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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답하기(Q&A)

등잔박물관

작성자돌대사|작성시간05.12.04|조회수168 목록 댓글 0

 


등기구에 있어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또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은 목등잔이다. 목등잔은 다른 재질의 등잔과 비교하여 그 재료의 수명상 한계가 있기 때문에 주로 조선 후기의 것들이 남아 있다. 목등잔을 등경과 등가로 나누어 살펴보면, 등경은 등잔을 적당한 높이에 얹도록 한 등대로서 '등경걸이'라고도 부른다. 대표적인 등경의 형태는 넓직한 하반에 3~4개의 걸이용 단이 있는 기둥이 세워져, 필요한 높이의 단에 등잔걸이를 걸치고 등잔을 그 위에 얹어 사용하도록 하였다 등잔 밑에는 우각형( 牛角形), 유방형(乳房形), 타구형(唾具形)의 기름받이를 달아 심지에서 떨어지는 불순물을 받도록 하였으며, 상하귀천의 구별없이 가장 애용된 실내 등기 양식이다.

등경은 청동, 철, 놋쇠의 금속재와 함께 나무를 주재료로 하였는데, 그 중 나무로 만든 등경은 각 가정에서 필요에 따라 자가제작(自家製作)하였으므로 매우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한편, 걸이용 단이 없이 상반부에 등잔을 얹도록 만든 것을 등가라고 하는데, 이 역시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등가는 대체로 석유 등잔이 쓰이면서 점차 보편화되었다.

장식은 주로 받침대(竿柱)에 행해져서 대매듭, 줄구슬, 꼰노새김, 기하학적 돋을새김 등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밑받침은 보통 재떨이를 겸해서 사용하는 실용성이 돋보이지만, 간혹 연꽃같은 새김을 해서 한껏 멋을 낸 경우도 있다. 굽에는 별 다른 장식없이 혹 기름이 튀더라도 흘러내리지 않도록 턱을 만들어 두는 정도로 마무리 했다.

대가지기둥 목제등가
높이 38cm, 밑지름 23cm 조선후기 아이디어가 잘 표현된 등잔이다. 대충 깎은 통나무 밑받침에 기둥은 대나무를 몇 가닥 쪼갠 후 댓가지가 오므라들지 않도록 팽이 형태의 나무토막을 박아 넣고 노끈으로 얼기설기 엮어 놓았다. 대나무 속에 박아 넣은 팽이형 나무토막이 등잔을 얹어 놓는 등잔 받침이 되고 몇 가닥의 댓가지가 등잔을 감싸고 있어 전체적으로 매우 안정된 구도를 느낄 수 있다.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이렇게 멋진 작품을 만들어 낸 익명의 솜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촛대에는 일상생활용과 의.예식용(儀.禮式用),그리고 이동용인 수초(手燭)가 있다. 기본 형태는 복발형(覆鉢形) 받침 위에 죽절형(竹節形),염주형,장구형의 기둥(竿柱)이 서있고 그 위에 짧은 초꽂이 촉이 달린 받침접시가 있어 초를 안전하게 꼿도록 한 것으로, 주로 의.예식에 쌍으로 사용하였다.

반면 일상생활용 촛대는 박쥐형, 나비형, 원형(圓形),파초형 등 불후리(火扇)가 달린 것으로, 편리하게 사용.보관할 수 있도록 분해와 조립이 가능하다. 궁중의 의.예식에 사용된 것으로 커다란 두석대촛대(豆錫大燭臺)가 있는데 2m 가 넘는 초대형 촛대를 기둥의 중간에 나사못으로 연결하여 분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수초는 집안에서 간단한 용무를 보기 위해 이동할 때 편리하도록 만든 촛대이다. 유기등잔은 주로 안방에서 사용되었다. 둥근 받침에 몇단의 걸이용 기둥을 세우고 등잔과 기름받이를 위 아래로 걸어서 사룡할 수 있도록 하였다. 기름받이는 등잔의 기름이 타면서 떨어지는 찌꺼기를 받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기둥의 걸이용 단을 만든 것은 필요에 따라 등잔의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기둥의 상단부는 고사리 말림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고려시대에서도 나타난다.

고사리말림형유기등경(光明斗) / 조선후기
주로 안방에서 사용되었다. 둥근 받침에 3∼4단의 걸이용 기둥을 세우고 등잔과 기름받이를 위 아래로 걸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기름받이는 등잔의 기름이 타면서 떨어지는 찌꺼기를 받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기둥에 걸이용 단을 만든 것은 필요에 따라 등잔의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기둥의 상단 부분은 고사리말림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고려시대에서도 나타난다.


철제등잔은 조선 중기로 접어들면서 많이 만들어진 양식이다.
쇠가 지닌 단단하고 유연한 성질을 이용하여 일상생활에 매우 유용한 시설장비, 도구 등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특히 순도가 비교적 높은 무쇠로는 솥이나 화로, 등잔 등을 만들었다.

철제 등잔은 고려시대의 염주형 문양에서 점차 죽절형 문양으로 변모해 가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대체로 불후리와 같은 장식 부분이 파손되는 등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기 어렵지만, 전체적인 모양이 아름답고 화려하다.


무쇠 바탕에 일일이 은실을 박아 만든 촛대로 , 만든 사람의 수고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육각형의 화선과 촛대의 이음새 부분에 '희(囍)'자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촛대 기둥 상단부에 화선(火煽)의 이음새를 달고 회전할 수 있도록 장치하여 불막이 역할을 할 수 있게 하였다. 분해와 조립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는데 사대부 집안의 사랑방에서 사용했던 것이다. 불판과 초받침,화선이 육각으로 전체적인 군형이 잘 잡힌 매우 고급스러운 촛대이다.


사발을 엎어놓은 형태의 촛대받침에 염주문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초 받침을 얹어 초를 꽂을 수 있도록 하였다.

기둥의 염주문은 크기가 다른 두 형태의 염주문을 일정한 순서에 따라 배열하여 비례와 안정감이 살아날 수 있도록 하였다.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이 잡혀있어 고려시대의 탁월한 조형감각을 느낄 수 있다. 뿐만아니라 고사리 말림형 청동등경은 웅장하면서도 세련된 멋이 풍겨,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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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에 심지꽂이가 따로 붙은 백자 서등(書燈)과 호형(壺形)등잔은 석유 수입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 등잔은 잠깐 사용되다가 사라진 것들인데, 석유의 인화성(引火性) 때문에 등잔의 뚜껑 위로 심지를 뽑아 올려 사용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석유가 유입된 것은고종13년(1876년)기록에 나타나는데,

백자서등(白磁書燈) 조선후기 유입초기에는 궁궐에서 사용되다가 점차 양반가와 중인, 그리고 일반 서민들에게로 퍼져나갔다. 등잔과 밑받침을 함께 붙여 구워낸 백자 등잔은 주로 책상에 얹어서 책을 읽을 때 사용하던 서등(書燈)의 일종이다. 서등의 몸체에는 죽절문을 다양하게 넣어 전체 곡선이 잘 살아나도록 하였다, 특히, 기둥 가운데 부분에 자연목을 사용하고 상하부는 도자기로 연결된 '상하부도자기등잔'은 한층 더 아름다운 모습을 느끼게 한다.

백자 서등 가운데는 조도(照度)를 높이기 위해 두 개 또는 네 개의 심지를 등잔 뚜껑에 박아 사용한 것도 있다. 심지가 두 개 또는 네 개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기름이 많이 소모되어, 일명 '부자(富者)등잔'이라고도 한다. 이들 등잔 역시 등잔의 앉음새(臺坐)는 죽절문으로 처리하고 받침으로 이어지는 부분의 아름다운 곡선을 살려 자연스럽게 전체 균형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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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밝혀 활동의 폭을 넓혀준 조명구는 홰,화심 같은 원시적인 것부터 기름이나 초를 이용한 등기구까지 다양하다. 기름을 이용한 등기구인 등잔은 높이가 낮았기 때문에 일정한 높이에 얹을 수 있는 등경이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이에 비해 초는 아주 귀한 것이었으며, 주로 의례나 예식에 이용되었다. 그래서 초를 꽂거나 올려놓을 수 있는 촛대는 매우 화려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반 서민의 집에서 주로 사용하던 초는 질이 낮은 우지초(牛脂燭)나 돈지초(豚脂燭)였고, 밀초(蜜燭)는 매우 귀한 물품이었다.

조선초기 밀초는 관청의 엄격한 통제하에서 사적 매매를 금하고 관혼상제 시에는 관청의 밀초를 배급받아 사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여 권세있는 양반계층에 전용(轉用)되고, 일부는 시장에서 고가(高價)로 매매되었다.

화촉은 빛깔들인 밀초로, 혼례 때 신랑신부가 함께 자는 방을 화촉동방(華燭洞房), 혼례 때 사용하는 여러 가지 기구를 화촉지구(華燭之具)라고 하는 등, 화촉은 일반적으로 혼례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다. 특히 여러 문양과 다양한 색상이 가미된 밀초는 혼례의 즐거운 분위기와 잘 맞아들었다. 궁중에서는 용이 양각된 용초와 모란꽃이 장식된 화초(畵燭)를 사용하였다.

 


제등은 밤에 다닐 때나 의.예식에 사용하는 후대용 조명기구로서 초롱, 등롱, 조족등, 조촉(照燭), 유제등(鍮堤燈)이 있다.

주로 철사.놋쇠.대나무.나무 등으로 골격을 짜맞추고,표면에는 한지나 깁(紗)을 발랐다. 윗 부분에 손잡이를 달아 이동하기에 편리하도록 만들었는데 등의 내부에 초를 넣은 것은 초롱, 등잔을 넣은 것은 등롱, 청사.홍사를 씌운 것은 청사초롱, 홍사초롱이라 부른다. 청사.홍사초롱은 주로 의.예식용으로 사용하였으며, 조촉은 정재(呈才:궁중의 경사스런 잔치에 연행되된 춤) 때 풍악 진행의 신호로 사용하였던 붉은 비단으로 만든 초롱의 일종이다. 용머리가 장식된 긴 대 끝에 초롱을 달아 세우거나 뉘어 풍악의 진행과 멈춤을 알렸다.

조족등(照足燈)은 궁중의 빈전이나 순라꾼이 야경을 돌 때 사용하였던 것으로, 그 형태가 박과 같다하여 박등, 도적을 잡을 때 사용한다 하여 도적등, 또는 조적등(照賊燈)이라고도 불렀다. 등의 형태를 보면 뼈대는 대가지나 쇠로 만들고 표면에는 누비주름 무늬의 기름종이를 두껍게 바르는데, 및은 잘라 틔었다. 위쪽에는 손잡이를 붙이고 등의 내부에는 초를 꽂는 철제의 회전용 돌쩌귀가 있어, 등을 상하좌우 어느 방향으로 돌려도 촛불이 꺼지지 않는다.


좌등은 주로 상류사회에서 사용되던 조명기구인체, 실내의 적절한 공간에 놓여 방 전체를 은은하게 비춰 준다. '바닥등'이라고도 하였고 등(書燈)과 장등(長燈)이 있다.

서등은 얇은 나무판으로 상자를 만들어 앞면에 문을 내고 윗면에 원형 환기공을 낸뒤 검은 칠을 한 것으로, 내부에 등잔을 넣도록 고안된 것이다. 문을 열면 등불이 책을 곧바로 비추어 글을 읽는 데 주로 사용되었으므로 서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조선후기 석유가 수입된 이후부터는 자기로 만든 백자 서등이 널리 사용되었다.

내부에 철로 만든 간단한 등경을 고정시켜 설치한 것도 있으며, 크기는 높이 25cm 정도의 소형에서 70cm달하는 큰 것까지 있다.

장등은 각재(角材)나 반죽(斑竹),오죽(烏竹)으로 기둥을 만든 사각.육각.팔각의 장방형으로 표면에 기름종이를 발랐으며, 유리가 수입된 후에는 유리를 끼워 사용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양식에는 종류에 따라 밑에 서랍이 달려 있기도 하였는데, 여기에 인광노(引廣奴:성냥)나 초, 짧은 촛대를 넣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등의 외형은 다양한 조각으로 장식하고 주칠(朱漆)을 한 화려한 가구양식을 보이고 있다.


부엌등(廚燈)은 부엌에서 주로 사용하는 등이다. 부뚜막의 뒤쪽에 놓고 바닥 등으로 사용하는 것과 벽에 걸어서 사용하는 벽걸이 등잔이 있다. 바닥 등으로 사용하는 것은 질그릇으로 만든 집 속에 등잔을 넣어 사용한 것이다. 등잔을 넣고 뺄 수 있도록 질그릇의 앞을 틔우고 위에는 환기구멍을 내었다. 등잔의 불은 에워싼 집이 있기 때문에 바람이나 음식물을 끓일 때 생기는 김에도 쉽게 꺼지지 않는다. 벽걸이 등잔은 벽에 걸어도 거추장스럽지 않도록 대여섯 치 내외로 짧게 만들며 조선후기에는 유기의 양식화된 제품이 다량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토기로 만든 등잔은 삼국시대에 주로 사용하던 등기구이다. 현존하는 유물이 많지 않아 그 자체가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4~6개의 등잔이 하나의 둥근 원통관에 연결된 다등식(多燈式)등잔은 매우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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