서 변방지역인 이곳에서 먼저 신앙과 문화의 맥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계립령을 통한 불 교문화는 善山地域에서 정착되었다.

 

⑦ 소백산맥 교통로에는 대개 큰 寺院이 경영되었다. 죽령로의 輔國寺址, 저수령 또는 벌치로의 大興寺址, 계립령로의 彌勒里寺址(大院寺址), 조령로의 惠國寺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輔國寺址와 彌勒里寺址는 거대한 石窟寺院으로서 특히 주목되는 바이며 소백산맥 의 남북을 잇는 大路上에 造營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계립령로는 月岳山을 끼고 있어 후대까지 獅子頻迅寺·德周寺·月光寺와 같은 名刹과 造形物이 건립되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