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와 나이, 그리고 킹크랩의 꿈
허리가 아파 한의원에 갔다.
한 시간 동안 정성스러운 치료를 받았다.
-온열찜질로 몸을 데우고
-고주파 마사지로 근육을 달래고
-침으로 찌르고
-부항으로 빨아들이고
-마지막으로 파스 한 장 척 붙이고
-약 한 봉지까지 손에 쥐여준다.
의사 선생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쪼그려 앉지 마시고요.
허리 굽힐 때 조심하시고요.
무거운 것도 들지 마시고요.
푹 쉬면서 안정을 취하세요."
치료가 끝나고 카드를 내밀었다.
그런데 치료비가 달랑 2,400원.
순간 카드 단말기가 고장 난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건강보험에 노인의료혜택까지 적용된 금액이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드디어 나도 국가가 인정한 "혜택 받는 나이"가 되었구나.
젊을 때는 할인받는 노인들을 부러워했는데,
막상 내가 그 자리에 서니 기분이 묘하다.
세월은 도둑처럼 오지 않는다.
조용히 와서 양말 신다가 허리를 삐끗하게 만든다.
사실 사건의 발단은 이틀 전이었다.
거창한 운동도 아니고,
무거운 짐을 든 것도 아니고,
격렬한 스포츠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양말을 신다가.
인간이 우주를 탐험하고 인공지능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양말 한 짝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다.
하필 그날은 휴일.
게다가 오래전부터 잡혀 있던 골프 약속까지 있었다.
나는 고민 끝에 파스 한 장 붙이고 출정을 강행했다.
인생이란 원래 몸은 말리는데 마음이 먼저 출발하는 법이다.
첫날 라운드
허리를 보호하겠다는 굳은 결심과 함께 티샷.
공은 내 결심을 비웃듯 옆 홀로 날아갔다.
퍼팅할 때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더니
공이 홀컵 대신 컨시드 라인 밖을 향해 여행을 떠났다.
나는 꼴찌를 향해 꾸준히 전진했고,
그 사이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
젖이 큰 나비여인이 우승을 차지했다.
아픈 허리와 꼴찌 성적표를 들고 생각했다.
골프는 역시 공을 치는 운동이 아니라
자존감을 단련하는 운동이다.
저녁에는 대천항 횟집으로 이동했다.
"대게는 다리가 대나무 마디를 닮아서 대게래."
"킹크랩은 왕게니까, 제일 큰 거야"
"오늘 우리가 먹은 건 킹크랩이야." "아니야. 대게야."
결국 치열한 토론 끝에 다수결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대게는 킹크랩이 되었다.
민주주의의 위대한 힘이다.
사실이 의견을 이기지 못할 때가 있다.
밤바다에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1970~80년대 청춘들이
반세기가 지난 뒤에도 기타를 잡고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신기했다.
젊음은 지나갔지만
젊었던 기억은 아직 퇴직하지 않았다.
노래가 무르익을수록
추억은 점점 아름다워졌다.
그러다가 누군가 머리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대머리 독수리가 되었다.
돌아오는 차 안은 더욱 가관이었다.
누군가는 웃다가 숨이 넘어가고,
누군가는 배를 잡고 몸을 웅크리고,
누군가는 눈물까지 흘렸다.
이름 삼행시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혁! 띠만 차고 날뛰는 놈.
옥! 녀가 되어 덮치는 놈.
덕! 더꿍 떡장단 맞추며 춤추는 놈.
그 뒤 내용은 차마 기록으로 남길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날 모두가 차 안에 배꼽을 두고 내렸다는 것이다.
문득 생각한다.
나는 노인인가?
아침이면 아직도 설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반갑고,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고,
함께 웃을 사람이 있으면 달려가고,
내일을 꿈꾸며 잠드는 사람인데.
어쩌면 노인이란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호기심을 잃어버린 사람일지도 모른다.
노인의료혜택은 받지만
여전히 새로운 꿈을 꾸며 산다.
허리는 조금 굽어도 좋다.
마음만 굽지 않는다면.
양말 한 짝에 허리는 삐끗했지만,
좋은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보낸 1박 2일 덕분에
인생은 아직도 쭉쭉 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자신 있게 말한다.
"예, 노인은 맞습니다.
하지만 꿈꾸는 노인입니다."